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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한국사에서 중세는 언제 부터인가에 대한 논쟁 사료 분석

한국사에서 중세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사료들

1. 통일신라가 중세이다!

1. 신라초기

      읍락에는 호민이 산다. 하호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노복이다.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에 산다.

      대가는 모두 일을 하지 않는다. 하호는 노복으로서 부세를 공급해야 한다.

      순장으로 죽이는 자가 수백에 이른다.

2. 지증왕 : 명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전대의 왕이 죽자 남녀 오십인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 금지하였다. 주군을 나눠 농사를 권장하였고, 우경이 시작되었다.

3. 신문왕 :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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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세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들입니다.

이 사료들의 근거는 삼국시대의 고대적인 요소가 통일신라시대에 봉건적인 요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가 중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토지를 직접 가지고 있는 토지의 소유자들과 토지에서 농사를 직접 짓는 실제 농업종사자들간의 관계가 노예적인 요소에서 봉건적인 요소로 바뀌었음을 강조합니다.

자료 1을 볼까요?

신라초기에는 토지를 가진 귀족들이 농업에 실제 종사하는 생산자인 하호들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이것을 <인신적 예속>이라고 합시다. 이 인신적 예속의 대표적인 예가 다수를 죽이는 <순장>이라는 풍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소유자(귀족)들의 특권이 신라가 통일될 무렵 전환됩니다. 일단 지증왕기에는 순장을 금지하여,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노동력을 국가가 관리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체제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귀족 기반이 점차 국왕권으로 넘어감을 의미합니다. 진흥왕기에는 귀족들의 기반보다 왕권이 강화되어 <단독하교>가 등장하고, 국왕에 의한 <정치질서가 획립>되며, 화랑도, 불교교단 정비 등을 통한 <종교, 사회, 문화적 질서의 일원화>를 추구합니다.

이것은 통일이후 신문왕기에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더욱 강화됩니다. 신문왕기에 관료전을 지급함으로서 이제 토지제도는 어느 정도 국가 관리에 의한 기반이 마련됩니다. 즉, 봉건제도에서 말하는 지주전호제적인 요소가 강화되거나, 국가가 수조권을 줌으로서 토지를 규제하는 전주전객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주전호제(사전)난 전주전객제(공전)에서의 직접생산자는 노예가 아닌 경작인입니다. 그들은 인신적 지배보다는 경제적 지배를 받는 경향이 강해진 일정 수준의 자유민입니다.

즉, 통일신라기에 인신적 예속을 벗어난 것을 중세로 보는 입장이 통일신라 중세설입니다.

2. 고려초기가 중세이다!

1. 재상가에는 녹이 끊이지 않으며, 노예가 3천이고 이에 상당하는 수의 갑병(군인)과 소, 말, 돼지가 있었다.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길러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꾸어서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

2. 죽만랑(죽지랑)의 낭도에 득오실이라는 급간(후에 급간이 되었다는 말, 당시 급간이 아닌 듯함)이 있었는데, 풍류황권(화랑도 명단을 적은책)에 이름을 올려두고 날마다 출근하더니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죽지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어미가 말하였다. <당전(군대책임자)인 모량부의 익선 아간(아찬)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고지기로 뽑아서 데려갔습니다. 급히 가느라고 낭에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낭은 <네 아들이 사사로운 일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다.>라고 말하였다. 낭은 떡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측근을 거느린 채 가니 낭도 137명이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거 물었다. <득오실은 어디 있는가?> 문지기가 답하길,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니, 익선은 끝내 안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세금수취인 간진이 추화군(밀양)의 능절조 30석을 거두어부산성으로 싣고 가다가 낭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릅답게 보았다. 익선이 융통성이 없는 것을 더럽게 여겨, 가지고 있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낭의 요청을 거들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간진 절사지(세금수취인)가 말안장을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화랑일을 보는 관리)가 이 말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더럽고 추함을 씻어주려 하자 익선이 도망하여 숨으니 그 아들을 잡아갔다.

- 삼국유사 2권 죽지랑조 -

3. 성주산파(선종 9산의 하나)를 처음 연 낭혜(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그 8대조가 된다. 조부 주천(周川)은 품(品)이 진골이고 위(位)가 한찬(韓粲)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을 지냈음은 집마다 아는 바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이다. 족(族)은 진골에서 한 등급이 떨어지니 이른바 득난(得難)이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첫째가 성이진골(聖而眞骨)이고 둘째가 득난(得難)이다.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니, 《문부(文賦)》에도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惑求易而得難]"고 한 대목이 있다. 6두품부터는 숫자가 큰 신분일수록 귀한데, 이는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 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 최승로의 시무 28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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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들은 모두 고려초기부터가 중세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료들입니다.

사료 1을 보면, 노동 3천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일반인을 집단적으로 인신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은 노예인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세, 역, 공납을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인신적 지배를 당하는 고대 사회의 전형적인 피지배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료 2에서 보면 득오라는 계급도 부족의 노동력 징발에 참여하였으며, 그 당시에도 국가가 사사로이 인신적인 지배를 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료 3을 보면, 통일신라의 골품제도가 모순을 보이며 친족공동체의 규모가 줄어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대적 특징인 골품제도는 7세대 공동체로서 골품제도에 입각하여 부족적인 전통이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사회로 가면서 이 골품제적인 7세대 친족공동체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규모가 2배 이상 줄어듬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 공신인 김유신 계열마저도 진골내부에서 족적 강등을 당하면서 <득난>이라는 새로운 관료계급으로 전환되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혈연적인 계급 공동체 사회의 운영원리가 무너지면서, 관료제적인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으로 보여집니다.

사료 4를 보면 이제 확실히 <골품적 원리>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승로는 관료주의에 입각하여 고려의 국가통치이념을 유교사상으로 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이것을 성종이 수용하였습니다. 즉, 고려 초기부터는 <골품제적인 친족공동체>사회가 아니라, <관료제적인 유교적 정치이념>의 사회로 전환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친족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국가 이데올로기상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배체제가 완전히 변화하고 사회편성원리와 정치이념이 변화한 고려 초기를 중세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다수설이며, 7차 교과서에서 제시한 정설입니다.

3. 조선시대부터가 중세이다!

1. 인두세는 포 5정이며, 곡 오석이다. 유민은 3년에 1세를 내야 한다. 세는 상호는 1석, 중호은 7두, 하호는 5두이다. - 고려 -

2. 역은 무릇 토지 8결당 1명에 부여한다. 일년동안 역은 6일을 넘기지 않는다. 만약 그 길이 멀아 6일 이상 걸리면, 그것에 준하여 다음해의 역을 감해주어야 한다. - 조선 세종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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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조선시대부터가 중세시대라는 증거 사료입니다. 이 조선시대 중세설은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일종의 구시대 사학의 유물같은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국가가 잉여생산물로서 걷는 조세를 어떤 기준으로 걷는 가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려는 관점입니다. 즉, 고려시대까지는 인두세, 호등세로 세금을 걷었습니다. 즉, 개인마다, 호마다 세금을 걷었다는 것은 개인을 국가가 인신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고려시기까지가 고대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조선 초기에 급격하여 농법이 발전하면서 고대적인 토지수취제도는 토지에 기준을 두어 세금을 걷는 중세적인 수취방식으로 바뀝니다. 즉, 토지 8결당 세금을 걷는 다는 것에서 보듯이 조선은 <토지를 바탕으로 한 봉건적 지대 수취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 이후부터가 중세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이미 녹읍, 관료전, 전시과로 이어지는 중세적 수조권 제도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이후 활동했던 사학자들 이외에는 거의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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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고려시대 중세설(교과서설)의 입장에서 통일신라 중세설(새로운 학설)로 분위기가 이동하고 있는 듯 합니다. 7차 교과서에서는 고려시대 중세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8, 9차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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