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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서임권 투쟁 3 - 서임권 투쟁의 배경 :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의 개혁운동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의 개혁운동

이번 장에서는 중세 수도원과 수도원이 실시한 교회 개혁운동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간단한 글이 되겠네요.

1. 중세의 수도원

수도원은 기원후 4세기 로마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 4세기 서로마가 멸망할 무렵에 혼잡하고, 타락한 교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수도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수도원의 계율은 정절, 복종, 청빈, 검약 등이었다고 하네요. 이 수도원은 로마의 변방이나, 동로마 쪽에서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3세기 성 안토니오, 4세기 성 바질 등의 성인들이 이끌었다고 합니다.

6세기에 본격적인 수도원이 등장하는데, 성 베네딕트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입니다. 베네딕트가 세운 이 수도원은 청빈, 복종, 정결 등을 이상으로 하여 금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상을 추구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검소한 생활, 노동으로 인한 즐거움, 기도하는 생활, 여러 저작들에 대한 필사 등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자신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작은 공동체적인 자급자족적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업행위는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도사들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농업공동체적 사회를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수도원의 자급자족적 생활 방식은 농업뿐만이니라, 생활에 필요한 수공업도 같이 행하면서 산업의 발달에도 일정 기여하였습니다. 단, 상업의 발달과는 거리가 좀 멀죠.

수도원은 중세 교회가 타락할 때 마다, 교회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또 팔사작업을 통해서 공부와 함께 주요 서적들을 남기고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중세의 문화가 후대로 전파된 요인 중의 하나가 수도원의 필사작업입니다. 또 학교교육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인만큼, 수도원에서는 <외원>이라고 하여 외부인을 교육하는 <스콜라>라는 교육소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대학이 등장하기 전의 중세 초기의 학문적 중심지는 수도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2. 교회의 세속화

중세 시대에도 로마 말기와 같은 교회의 타락이 시작되면서, 수도원들은 다시 한번 교화 정화운동을 시작합니다. 중세 교회의 세속화는 프랑크 왕국이 몰락하고 지방분권적 봉건제도가 시작되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회가 봉건화 되면서 교회 역시 세속 군주나 상위 봉건집단에 의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세속 봉건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내 교회에 대해서 <불입권> <영주권> 등의 권한 행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장원 내에 있는 교회들은 귀족들의 여러 가지 맘에 안드는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고, 교회는 점차 세속 권력과 밀착되어 갔습니다.

세속 제후들이 교회령을 침입하자 교회의 세력들은 교회재산을 세속제후로부터 지키기 위한 선례를 교회법전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 결과 <이시도르의 서>를 만들어 봉건제후들은 교회세력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교회가 세속제후의 시달림을 피하기 위해 만든 위조 문서였습니다.

더욱이 9세기 이후 노르만과 마자르, 이슬람의 침입으로 사회는 더욱 봉건화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이 건국됨으로서 독일황제가 로마를 대표한다는 새로운 이념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직자들은 이민족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실로 세속제후의 보호 속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장원의 사제는 대제후의 봉건 신하가 되었고, 고위 성직자들은 대제후에게 토지를 받은 봉신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되자, 성직자에 대한 임명권은 상위 교회가 아닌, 영지를 가진 제후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영주의 영토(장원)에서 운영되는 교회는 그 권한이 영주에게 넘어가서, 영주가 서임권을 갖고, 영주가 교회세를 걷으며, 영주가 교회령의 토지를 관리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상 속에서 고위 성직자들은 오히려 영주에게 충성함으로서 자신들의 직위를 보장받고, 일부 영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3.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이러한 성직자들의 가신화, 영주화라는 문제, 성직자 임명권을 제후가 가졌다는 문제, 성직자가 마치 가신인 양 결혼을 하거나 성직매매를 하는 문제 등은 교회 상위 교구의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초기 교회의 정결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인 대표적 수도원이 클뤼니 수도원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아퀴네스공 윌리엄 승인장으로 성립되었습니다. 그 승인장의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1.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신자들의 자유로운 회사로 간주하고 봉건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2. 수도원장의 선거권은 수도사에게 있다.
   3. 교회와 수도원은 교황에 직속하며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4.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클뤼니 수도원 이후에는 영국에서 고르쯔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계속되는데, 이 때의 개혁운동의 중심지인 영국은 양모산업 등의 산업 기반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산업과 연계되어 있었지요.

4. 교회 개혁운동의 확대

11세기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레오 9세가 즉위하면서 교회의 개혁운동은 전 서구유럽에 영향을 미칩니다. 레오 9세는 교황입법이라는 것을 마련하면서 교회의 신성권이 황제와 봉건제후의 세속권에 대항할 근거를 마련합니다. 그는 유럽의 중심지를 일일이 순회하면서 개혁운동의 실천을 독려합니다.

1. 성직자의 혼인과 성직매매를 금지한다.
   2. 저명한 개혁적인 고위성직자를 로마교회에 추기경으로 임명한다.

이러한 레오 9세의 활약으로 유럽 사회에서 교황의 위치가 세속 군주의 위치와 최소한 동등함이 확인되었고, 그의 노력으로 이후 청신함을 바탕으로 유럽 교회 개혁에 앞장설 인물들을 교회에서 발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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