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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신라시대 경위와 외위를 통해서 본 신라의 지배체제

신라시대 경위와 외위를 통해서 본 신라의 지배체제

1. 신라의 지배층은 간층이었다.

초기 신라의 지배층은 6부를 구성한 <간>층이었습니다. 신라는 화백회의 등을 통해 6부가 합의로 국사를 이끌어가는 연합적인 국가였는데, 6부가 연합하여 추대한 왕을 <거서간>이라고 합니다. 거서간은 간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지요.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다른 6부의 간들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기 시작하는 데 이 때 등장한 용어가 바로 <마립간>이라는 용어입니다. 마립간은 간 중의 최고 간이라는 뜻으로 군장들을 포괄하는 대군장을 말합니다.

즉, 신라가 이렇게 6부 체제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신라 초기에는 6부의 간들은 각각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사적 관료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중대사는 6부가 공동하교를 내려서 결정하였고, 국왕도 6부 중의 하나로 결정한 내용을 실제 집행하는 <집행자>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6부는 독자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정 참여를 위해 수도인 경주에서 생활하였고 이들이 실제 국가 행정에 참여하면서 독자적인 관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라 중앙에서 국정에 참여하던 국왕 이하의 관료단에게 주었던 직위가 바로 <경위>입니다. 경위는 서울 경자를 써서 <수도에서 일하는 국정 참여자들의 직위>라는 뜻이지요. 그 중에서 6부에 직속한 <간>층이 가진 관위는 간군관등, 왕의 부족 등에서 일하면서 실무 계급으로 활동한 자들이 가진 관위는 비관군간등이라고 합니다. 간군관등이란, <간>층이 가진 관등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비록 수도에 머물고 있더라도 6부에 속한 <간>들이 사적으로 거느린 사람들은 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국인은 <간>층과 왕족의 실무 담당자만을 말하며,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예속민으로서 <노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신라 상대의 <간>과 <경위>의 개념입니다.

2. 진흥왕 이후에는 간이 사라지고 외위가 등장하다.

그러나 신라의 왕권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진흥왕기에는 이제 6부의 <간>세력이 약해지면서, 왕이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단독하교를 내리는 중앙집권기의 기반이 마련됩니다.

진흥왕은 이제 <간>층의 독자적인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바꾸어 버리고, <간> 계급의 유력자들은 행정관료로 흡수해버립니다. 그러면서 진흥왕과 연계된 김씨 족속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김씨 뼈대를 형성한다는 뜻의 <골>족입니다. 특히 진흥왕과 연결된 골족은 이후 선덕여왕기 성골(성스러운 골)과 구분하여 일반적으로 진골(진정한 골)로 표현됩니다.

이제 신라 사회에서는 초기의 부족장 세력인 <간>층 대신에, 진골이 국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골은 왕권을 수호하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사적으로 <품>족을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신라 골-품제도에서는 품족이 1-5두품만 있었지만, 진골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품족에게 특혜를 주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장하게 됩니다.

진골들은 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수도에서 <경위>를 가진 지배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진흥왕기 이후 개편되는 행정구역 및 지방제도 강화를 이용하여 대부분의 지방관 자리를 차지합니다. 진골은 이제 식솔을 이끌고, 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하며, 이것은 과거 족장세력<간>을 대신하여 행정적인 국가 기반이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왕으로서는 진골이 지방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만족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진골들이 지방을 장악하자, 자신들의 가신들에게 독자적으로 관위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진골의 부하, 가신, 하급관료, 마을 촌주 등은 진골이 내린 사적인 관등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외위>라고 불리는 관등입니다. 즉, 외위는 왕이 내린 관위가 아니라, 진골이 내린 관위입니다. 이로서 진골은 <간>층을 누르고 지방을 장악했으며, 독자적인 세력들을 누르고 중앙집권에 기여합니다. 왕은 당연히 <외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왕권이 강해지는 것이니까요.

3. 신라가 삼국통일 후 외위는 왕권의 걸림돌이 되다.

그러나 문무왕 이후 삼국통일이 완성되면서, 진골귀족들이 독자적으로 벼슬을 내리는 외위라는 제도는 왕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제도가 되어 버립니다. 왕은 군현제와 중앙집권을 통해서 삼국통일 후 전제적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는데, 진골 귀족들은 지방마다 독자적인 관료군을 데리고 있었으니까요. <외위>가 존재함으로서 진골은 지방에서 사적인 기반을 가지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유 군대와 재산을 가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삼국통일 전쟁으로 김유신계를 비롯하여 진골의 숫자는 한없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국왕은 이제 진골 귀족의 특혜를 철폐합니다. 즉, <외위>를 완전히 없애고 경위로 외위를 흡수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진골의 사적 관료군을 국가 관료군으로 흡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자, 진골들은 불만을 갖게 됩니다. 국왕은 외위를 폐지하는 대신 왕권에 밀착된 진골들에게는 뭔가 다른 특혜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부각된 것이 바로 <부>라는 것입니다. 부는 원래 국왕이 일정한 땅을 신하에게 <식읍>으로 내릴 때 그 식읍의 재물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사적 재산의 보관 지역이었습니다. 국왕은 <외위>를 폐지하면서 종친들에게 <부>라는 것을 하사함으로서 유력한 진골 세력가들은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면, 일반 관료나 중소 진골귀족들은 모든 <외위>세력을 잃고 국왕의 통제권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진골에 의해 사적으로 외위를 받은 자들은 중앙 경위의 관직에 포함시켰는데, 이 때 외위의 관직에 +10을 하여 경위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외위 1등급 관리는 경위에서는 +10을 하여 11등급 관리가 되는 것이지요. 즉, 외위에서의 최고 관직은 경위에서의 11관등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죠.

결국 <외위>의 폐지는 일반 귀족의 약화, 외위 관리의 중앙 관리화, 종친 관리에게는 <부>의 하사라는 것을 통해 국왕권이 강해지고, 중소 진골들의 입지를 좁게 만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외위가 사라진 다음에 생긴 <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부 체제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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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사료 읽기

외위제 : 문무왕 14년, 여섯 계파의 진골들이 5경와 5주에 나가 있으면서 따로 칭해오던 관명의 위(외위_를 경위로 대체해 주었다. 약간에게는 일길찬, 술간에게는 사찬, 고간에게는 급찬, 귀간에게는 대나마, 선간에게는 나마, 상간에게는 대사, 간에게는 사지, 일벌에게는 길차, 피일에게는 소오, 아척에게는 신저지를 주었다.

삼국사기 40권 직관지 하, 외관 외위

왕이 하교하여, 외관이 집안 사람들을 대동하고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법흥왕 25년 정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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