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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주전론

수능 근현대사 정리 2 :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6. 개화 세력의 대두와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파의 뿌리는 박지원, 박제가를 축으로 하는 북학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청을 왕래했던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로부터 신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인들도 통상개화론의 주연들로 등장하게 된다. 통상개화론자들 이후로 개화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청의 양무 운동(洋武運動)를 모델로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와 문명 개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적(變法的)인 개화를 모색하는 급진 개화파가 그것이다. 온건 개화파 같은 경우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중심으로 깔아둔 양무 운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청나라와 친하고 상대적으로 일본과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도 서기(東道西器). .. 더보기
(한국근현대사 5) 1860년대 이후 계속된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 더보기
이항로의 화서집 이항로의 화서집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