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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노

고구려의 식읍 제도 고구려의 식읍 왕이 군사를 삼도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할 때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 등을 사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사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 주어 구사자로 삼고 아들 다우는 대사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곡림에 이르렀다. 그 때 신성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를 거르리고 왕을 맞아 적을 세차게 치니 모용외가 지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고노자에게 대형의 벼슬을 더하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 선비는 앞뒤로 적을.. 더보기
유리왕 이야기, 황조가 - 삼국사기 - 유리왕 이야기 유리왕 3년 가을인 7월에 짓고 떨어진 궁[이궁,별궁]을 맡으니 이다. 겨울인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장가 들으니 두 여자다. {아가씨}로써 계시니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고 불린 여자이니라. 또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 불린 여자였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두 여자가 다투어 사랑하지 않는 바 서로 화하도록 왕이 맡았다. 에 만드니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궁으로 각각 있게 하였다. 후에 왕이 밭을 짐지어 맡으니 이다. (가서) 칠일간 아니 돌아오니 두 여자 {아가씨}가 다투어 싸웠다. 가 욕하여 를 가로되 "너는 집안의 비천한 첩이다. 어찌 무례가 심한가?"하였다. 는 부끄러워 하여 망망히 돌아갔다. 왕이 듣고 뒤이어 쫓아갔다. 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