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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키워드>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기의 정치사를 정리해 봅시다.

1. 전제왕권의 성립 배경

지난 장에서 전제왕권을 정의내릴 때, 국왕의 1인 독재권이 아닌 <국왕권의 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실행>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성립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통일에서 그 핵심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기 신라는 <긴장된 군부 체제>가 계속되었습니다. 고구려, 백제와의 통일 전쟁, 중국 당나라와의 통일전쟁은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군사적 이념이 앞서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 무열왕 김춘추의 집권은 선덕여왕기 국가의 군사적 위기, 중국과의 통일 외교 등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문무왕기의 왕권 강화도 삼국통일의 위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구요.

특히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완성을 위해 중국 당과의 혈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중국과의 전쟁은 백제,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지원함으로서 백제, 고구려의 구 귀족들이 반신라적 감정을 갖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이들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을 6, 5 두품 등으로 임명하고 신라 귀족으로 인정함으로서 기존 신라 귀족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또 당과의 전쟁 속에서 친당 귀족 세력을 제거함으로서 왕권에 저항할 수 있는 귀족 세력은 점차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실제 무열왕기 비담, 알천의 난 이래 상대등 세력이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 이들이 통일전쟁기 국가통일의 명분 속에서 점차 제거당하면서 왕권은 극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후 신문왕은 기존 귀족세력을 철저히 억제하면서, 반대로 고구려, 백제 계열의 6두품, 5두품을 등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라의 6두품 출신들을 중용하기도 합니다. 강수, 설총, 이지성, 이순 등은 이 당시 신문왕을 보좌했던 전문관료로서 학문적 식련을 가진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신문왕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돕기 위해 마련된 기구가 바로 전문 교육 기관인 <국학>입니다.

2. 중앙집권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귀족권을 탄압해야 했다.

신문왕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관료제 완성, 지방에서는 국가기구에 의한 지방통치가 절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문왕기에는 중앙에서는 <귀족권의 억압과 행정적 관료기구 정비>, 지방에서는 <지방행정구역정비, 군사제도 정비>가 필요했습니다. 또 이러한 관료제를 지원하기 위한 <토지제도의 정비>가 필요했고,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적 이념으로 <유교사상>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등장한 제도가 바로 중앙의 <6전체제 완성>, 지방의 <9주 5소경 완성>, 경제적으로 <관료전 시행>,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의 실현과 국학 설치) 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존 기독권 세력인 <진골 귀족>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새로운 관료군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상대등 세력인 구 귀족을 탄압하고, 중시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행정관료체제>가 강화된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죠.

신문왕의 행정관료제 변화의 가장 큰 키워드는 <김흠돌의 난>입니다. 김흠돌의 난은 무열왕기 비담, 알천의 난과 같이 상대등과 구 귀족 세력을 제거하는 난이었지만, 그 규모와 목적이 무열왕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김흠돌의 난에 대한 기록을 한 번 볼까요?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 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약정한 후 반역을 행하려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의 도움을 입고 아래로는 종묘의 영조를 받아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찬 홈돌 등의 꾀가 발로되니, 이는 곧 인신이 공기한 것이요, 천지에 용납치 못하게 된 것이다. 정의를 범하고 미풍을 상함이 이에서 더 심한 것이 없다. 이러므로 병중을 모아 그 무도한 자들을 없애려 하매, 혹은 산곡으로 도망가고 혹은 궁궐에 와서 투항하였다. 그러나 그 여당을 탐색하여 모두 주살하고 3, 4일 동안에 죄수가 탕진함은 마지못해 한 일이었고, 이로 인하여 사인(士人)을 경동케 하였으니, 근심스런 마음은 어찌 조석으로 잊을 수 있으랴. 지금은 이미 그 요사스러운 무리가 깨끗히 제거되어 원근에 우환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는 속히 돌아가게 하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1년>

이 사료에 나오는 흠들이 김홈돌입니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으로서 가장 유력한 귀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문왕은 김흠들의 난을 이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걸림돌이 되는 기존 귀족들을 주살합니다. 특히, 당시 왕권에 위협적이었던 상대등 세력마저 제거하기 위해 신문왕은 상대등 김군관 부자마저 주살합니다. 김군관 부자의 죄는 김흠돌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보고만 있었는가라는 불고지죄라는 것이었죠. 상대등을 애매한 죄로 제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신문왕이 얼마나 구세력 제거와 중앙집권화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김흠돌의 난을 통해 김씨왕족은 왕권을 제약하는 상대등계 귀족 세력에서 왕권에 철저히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왕권 옹호세력으로 탈바꿈됩니다. 그리고, 신라 원래 귀족이었던 박씨, 가야계 김씨, 고구려계 유민 귀족들은 설자리마저 잃고 맙니다. 대신 왕의 조언자로서 학문적 식견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6두품 세력들이 행정관료군으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화왕계를 쓴 설총같은 사람이지요.

3. 새로운 관료군을 위한 국학을 마련하다.

국학은 골품귀족들을 누른 신문왕이 새로운 관료제 사회를 위해 마련한 신라 최고 학부입니다. 신라시대가 골품제적 신분사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왕의 관료제 지향의 이상은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신문왕은 국학이라는 대학을 통하여 중국 당나라와 같은 관료정치를 시행할 관료군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신라에서의 국학은 골품제적 신분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기에 사회적 기반이 너무 약했습니다. 국학이 존속한 것은 오로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일시적으로 왕권이 귀족권을 눌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국학의 문제점은 이 국학 제도가 관리 임용과 관련된 <과거제> 등의 임용체계와 연계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물론 6두품 출신들이 신문왕기에 많이 중용되지만, 관리 중용에 있어 국학은 참고사항일 뿐 이였습니다. 국학출신이라는 것이 어떤 사회적 신분 보장을 해주지는 못하였지요. 사회적 신분 보장은 골품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니까요. 실제 학교제도와 관리임용제도가 연계된 것은 고려 시대 광종이후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부터입니다. 물론 원성왕대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국학생들을 평가하고, 관료 임용에 참조하긴 하였지만, 이것도 골품적 한계 때문에 국가적으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국학은 예부에 속한다.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대학감으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경은 1인인데 경덕왕이 사업으로 고쳤더니,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일컬었다. 관등은 다른 부서의 경과 같다. 박사, 조교가 있고, 대사는 2인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이 주부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일컬었다 관등은 사지에서 내마까지로 하였다. 사는 2인, 혜공왕 원년에 2인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J,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 [주역J, [논어], [효경]을 가르치고, 혹은 [춘주좌전J, [모시], [논어], [효경]을, 혹은 [상서], [논어],.[효경], [문선]으로써 교수한다. 여러 학생의 독서에는 삼픔출신의 법이 있으니, [춘추좌씨전]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을 잘 통하고 [논어], [효경]에도 밝은 자를 상으로 하고,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으로 하고,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로 하되, 만일 [오경], [삼서]와 제자백가의 서를 능히 겸통하는 자가 있으면 등급을 뛰어넘어서 등용한다. 혹은 산학박사나 조교 1인을 명하여 [철경], [삼개], [구장]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등위는 대사 이하로 위가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케 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질박노둔하여 향상치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도량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케 하며, 등위는 대내마나 내마에 이른 다음 내보낸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국학은 신문왕이 골품적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통일이후 친당세력을 도태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친당세력들 역시 당과의 연계를 통하여 신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방해가 되었으니까요.

그럼 국학에 의해 등용된 자들은 신라 시대를 주름잡았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문왕은 국학출신들을 중앙집권적 관료군으로 양성하려고 했고, 6두품 출신의 국학생들은 왕의 자문, 문한을 통해 성장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골품제적 한계에 의해 진골귀족과 동등해지지 못하는 지산들의 상황에 대하여 더욱 고민하고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후 신라 후기에 이들 6두품은 사회체제의 한계 때문에 국학보다는 대당유학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고, 이들이 숙위 학생으로 성장해 갑니다. 숙위 학생들은 국학생과 동등한 대우, 또는 그 이상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라말기 이들은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반신라적 성향을 가지기도 합니다.

9월에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자, 집사자 모초가 논박하였다. "자옥은 문적 출신이 아니므로 수령 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제의하였다. "비록 문적 출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찍이 당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던 사람이므로 역시 등용할 만하지 않겠는가?"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3. 직조관념을 표출하다.

직조관념이란, 왕권의 전제화를 위하여 조상에 대한 혈연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조관념은 신문왕기에 무열왕, 문무왕에 대한 제사를 화려하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러한 선왕에 대한 제사는 곧 현왕의 정통성과 국가 체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교와 함께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신문왕은 왕실의 권위 향상을 위하여 유교이념을 표방하였는데, 이것에 하나 더 하여 선왕에 대한 제사로 왕실을 통합하였습니다.

이후, 직조관념은 혜공왕대에 5묘제로 정착됩니다. 혜공왕은 점차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약해져감에 따라 직조관념을 대외에 과시하고, 왕실의 혈연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5묘>를 제사지냈습니다. 오묘의 5명의 왕은 <미추왕, 무열왕, 문무왕>의 3왕과 함께 현왕의 <아버지왕, 할아버지왕>을 포함한 5명의 왕을 제사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중국에서 천자국은 7묘를 제사지내고, 제후국은 5묘를 제사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당시 삼국통일 이후 중국과 다시 교류를 시작한 신라가 바로 5묘제를 함으로서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 36대 혜공왕대, 오묘를 시작하였다. 미추왕은 김씨 시조로서 제사하고, 태종대왕,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발한 공덕으로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이것을 영원히 없애지 않는 근본으로 삼는다. 또한 친부와 조부, 2조를 합하여 5묘로 한다.

여기까지 신문왕대의 정치적 상황을 포스팅해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신문왕대의 경제제도를 관료전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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