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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 중에서 토지제도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토지제도 역시 신문왕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쉬울 듯 싶네요. 지금까지의 포스팅에서 <전제왕권>의 정의를 권주 1인의 독재정치 확립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버리고,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로 이해했습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른 전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면서 읽어주세요.

1.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후 녹읍을 폐지하다

신문왕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다.

신문왕 9년 정월, 교를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차등있게 주었는데, 이것을 영구히 법으로 하다.

성덕왕 21년 8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다.

경덕왕 16년, 내외 관료들의 월봉을 중지하고, 녹읍을 부활하다.

위 사료는 신문왕을 중심으로 이후 신라 중기의 토지제도 변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신문왕은 관료전을 먼저 지급한 후, 녹읍을 폐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단계적으로 귀족이 가진 백성, 토지의 지배권을 중앙집권화 된 국가로 귀속시킴을 의미합니다.

신라시대의 녹읍은, 국가가 일정한 토지를 귀족에게 하사하고 그곳에서 수조권을 걷게 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녹읍제도는 관직에 따라 수여한 것이 아니라 골품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수조권적으로 녹읍을 운영하려고 하였어도, 실제 귀족들은 자의적으로 토지를 소유하였고, 결부단위가 아닌 지역단위로 토지를 임의 지배하였습니다. 또 녹읍에 속한 백성들을 임의로 지배하기도 하였지요. 저는 이것을 <녹읍의 식읍화>라고 말하곤 합니다.

즉, 녹읍이란 수조권적 요소를 가진 제도였지만, 실제로는 식읍과 같이 공신전이 되어 <백성들을 경제외적으로 지배해 버리는 고대적 토지제도>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신문왕이 관료전을 내린 것은, 집권층에 의해 부패해버린 녹읍을 <수조권적 제도>로 환원하는 조치였습니다. 따라서 녹읍을 폐지한 뒤 관료전을 준 것이 아니라, 관료전부터 내려 일정부분의 역력징발권을 국가가 확보한 뒤, 단계적으로 녹읍을 폐지한 것입니다.

2. 정전을 내리다.

이후, 성덕왕 때 백정들에게 정전을 내렸다는 것도, 관료전에 대한 후속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정전이란, 백성들이 소유한 민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전이라는 것도 실제 성덕왕이 백성에게 내린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의 소유지(민전)을 왕이 인정하여 조세를 걷으려고 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정전지급설은, 실제 <중앙집권화>된 통일신라가 당의 균전제를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설입니다. 즉, 중국식 토지제도를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영업전에 해당하는 토지를 준 뒤, 조세를 걷고, 사후에는 반납받는 다는 것입니다.

정전추인설은, 백성들이 원래 자신들의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땅을 국가가 인정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전추인설이 좀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원래 땅을 가졌다는 것이 합리적으로도 합당하고, 이 당시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관료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조세제도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토지에 대한 합리적인 조세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또, 정전을 만약 지급한 것이라면, 새로운 토지제도 실시를 위한 토지조사가 있어야 하고, 사회적 동요가 있었을 것인데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인구가 변동해도 토지소유의 변동이 적다는 점

2. 호별, 정남별 토지소유의 차이가 큰 데, 굳이 이렇게 불평등하게 토지배분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

이 두가지로서 추인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한국사에서 수조권 제도는 민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원칙적으로는 <왕토사상>에 기초해서 모든 토지는 국가가 소유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관료들에게는 <수조지>를 하사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느 나라이든 백성들의 토지(민전)이 존재하였고, 수조지는 이 자영농들의 토지인 <민전> 위에 설정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즉, 자영농들은 자신의 민전이 수조지로 설정되면, 국가에 낼 세금을 대신 관료에게 지급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민전일 때와는 달리, 수조지는 관료의 간섭이 어느 정도 있게 되므로 시대가 지날수록 문제점을 많이 양상합니다. 고려 이후의 수조권은 <수조지의 가산화>현상이 심해져 사화문제로 대두하지요.

3. 녹읍과 관료전은 둘다 수조권인가에 대한 논쟁

녹읍과 관료전의 성격에 대한 제도 성격은 아직도 논쟁이 심합니다. 특히 녹읍에 대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기존의 학설은 녹읍을 수조지가 아닌, 형식적으로 관등에 따라 지급한 사적 토지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학설에서는 녹읍을 수조권적 제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은 신라중기를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로 파악하기 때문에 녹읍을 수조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녹읍을 공신전으로 보는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 교과서적인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읍은 관리에게 관등에 따라 지급하였습니다. 이것은 녹읍이 수조권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과, 수조권이라고 보는 입장 모두의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녹읍은 국가가 허락한 일정 면적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촌단위 이상의 마을을 총괄하여 지배하는 지역단위의 지배를 허락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즉, 산과 강, 마을 등의 자연적 단위를 경계로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서 중국식 조세인 조, 용, 조를 모두 걷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녹읍에서는 식읍과 마찬가지로 지역지배와 함께 지역에 포함된 백성들의 경제적, 경제외적 지배가 모두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최근 녹읍에 대한 입장은 녹읍을 <수조권 제도>의 한 형태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 논의는 녹읍이 지역지배를 탈피한 것으로 국왕은 관등에 따라 차등있게 일정 <면적>을 관료에게 하사합니다. 관료는 지역지배를 할 수 없고, 자신이 받은 <면적토지>에서 수조권을 걷습니다. 전통적 입장에서는 녹읍으로 인한 <역역징발권>이 가능하다고 보나, 새로운 입장에서는 <수조권을 걷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입장에서도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녹읍이 수조권적 제도였지만, 아직 중앙집권화가 되지 못한 신라 고대에서는 이 녹읍이 <수조권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관료들은 임의적으로 <지역지배>를 하였고, 백성들의 <역역징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녹읍이 수조권 제도라고 하여도, 신라 고대에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문왕이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수조권적 역할을 못하는 수조권 제도>를 <중앙집권화된 수조권적 토지제도>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약간 주관적인 입장이지만, 이 입장이 맞다고 생각되네요.

4. 녹읍은 다시 부활되다

신문왕 때에 시도한 관료전 제도는 신문왕 - 성덕왕을 거치는 강력한 중앙집권 시기에는 귀족들의 골품적 특권을 어느 정도 눌러가면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점은 중앙집권이 조금씩 무너져가는 경덕왕의 <한화정책기>였습니다.

경덕왕기에는 중앙집권의 절정기이면서도, 중앙집권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귀족들은 왕권에 대한 불만을 차츰 토로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녹읍이 부활합니다.

보통 녹읍의 부활은 왕권의 약화 및 귀족권의 성장이며, 토지제도에 있어 지역지배가 다시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교과서적 입장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녹읍의 부활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권의 성장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면 그 시기가 중앙집권의 절정기인 경덕왕기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권은 중국식 한화정책을 실시할 정도로 막강하였습니다.

따라서 녹읍의 부활은 지역지배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귀족권과 왕권의 타협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관료전의 무리한 시행이 귀족들에게 많은 반발을 사면서 국왕권은 무리한 <국가주의적 토지제도>를 시행하기 벅차게 되었습니다. 경덕왕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면서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국식 제도를 많이 차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녹읍제>인 것입니다.

부활된 녹읍은 <귀족들의 지역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전과 녹읍의 절충적인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즉, 녹읍제도를 통하여 어느 정도 관료 귀족들의 전통적 특권을 인정하였으면서도, 그 토지의 <수조권적 특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녹읍을 가진 귀족들은 보유 녹읍 내에서 어느 정도 실권을 행사했으나, 고대처럼 <지역지배>가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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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기의 토지제도 정비는 이정도만 다루겠습니다. 통일신라 녹읍, 관료전 등의 토지제도의 자세한 내용은 오른쪽 상단의 검색창에서 검색으로 더 많은 자료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신문왕기에 정비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다루면서 신라 전체의 중앙제도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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