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8조의 법과 해석

1. 8조의 법

고조선의 8조법은 현재 한서지리지에 3개조만 남아있습니다. 3개조에 대한 해석내용은 이전 8조법 해석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이지만, 이 환단고기는 위작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8조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을 않을까라는 부분이지요.

사실, 고대 법들은 함무라비 법전 등을 포함하여 모두 살인, 절도, 간음, 주술, 독신 등의 인간의 기본적 범죄에 대하여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법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임은 상상력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 환단고기 8조의 내용은 고대 법인 함무라비 법전 등의 법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고대 사회의 공통적인 부분이 바로 여성의 음란함의 규제(가부장성), 신에 대한 모독(성역침해), 노동에 대한 신성함(근면과 공경) 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내용은 고대 일반법들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8조법이 남아있는 한서지리지의 원문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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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