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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염사치 사화를 통해 본 한군현의 정책 염사치 사화를 통해 본 한군현의 정책 1. 염사치 사화의 내용 왕망 때에 이르러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가 되었다. 그는 낙랑 땅이 토지가 아름답고 백성들이 부유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자기 나라에서 도망해 나와서 그곳에 항복하려고 자기 사는 부락을 나왔다. 이 때 그는 밭 가운데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염사치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남자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인데 내 이름은 호래요. 우리들 천오백 명이 나무를 베려고 나왔다가 한나라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모두 머리를 깎고 종이 되어 지금 삼년이 되었읍니다] 한다. 염사치는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러 가는 길인데 그대들도 같이 가겠는가] 하니 그들은 모..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4 - 한 무제의 황제지배체제 완성 중국사 이야기 34 - 한 무제의 황제지배체제 완성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겠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을 내치, 외치, 유교정치, 동중서라는 관점에서 나눠 다루겠습니다. 상홍양 등에 관련된 경제정책은 다음장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1. 한무제의 황제지배체제의 배경 한무제의 정치체제는 중국 역사상 를 현실적, 이념적으로 완성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계속적으로 이용할 황제지배체제를 논리적, 현실적으로 완성하였고, 실제 그 이념에 따라 가장 고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앞에서 설명한 문제, 경제가 이루어놓은 업적 때문입니다. 역대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서 홀로 잘나.. 더보기
초기 북방국가들의 성장 -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 초기 북방 국가들의 성장 1. 부여의 등장 부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등장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고 합니다. 즉,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로서 중국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부여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보아 국제적인 독립국가였을 것입니다. 부여는 송하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 5곡의 수학이 풍성하고 금택지이며, 동물자원이 많다고 나옵니다. 반농반목의 농경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측 기록에도 고구려는 나쁘게 써 놓은 것에 비해, 부여는 사람이 후덕하고 예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는 보통 예맥족이 일으킨 예족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예족에서 갈라져 나온 예족 계통의 맥족 국가라고 합니다. 2. 고구려의 등장 고구려의 건국은 삼국사.. 더보기
한사군 점령기의 법령 증가 기록 한사군 시기 법령 증가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범금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 - 한서 지리지 제 8권 - 사료해석 : 초기 고구려는 8조목의 법만 있었고, 풍속이 각박하지 않아 도둑질이 없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사회가 새롭게 개편되는데 그중 하나가 법령 조목의 증가입니다. 법 조목이 증가하였다는 자체가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더보기
한사군 설치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싫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 더보기
위만조선 열전 위만조선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 고후(한나라 혜제왕 대 여후 섭정기)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외번)을 삼아요새 밖의 만이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자 주변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자못 많이 유인하였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한반도 남방의 중국, 3한의 모태)이 글을 올려 천자를 .. 더보기
조선상 역계경 조선상 역계경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않자 동쪽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역계경을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천호나 되었으며 이들은 조선 공번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삼국지 위서 위략 - 사료해석 :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이 칭호로 고조선 시대의 이라는 용어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왕이 있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등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계층은 곧 고조선이 연맹왕국 단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이 있었으나, 그들이 왕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들 지배계급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읍락 내부는 이들에 의한 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예로, 동예에서는 산천을 경계로 침입..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