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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세 사회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논쟁

candy_red.gif 중세사회의 시대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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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중세는 언제부터일까요?
   교과서에서는 고려시대 초기부터 중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신라의 골품제 사회의 원리(고대 노예제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고대사회는 7세대가 하나의 친족단위였는데, 고려초부터는 5세대가 하나의 가족단위로 바뀌었고, 부족중심의 골품제가 사라져서 관료제 사회로 변하였다는 것이죠.
   그 증거는 고려 성종 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내용 때문입니다. 시무 28조에서 최승로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통한 체제 정비를 주장하였고, 이것은 곧 중세적 사회편성원리를 반영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조선시대부터 중세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수취하였는가에 따른 시대구분입니다. 즉 고려까지는 세금수취 방식이 <사람>이 기준인 인신적 개별지대였습니다. 세금의 기준을 사람에게 매긴 것이죠. 그러나 생산력이 점차 발전하면서 조선시대에 오면 세종대왕 때 공법이 크게 개선됩니다. 연분 9등, 전분 6등법 등이 생기면서 <토지 8결당 1명의 장정을 충당한다>라는 말이 명시화됩니다.
   결국 고려말 이후 연작상경과 장시가 발달하고, 중국의 강남농법이 들어오게 된 결과라는 입장이죠.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세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통일신라 시대의 사회변화가 크다는 점이지요. 삼국시대에는 토지를 소유한 자와 직접 생산하는 자의 관계가 인신적 예속관계였습니다. 즉, 땅 주인이 경작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서양의 노예제 사회와 흡사합니다. 죽으라고 일하고 주는 것은 없고.... 또 삼국시대 지증왕 이전까지 행해지던 순장은 인신적 예속의 결정적 증거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대에는 이것이 바뀝니다. 지주전호제(지주제)와 전주전객제(수조권제)가 정착되고 순장이 소멸하면서 토지이용에 관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토지 주인은 경작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이제 토지소유자와 직접생산자는 형식적으로나마 경제적 관계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마치 장원에서 농사를 짓는 서양 중세의<농노>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통일신라부터 중세라는 학설이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