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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원종과 애노의 반란 -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농민 반란

 

원종과 애노의 난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기록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농민 반란.... 민중이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다."
                                                                                                                                               

   통일신라 말기에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앙에서는 전골왕족의 왕위계승법칙이 붕괴되어 실력위주의 왕위 계승이 시도되었습니다. 거기에 폐쇄적 골품제와 고대적 수취제도의 모순으로 진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불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골품제 자체의 모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귀족들은 단지 골품제도의 운영상의 문제로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실제 신라말은 농업생산력이 발전한 시대였습니다. 북방의 간척사업, 예성강 유역 개발, 중국 선승들의 선진농법 수용 등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골품제는 이것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수탈하려고만 하였습니다. 즉, 사적으로 토지를 늘리고,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개인의 토지를 매입하거나 개간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사원전의 면세와 면역혜택을 이용하여 강제 매입을 시도하였습니다. <효녀 지은전>이라는 설화를 보면 가난한 효녀가 예속된 신분 속에서도 끝까지 벌이를 하기 위해 살아가는 비참한 삶이 보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가 가진 한계점이었습니다.

   한편 지방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약탈을 자행하는 '초적'이 되어 저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라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이미 수습할 능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성여왕 3년 889년 재정이 궁핍해져 지방에 대해 조세를 독촉하자 전국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도적'은 신라 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저항세력을 말합니다. 이때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드디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죠. 이에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도록 시켰는데, 영기는 겁을 먹고 원종과 애노의 진영에 접근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촌주 우련이 열심히 싸우다 죽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에 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10여 세 된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의 지위를 잇게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촌주의 역할의 지방의 부세행정, 군대모집, 전쟁참여에 관련된 광범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앙에서 한 일은 없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촌주역시 중앙에 반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세력이였다는 점입니다.

   원종과 애노의 세력은 단순히 '초적'이나 '도적'이라 표현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표현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에서 보낸 군대와 대결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조직력과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뒤 그들의 세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곧 북원(원주)에서 양길이 궁예를 거느리고 강대한 세력을 떨친 것으로 보아 그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최초의 농민봉기인 원종과 애노의 난을 이전의 농민 저항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일단 신라말 농민들의 저항은 유망의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사료에 <흉년과 기근으로 당나라 절동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백성들이 기근 때문에 자손을 팔아 자활했다>라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초기의 농민들은 저항보다는 자활의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2번째 단계는 산발적, 우발적인 초적의 단계입니다. 사료에 <기근과 흉년이 계속되자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왕은 이를 안무하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직적이지 못한 초기의 반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번째 단계는 바로 원종과 애노의 반란단계로 드디어 민중반란이라는 것이 한국사에 기록되는 단계입니다. 사료에 <진성여왕 3년 국내주군에 세금이 오지 않아 창고가 비었다. 왕이 다시 세금을 내라 독촉하자 원종, 애노 등의 반란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라고 나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반란세력이 호족화되어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면서 독자적 세력을 갖는 단계입니다. 사료에는 <최치원의 시무 10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때, 그 해 겨울 궁예가 북원에 들어가 스스로 장권이라고 칭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단계부터는 농민항쟁이 좀더 조직화 되었지만, 그 주체가 농민보다는 호족으로 이전되는 상황이 보입니다. 후삼국도 이들 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보여지구요. 중요한 것은 이들의 반란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최초의 민중반란으로서 의의가 크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