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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교회>와 교황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일원화된 불교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인도 아쇼카왕이 주장한 전륜성왕의 이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즉, 자신은 불교를 지상에 전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법왕임을 자처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라의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이고, 호법이란 곧 호국과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흥왕은 불교 행정 구역 일원화와 함께 백좌강회와 팔관회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대하게 엽니다. 백좌강화란 백고좌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법회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성대하게 개최한 법회입니다. 이것은 외적을 막기위한 호국 법회이자, 국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신성법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호국 법회를 위해 신라에서 만든 절이 <황룡사>입니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터로 만들려고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그 터가 신라 초기 소도가 있던 <7가람의 하나>라고 계시하면서 절을 지은 곳입니다. 이 절이 곧 신라 호국 불교의 원산지입니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 호국 행사로 이용되었는데, 훗날 몽골 침입기에 몽골은 이 절의 호국적 성격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진왜란기 일본도 불국사 등 주요 호국 법회가 열리는 절이나 터를 불태우려고 했다는군요.

2. 신라 중기 : 대중 불교 운동이 시작되다.

신라 초기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근거하여 왕권을 신성화하였다면, 신라 중기 이후의 불교는 이제 대중에게 파고드는 보편적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불교라는 사상의 근원이 바르나 제도를 부정하면서 만민평등과 해탈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였던 만큼, 골품적 한계에 직면했던 신라사회에서도 골품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만민을 구제할 대안으로 불교가 중요시된 것입니다.

실제 진흥왕 이후 통일 이전 승려계급은 거의 진골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을 등에 업고 불법에 있어서 왕권에 저항하던 지방의 <부> 세력을 왕이 누르기 위해 국왕은 불교적 이념을 가진 진골들을 적극 중용하였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진골이었고, 전륜성왕의 화신인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들도 진골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정비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신라에서 진골이라는 계층이 새로 성립된 것도 하나의 필연적 사건이었고, 진흥왕기 이후 진골 귀족이 왕권 옹호세력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골성향의 승려들이 바로 원광, 안함, 자장, 의상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 불교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고, 문무왕, 신문왕기에 김흠돌의 난 등을 계기로 진골세력들마저 정권에서 몰아내고 왕의 전제정권이 확립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왕권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부합되는 진골 외에는 국정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6두품 등 두품 세력을 곁에 두어 국왕의 자문으로 활용하려 했지요.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었던 5,6품들은이제 국왕의 옆에서 자문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교적인 성품이 강했습니다. 반면, 신라사회에서 그동안 진골귀족들의 세력아래에서 진정한 불교의 보편적 정신을 전파하지 못했던 불교 두품 세력들은 거리로 나가 불교의 진정한 도를 백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중 불교 세력들이 흔히 4-6두품이라고 알려진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의 승려등입니다.

혜공은 부개사를 세워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했고, 대안은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면서 불교를 거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최고 신분층인 진골층을 풍자하면서 서민과 함께 불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불교가 국왕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자비를 갖춘 보편적 종교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원효는 어떤 백성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면 정토와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정토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에서 세, 속의 경계는 필요없다는 대중불교의 이념을 갖고 현실에 뛰어들었으며, 스스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하여 스스로 파계당합니다. 그러나 무열왕도 원효를 인정하여 사위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3. 원효 사상의 기본 - 일심론<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 정토종

원효의 사상은 원효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기본 사상만 여기서 파악해 봅시다.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에 입각한 <일심론>이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음이란 신분과 상관없는 것이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여자와 노비들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일심론은 현실(예토), 마음(정토)는 한마음(일심)이라는 것이 핵심으로 마음에 따라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죠. 즉, 대중불교의 기본이념이 바로 일심론입니다.

일심론은 마음에 따라 성인도, 악인도, 여자도, 노비도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극락에 여자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성불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원효는 여자가 성불하면서 바로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 남자로 해탈하므로 여자 역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성인 사상이라면, 원효의 불교는 인간평등의 만민사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극락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륵불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보통 미타사상이라고 하며, 원효의 <정토사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의 정토설은 귀족 위주의 현실적 불교를 죽은 뒤 극락에 가기 위한 <내세적 불교>로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의상 등 다른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의상이 만든 부석사는 화엄종 성격보다는 원효의 정토적 성격이 강합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등이 부석사에 있음으로 해서 부석사는 마치 의상이 만든 절이라기 보다 원효의 <정토사상>을 보여주는 절처럼 느껴집니다.

원효의 일심론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다양한 불교 학파를 통일한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공유논쟁>이라는 불교 최고의 논쟁을 원효가 정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처가 죽은 뒤 인도와 불교가 전파된 중국에서는 공, 유의 개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공>이었는가, 모든 것은 인식에 달려있다는 <유, 식>이었는가를 놓고 다툰 논쟁입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이것에 대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효는 이것을 <일심론>으로 정리합니다. 즉, 부처가 주장한 세계는 공, 유의 나눔이 아니라 본질은 한마음이라는 일심이라는 것이죠.

원래 한마음이란 본질(공 : 진여문), 현상(유 : 생멸문)가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원래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모두 비롯되는 하나인 것이다 - 라는 정리가 원효의 정리입니다.

이 원효의 사상은 공을 중시한 중관학파, 유를 중시한 유식학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당나라 화엄학 성립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를 벗어나 독자적 불교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원효 사상 이전의 귀족적 미륵신앙(상생적 미륵신앙, 하생적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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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생적 미륵신앙 : 부처일족이 미륵이 되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국왕권 옹호 신앙(국왕 = 만민을 구원할 미륵)    상생적 미륵신앙 : 귀족들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부처일족)이 된 뒤 언젠가 내려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원효의 정토신앙 : 누구나 깨달음이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믿음

4. 의상의 대중불교  - 모든 것은 원융이다. : 화엄종

의상의 불교도 각론에서 다루니, 여기서는 기본만 봅시다. 의상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원융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을 갔었죠. 그런데, 5두품 출신인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신라로 돌아와서 의상만 당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의상은 당에 유학이 자유로운 진골출신입니다.

의상은 진골이지만, 불교에서의 교리의 평등성을 인정하여 불교의 보편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노비, 평민, 극빈층 등이 많다고 합니다. 즉,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는 원효가 백성들 사이에 직접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교단불교>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유명한 부석사를 지었는데, 이 부석사는 원효가 신라 화엄종을 개창했음에도, 전술햇듯이 원효성격의 대중불교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종 2대 시조 지엄에게 화엄학을 전수받았는데, 중국의 고승들이 원효의 사상에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불법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볼까요?

<하나 안에 일체가 있으며, 많음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찰나요. 한 찰나가 곧 그 한량없는 겁니다.>

<한국불교전서 중 발췌>

이 말은 곧 모든 것이 하나요, 하나는 모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요체인데, 신라 왕실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백성은 왕에게 귀속된다>로, 하나는 모든 것이다를 <왕실은 백성에게 베푼다>로 해석하여 이 사상을 전제왕권에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목적이나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의상 스스로가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 후세의 불교에서 그의 사상을 왕권에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융>이라는 개념입니다. 원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불립된 각종 종파불교를 묶기 위한 의상의 노력을 집대성한 사상입니다. <원융>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둥글게 감싸서 포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타 다른 교단의 불학들이 불법이 무엇이고,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원융사상>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 진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원융>이라는 진리에 모든 것은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다른 교파의 모든 사상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과 물고기와 영양분들이라면 <화엄종의 원융>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바다>자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상은 다른 통불교적 사상들을 원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통합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종파 불교들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합니다.

5. 원측의 유식 불교 - 법상종

법상종의 성립 배경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유식론을 배울 때로 올라갑니다. 원측은 그 유명한 현장법사 아래에서 당나라 섭론종(구유식 사상)을 배웠습니다. 유식파란, 부처의 가르침은 인식에 달려있는 것으로 실제이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 허상인 <공>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중관학파>와 대립되는 사상이었죠.

그런데, 원측은 유식학파의 <유>라는 실체 역시, <공>이라는 이념을 일부 수용해야 조화롭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의 스님들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원측의 학파를 서명학파라고 하는데, 원측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유식>만이 진리라고 한 중국승 규기 일파를 <자은학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은 일본까지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논쟁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공유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공유논쟁은 원효가 일심론으로 해결합니다.

아무튼, 원측은 이단파가 되어 본국인 신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제자 도증, 태현에게 전수되어 신라 법상종으로 자리잡습니다. 법상종은 유식파의 성격이 강하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 해석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신라 귀족들은 법상종, 계율종을 상당히 옹호하면서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하였습니다. 법상종을 실제 일으킨 인물은 진표인데, 그는 미래 부처인 미륵불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러 내려온다는 <상생적 미륵신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 귀족들이 죽어서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 머물게 되므로, 룻날 내려오는 미륵은 귀족과 연관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신라에는 통일 후 5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화엄종, 법상종 외에 열반종, 계울종, 법성종이었습니다. 5교를 개관적으로 볼까요?(세부적인 것은 각 불교 각론에서 다루겠습니다.)

화엄종과 법상종은 전술했듯이, 부처가 말한 진리는 <공>이냐, <유>이냐의 논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화엄학은 의상을, 법상학은 원측, 또는 진표를 각각 조사로 합니다.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은 불법의 요체 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열반종은 열반, 법성종은 불성, 계율종은 계율이 불법의 요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5교의 난립한 이념을 <십문화쟁론>으로 정리하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주를 달면서 하나로 통일(화쟁사상)한 사람이 바로 원효입니다.

6. 신라 말기의 불교 - 선종

신라 말기에는 어려운 사회상 속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이 유행합니다. 새로운 종교인 선종은 이전의 5개 교파 불교를 모두 교종이라 부르면서, 그 불교들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선종은 불교의 핵심은 경전을 읽거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를 믿어야 한다는 원효의 <정토종> 사상을 일부 인정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심성을 맑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경전과 상관없다(불립문자)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자체가 불성임을 알면 불교의 모든 도리는 깨닫는 다는 것(견성성불)을 말합니다. 선종 경전의 암기보다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므로, 귀족적이기 보다는 민중적인 불교였습니다.

원래 선종은 5호 16국 시대 북위에서 <달마>가 소림사에서 개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종은 경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 자신의 본체와 내면적 기질을 알기 위한 좌선을 중시합니다.

이 선종에서는 경전을 암기한 자에게 교파의 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의발과 바리때를 전수함으로서 다음 조사를 법조를 선발합니다.

5대 흥인 때에는 <신수>라는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흥인이 제자 중 한명을 다음 선사를 뽑아 전해주려고 하면서 모든 제자에게 깨달은 것을 게어(시문)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신수는 선사의 방 앞에다 다음 게어를 적어놓았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흡족하여 제자들에게 이 게어를 종종 암기하라고 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이 게어가 선종의 모든 경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어느날 방앗간 소공인 혜능이 이 게어를 보더니, 글을 쓸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또 하나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었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집이 아니며,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티끌이 생긴다는 것인가요?>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감동하여 혜능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이 방앗간 소공은 비록 글을 몰랐으나, 너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습니다. 흥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혜능의 글을 무시하면서도, 실제로는 혜능에게 선종 6대조 자리를 물려주며,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맞아죽지 않게 도피시켰다고 합니다.

이 혜능이 개창한 선종이 바로 <남종선>입니다. 남종선은 혜능의 유지를 받아 갑작스런 깨달음(돈오)을 중시하고, 왕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민중 불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처음 게어를 걸었던 <신수>와 직계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했는데, 이 북종선은 측천무후의 비호로 귀족불교가 되었습니다. 이 북종선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 점진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점수>라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지눌 스님은 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이론을 합쳐 <돈오점수>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선종이론이 점차 통합되기도 하죠.

신라에서는 <남종선>을 받아들였는데, 이 것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신라 말 사회 혼란 속에서 <교종 종파 5교>가 문란해진 상황에서였습니다. 선종은 각각 나말 호족들과 연합하여 <9산>이라는 유명한 절들을 세우고 호족들과 연계했습니다. 또 선종의 9산이라는 각 파는 대부분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거나 그 자신이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 진골 위주의 교종세력에 대한 반발이자, 선종이라는 종교가 혜능기부터 이어온 혁신적이고 지방분권적이며,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나중에 불교 각론을 세부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힘드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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