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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에는 기황후가 나온다?

원문 출처 : http://cafe.naver.com/noblood.cafe

이 글은 운영자가 작성한 글이 아니라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카페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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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원의 공녀제도를 공부하신 분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죠.

기황후..

원에서 그 뛰어난 미모때문에 혜종의 황후로 꼽힌 인물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혜종이 막무가내로 그녀를 황후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군요.

실제로 혜종은 자신의 장인을 죽여버리고 기존의 황후를 폐위한뒤 고려의 미소녀를 새로운 황후로 들여앉힙니다.

처음에는 성군이었던 혜종이지만 결국 기황후에게 빠져 나라의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혜종의 통치시기에 홍건적(명교)의 난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되죠.

홍건적의 홍은 '붉을 홍' 으로서 명교의 상징이었던 '불'을 뜻하는 붉은 두건을 매고있었기에 홍건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의천의 많은 팬분들께서 명교를 상당히 호감있게 바라보시고 계시지만, 그렇게 좋은 놈들은 아니랍니다.

우리 고려에 침공해서 사람을 그토록 많이 죽인게 바로 명교이자 홍건적이었으니까요.

결국 혜종은 주원장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카라코룸으로 도망가며 그곳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다만 혜종이 '괜찮은 군주였다'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한가지를 꼽아보자면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백성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북경을 주원장에게 그냥 내주었다는 점이죠.

그래서 나중에 혜종은 '순제'로 추종된답니다.

그리고 혜종과 기황후에서 난 두명의 자식, 모두 몽고황제에 오릅니다.

역사적으로 아유르드라칸, 티무르 칸으로 불리우는데요.

고려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 두명의 몽고황제는 굉장히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비록 영토는 뺐겼지만 항상 선정을 베풀어 화북이북의 백성들은 그들 둘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하네요.

그 서달이라는 장수 기억나시죠? 주원장의 부하였던..

주원장은 몽고를 완전히 축출하기위해 서달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서 몽고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아유르드라칸은 쿠쿠티무르(조민의 오빠, 왕보보라고 하던가요^^)를 부하로 삼아 군대를 전두지휘하여 서달의 군대를 모두 궤멸시킵니다.

몽고제국의 재건을 위해 그토록 힘썼던 아유르드라칸이었지만 결국 황제를 8년밖에 못하고 사망합니다.

이때 쿠쿠티무르도 사망해 몽고의 인물들은 대부분 사라지죠.

그리고 몽고의 마지막황제 티무르칸..

실로 뛰어난 무사였다고 전해집니다. 전투에는 항상 앞장섰거니와 실제로 몽고에 남은 몇안되는 전투의 귀재였다고 하죠.

티무르칸은 황제의 제위에 오르자마자 명을 공격해서 몽고의 옛영토를 대부분 회복합니다.

(이때부터 명에는 북로남왜라는 말이 생기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놈)

북경의 탈환을 앞둔 시점, 하필이면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병력을 대부분 잃고 다시 유랑의 길에 오릅니다.

간신히 피신한 그는 어머니의 나라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죠.

그러나 고려는 친명파와 친원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등장으로 원군을 파견하지 않습니다.

결국 원군없이 싸운 티무르칸은 명나라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병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계속된 명의 원군을 피해서 도망치다가 부하에게 살해되고 몽고제국은 멸망합니다.

무협지도 무협지지만, 김용소설은 참 역사적인 부분이 많아서 더욱 재미있는것 같습니다.

그 홍건적이 고려를 끊임없이 침범했던 이유는 바로 몽고의 마지막황제 두명이 고려인의 핏줄을 이어받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실제로 주원장이 그토록 조선을 의심했던 이유도 거기에서 기인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기황후에 대해 몇가지 사견을 덧붙이자면..

공녀제도를 폐지시킨건 바로 기황후입니다. 자신이 공녀출신이었기에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지 알고있었다네요.

그리고 원이 고려의 군사력을 마음대로 이용하기위해 고려라는 나라 자체를 없애고, 원의 한 주로 만들어 버리고자 결심할때, 그걸 막고 고려왕조를 유지시킨것도 기황후랍니다.

비록 기황후의 남동생인 기철때문에 욕을 먹고 있지만, 기황후의 행동에서 본받을 만한점은 반드시 찾아야겠죠?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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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2014.02.25 2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10.09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할 매국노에 대한 역사왜곡 당장 지우세요!
    근거:
    하지만 그녀의 득세는 고려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가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 바 있고, 그녀가 득세하면서 고려에 남아있던 그녀의 가족들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온갖 패악을 부린 것. 결국 공민왕은 참다 못해 기철과 그 일가를 암살하기에 이르고, 고려 본토에서 일족이 전멸한 데 분노한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2]를 앞세워서 원나라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4/2014030404668.html를 보면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92016531&code=960801를 보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http://www.encykorea.com/enc/ency_012375.html에는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튼 속지 말자.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여자가 한류의 원조네 뭐네 하는 것도 참 웃긴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