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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계곡선생집 서 - 이명한 -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을 남기게 마련이지만 말을 남겼다고 해서 그가 꼭 덕이 있는 자라고는 할 수가 없으니, 이는 말이란 덕에 비해 한 자리 아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은 곧 글이니 일단 글을 갖춘 데다가 덕까지 구비하고 있다면 정사(政事)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성문(聖門)의 4과(四科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도 여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최상의 것은 덕을 세우는 것[立德]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立功]이요 그 다음은 말을 세우는 것[立言]이다.’고 하였는데, 공이란 정사(政事)를 미루어 한 말이니, 그렇다면 말하는 방법이 틀리긴 해도 그 뜻은 4과와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최상의 것이야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을 세우고 공을 세우는 두 가지 일을 제대로 겸하지 못해 온 지도 오래되었다. 사해(四海)와 구주(九州)를 갖춘 중국 대륙에서 한(漢), 당(唐), 송(宋) 등 천 백여 년을 거쳐 오면서도 오히려 그런 인물을 많이 배출하지 못했는데, 말세에 변두리 조선 땅에서 태어난 한 인물이 유독 위로 솟구쳐 올라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겸비하기 어려웠던 것을 겸하여 갖춘다는 것이 어찌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고(故) 상국(相國) 계곡 장공(張公)은 7, 8세 무렵부터 벌써 훌륭하다는 이름이 났었는데, 내가 공보다 8세 아래로 공과 거의 40년 동안 함께 일을 해 왔지만 어느 일 한 가지도 의범(儀範)에서 벗어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평온하였으며 지혜는 원만하고 행동은 방정(方正)하였으며 그야말로 겸허하기 짝이 없는 유덕군자(有德君子)였는데, 최상의 가치라 할 덕(德)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공이 혹시 사양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한 시대를 통틀어 거기에 가까이 간 자를 찾는다면 공을 놔두고 누구를 꼽겠는가.

공의 글은 육경(六經)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처음에 염락관민(濂洛關? 주돈이(周敦?), 정호(程顥), 정이(程?),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 송(宋) 나라 성리학자들)의 유서(遺書)에 침잠하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선진(先秦), 양한(兩漢)의 작품들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들에 힘을 크게 쏟아 그 분위기에 젖고 충분히 음미하였으며 기타 도가(道家), 불가(佛家), 의복(醫卜), 감여(堪輿 풍수지리(風水地理)), 성력(星曆) 및 패승(稗乘), 잉사(剩史)에 대해서도 모두 두루 통하였다. 그리하여 많이 축적된 것을 기초로 다방면으로 발현시켰는데 순일하고 심후한 경지가 휘황찬란하게 펼쳐졌으니 그야말로 경세(經世)의 글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운문(韻文)에 대해서는 처음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유독 《이소경(離騷經)》과 《문선(文選)》의 두 시체(詩體)만을 좋아했는데 이윽고 대력(大曆)과 장경(長慶)의 시들을 접하고 난 뒤로는 정체(正體)와 변체(變體) 그리고 우아하고 해학적인 내용의 것들을 막론하고 크게 할 것은 크게 하고 작게 할 것은 작게 하는 등 모두가 마음먹은 대로 쏟아져 나오게끔 되었다. 이를 비유하자면 마치 우(禹) 임금이 용문(龍門)을 뚫자 온갖 강의 물줄기가 바다로 들어간 것과 같다고나 할 것인데 바다가 한없이 넓은 것처럼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만 하였다.

선부군(先府君)께서 일찍이 근대의 인물들을 논하실 때면 첫째 가는 자리를 꼭 공에게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통(通)했다는 것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 통(通)이라는 한 글자는 오직 지국(持國)에게만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지국은 바로 공의 자(字)이다. 아, 이 어찌 문장에만 국한해서 말한 것이겠는가.

공은 일찍이 행실을 닦아 이름을 떨쳤으니 세상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할 인물로 인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중년에 곤경을 만나서는 한마디도 시사(時事)를 언급한 적이 없다가, 계해년(1623 인조 1) 중흥할 때를 당하여서는 공이 세운 훈업(勳業)이 우주에 가득하였고 홍문관 대제학과 이조 판서를 역임하며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명망을 한 몸에 모았었다. 그런데도 공은 그만 문을 닫아 건 채 세상일을 사양하고 그저 독서로 혼자 즐기면서 담박하고 간소하게 지내기를 하나의 학구(學究 학문에 빠져 세상일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는 등 공을 세우고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으니 공의 평생이 어떠하였는지를 더욱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4과(科)와 3립(立) 중에서 어떤 것이 공에게 있고 어떤 것이 공에게 없다고 할 것인가. 그 모두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데, 이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많겠는가. 그런데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하늘이 빨리도 데려가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다.

공이 상제(喪制)를 지키고 있을 때 나도 집안의 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산(山)을 구하러 공을 여막(廬幕)으로 찾아갔더니, 공이 손을 잡고 피눈물을 닦으면서 ‘인간 세상에서 그대와 다시 만나게 될 줄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면서 병자년촵정축년의 일에 말이 미치자 가슴을 두드리며 오열하였는데, 그때의 낭랑하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나 자신은 ‘공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 혼자뿐일 것이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공을 모르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마침내 이렇게 써서 계곡집의 서문으로 하는 바이다.

연안(延安) 이명한(李明漢)은 짓다.

 

- 계곡선생집 서, 이명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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