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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 중에서 토지제도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토지제도 역시 신문왕의 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쉬울 듯 싶네요. 지금까지의 포스팅에서 의 정의를 권주 1인의 독재정치 확립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버리고, 로 이해했습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른 전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면서 읽어주세요. 1.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후 녹읍을 폐지하다 신문왕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다. 신문왕 9년 정월, 교를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차등있게 주었는데, 이것을 영구히 법으로 하다. 성덕왕 21년 8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다. 경덕왕 16년, 내외 관료들의 월봉을 중지하고, 녹읍을 부활하다. 위 사료.. 더보기
성덕왕 대 당과 신라와의 관계 개선 성덕왕 대 당과 신라의 관계 개선 정월에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보내어 신년(新年)을 하례(賀禮)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으니 당 황제가 그에게 광록소경(光祿少卿)의 직을 더하였다. 의충(義忠)이 돌아올 때 당 황제가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하사하였다. - 삼국사기 9, 신라본기 9, 성덕왕 34년 - 참고글 : 위 사료는 당과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당은 삼국통일 후 나당 전쟁을 통하여 신라와의 관계가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 신라 역시 당과 우호적이지는 않았구요. 신라는 삼국통일 당시 당이 대동강 이남을 인정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나당전쟁으로 신라 자체를 복속하려고 했던 것이 상당히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덕왕 대 당과 신라는 다시 관계 개선을 시.. 더보기
만파식적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햇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大王巖)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현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 더보기
선덕왕 김양상의 즉위 선덕왕의 즉위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하니 성은 김(金)씨요 휘(諱)는 양상(良相)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이었다. 아버지는 해찬(海瑗) 효방(孝芳)이며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이니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비(妃)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角干) 양품(良品)의 딸이었다. -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선덕왕 - 참고글 : 선덕왕은 혜공왕 대의 혼란을 진압하며 상대등계로서 즉위한 왕입니다. 선덕왕의 즉위는 무열왕의 직계가 아닌 내물계의 왕으로 등장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