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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의 초기 발전 : 5나의 형성

1. 초기 고구려의 5나...

고구려는 압록강 중부에서 거주하던 맥족을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등장 시기는 위만조선이 철기를 가지고 고조선의 실권을 장악할 무렵부터 소집단의 씨족공동체적 유제를 간직한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선진 사회인 중국, 고조선으로부터 철기를 도입한 듯 싶은데, 이 철기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점차 정치집단이 확대되는 듯 보입니다.

고구려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동북아시아에 공백기가 찾아오면서 발전합니다. 고구려 집단이 발전하게 된 시기는 대락 기원후부터 2세기 말 경인데, 그 특징은 동북아시아의 공백기를 대체하려던 <한군현>세력을 몰아내면서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고구려 집단이 등장하게 된 것은 <현토군>을 축출하면서부터입니다. 압록강 졸본 지역에서 씨족공동체적 생활을 하던 초기 고구려 집단은 현토군의 축출과정 속에서 상호 연대함녀서 <연맹체>를 구성하여 연맹국가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 때 연맹체의 주도권을 가진 씨족집단은 소루부였는데, 이 소루부는 연맹체의 주도권만을 행사했을 뿐 다른 씨족집단의 내부적인 공동체적 생활에는 관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연맹체를 구성하여 집단적인 초기 <소국>을 형성하였으면서도 연맹체 각국의 내부에서는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구조였죠. 따라서, 각 씨족집단은 자신들만의 씨족적 관습으로 사회를 이끌어 갔고, 공통관심인 외부의 침입 등에 대해서만 공동 행동을 하였습니다.

2. 5나의 주도권이 바뀌다

초기의 씨족 공동체 집단은 환나, 계루, 소루, 절노, 관노 등의 <나>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전술한 대로 <씨족적 풍습>을 가진 독립적 집단이었지요. 하지만, 부여에서 내려온 것으로 사료에 나오는 <주몽집단>이 내려오면서 주도권은 <계루부>로 넘어간 듯 보입니다. 여러 사료들이 내용이 달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기 주도권을 가진 소노부(소루)집단은 송양의 비류국쪽으로 보기도 합니다.

외부세력인 부여집단과 연합한 계루부가 5나의 정권을 쉽게 장악한 것은 당시 더 큰 문제인 <한군현의 축출>이라는 과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군현은 고조선 멸망 이후 동북아시아 집단들에게 공통의 적이었고, 이들을 축출하면서 각 집단이 강화되었습니다.

3. 5나가 5부가 되면서 국가의 기틀을 잡다.

초기부터 고구려는 존재했지만, 고구려를 씨족집단에서 국가적 집단으로 바꾼 것은 계루부 정권의 <주몽 : 동명성왕> 때부터입니다. 동명성왕을 고구려에서는 시조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문제점은 이 동명성왕의 고구려는 단지 5부족이 연합한 <연맹왕국>이었지, 강력한 힘을 가진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구려에서 실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5부족을 통합하여 <구려>라는 큰 집단(고-구려는 큰-마을 이라는 어원이 있다고도 합니다만, 언어학자들의 추측일 뿐 증거가 있지는 않습니다.)을 형성한 것은 유리왕 ~ 태조왕 대입니다.

4. 5부 사회가 강력한 중앙집권사회로 바뀌다

5부사회가 강력한 중앙집권 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태조왕>때 부터입니다. 태조왕은 계루부 중 <고씨집단>만이 왕권을 잡을 수 있게 하여 타세력의 강력한 힘을 견제하고, 옥저, 동예를 정벌하면서 함흥평야를 확보하였습니다. 또 본격적으로 요동으로도 진출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사료상 140년 이상을 재위했다고 알려진 이 태조왕 때부터로 보입니다. 실제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건국은 왕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태조왕>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태조왕의 재위기간이 140년이 넘는 관계로, 이 시기의 중앙집권은 사실 여러왕대를 거처가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후 <고국천왕>기는 고구려 사회의 초기 5부족을 완전히 해체하는 단계입니다. 일단 씨족혈연마을로 구성되었던 5부족을 행정단위인 5부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5부 중에서 계루부 왕의 <직계후손>만이 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쉬운 말로 부자상속이라고 하죠. 그리고, 씨족사회의 유습이었던 형사취수제를 소멸합니다.

형사취수제의 소멸은 곧 씨족사회의 구습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것은 씨족 사회의 재산권을 물려받는다는 의미와 함께, 같은 혈연부족이라는 직조관념의 표출이었고, 씨족간의 연대책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한 고구려의 사회 변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고구려가 얻은 것은 <사회분화를 통한 친족공동체 사회의 해체>였습니다.

즉, 부자상속을 통하여 친족개념이 약화되었고, 형사취수제를 폐지함으로서 씨족 연대개념을 없애 버렸으며, 5부족을 5부로 개편함으로서 씨족사회를 국가관료사회로 전환하려 한것입니다. 그 결과 친족공동체 사회는 상당히 분해되어 버렸고, 이제 <단혼가족>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사회로 진전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서 충, 효라는 초기 유교윤리적 가치관이 등장하기도 하며, 소수림왕의 <불교>수용으로 종교를 통한 왕권강화도 시도하게 됩니다.

6. 관련 사료 해석

- 운영자가 임의로 사료를 해석하기 때문에 일부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부자상속과 형사취수제의 소멸 부분

산상왕은 휘가 연휘이다.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서 말하기를, 주몽의 손자가 궁이었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능히 눈을 열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 사람이 곧 태조왕이다. 지금 왕(고국천왕) 역시 태조의 증손인데, 역시 신인으로 태어났으니, 증조인 궁과 같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은 위라고 하므로, 위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자손이 없었고, 따라서 연휘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연휘가 왕이 되기 전에) 초기에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인 우씨가 몰래 왕의 상을 발하지 않고, 밤에 왕의 동생인 발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식이 마땅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되는데 왕이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지를 모르고 말하기를 대꾸하였다. 천지에는 순리가 있는데, 돌아가야 할 것이 있다. 형수는 밤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찌하여 예라 할 것인가?

부자상속과 형사취수제의 관련 사료는 고구려가 점점 씨족제의 유제를 벗어던지고, 중앙집권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리가 말한 초보적인 고구려 유학 부분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사왕 때 국상이였다. 그 때는 모용외가 변방의 화근이었다.

왕이 군신들에게 물었다. <모용씨가 병사가 강병하니, 계속하여 나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자,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대형 고조자는  현명하고 용맹합니다. 대왕이 만약 변방을 억제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시려면 고노자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왕은 이에 신성태수로서 임명하니 모용외가 다시는 오지 못하였다.

9년 가을 8월, 왕이 국내 정남 15세 이상을 모집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은 먹는 것이 궁핍해지고, 역이 고대었다. 이로 인하여 유망하는 자가 많아졌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인이 아니요, 신하된 자로서 간언하지 않으면 충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승상이 되어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지 않고, 어찌 감히 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들을 위해 죽고자 하는 모양이구나. 다시는 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의견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는 물러나와 여러 군신들과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다. 왕은 이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창조리의 글은 고구려 사회가 초기 씨족제를 벗어 버린 여러 가지를 보여줍니다.

1. 고구려 초기에는 모용씨 등 북방세력에게 고구려가 대적하기 힘들었다.
   2. 북부대형 고노자 등의 행정과 관등이 있었다. (북부 : 행정관직, 방위개념 / 대형 : 관등, 형계열의 형제적 관등)
   3. 국가적 차원의 부세제도와 징발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
   4. 왕에게 간언해야 충신이다 - 초보적인 유교사상이 엿보입니다.(국가운영이념이 선민사상을 탈피함)
   5. 군신과 회의하여 왕을 폐하려 하다 - 초기 고구려의 회의체가 힘이 왕권을 능가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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