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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의왕시에 있는 안자묘를 다녀오다...

안자묘를 다녀와서...

1. 성리학을 우리 땅에 알린 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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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은 우리 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것은 송나라에서 발흥 성장한 것과 때를 같이한 인종 전후기입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 중기의 성리학이 발전하는 것은 고려 중기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벌귀족이나 무신정권기에 굳이 성리학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몽골의 침략이 있은 이후, 원나라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초기 주자 성리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원나라가 중국 성리학을 변형시켜서 북방 민족적 성격을 가미한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 북방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 때의 <수기>를 강조하는 개인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치인> 즉,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안향은 충렬왕 대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입니다. 안향은 주자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는 뜻에서 주자의 호가 회암인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회헌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늘 답사는 안향의 신주가 있는 의왕시 안자묘를 다녀왔습니다. 그럼 안자묘에 대한 이야기를 몇가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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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향의 초상화, 소수서원>         <사묘재실 :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전남문화재자료 제29호>

2.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영정

위 왼쪽 그림을 보세요. 안향의 초상화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기를 소개해야 하는데... 여긴 너무 유명한 곳이니, 저는 남들이 안가는 안자묘를 중심으로 설명하렵니다. 안향 초상화를 한번 볼까요? 이 초상화는 비단에 채식하였고, 충숙왕 5년에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충숙왕은 안향이 성리학을 소개한 공로가 크다고 생각하여, 원나라 출신의 화가를 불러 안향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라고 지시했다고 하네요. 이 그림은 반신상으로서 머리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습니다. 국보 111호입니다.

실제 조선시대의 최초의 서원이었던 백운동 서원은 안향을 추모하는 서원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은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강직함과, 제사를 지내는 부분을 당시 왕인 중종에게 알렸고, 중종은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이라고 하는 간판을 다시 내려주면서 노비, 토지, 서적을 주었답니다. 왕이 현판과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합니다. 이 때부터 안향은 조선 성리학의 아버지로서 곳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오른쪽 그림은 안자를 모신 대표적인 곳인 전남에 있는 사묘재실입니다.

3. 이제 안자묘를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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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왕역에서 내린다                       2. 도깨비시장을 가로지른다                  3. 부곡중학교를 찾는다.

안자묘를 찾아가려면 재일 먼저 지하철 1호선 의왕역에서 내려야 합니다. 의왕역에서 내려서 안쪽으로 쭈욱 들어가면 의왕역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도깨비 시장이 나옵니다. 사람들도 많고, 인심도 좋은 곳이지요. 여기서 시장을 가로질러 쭈욱 10분쯤 걸어가봅니다. 시장도 구경하면서요... 근처에는 철도대학과 철도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구경하면 금상첨화... 안자묘는 체육공원이라는 교통푯말만 쭈욱 따라가면 됩니다.

안자묘는 부곡중학교 사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곡중학교 학생들은 정작 학교 앞에 있는 건물이 안자묘라는 것을 아는 학생이 별로 없더군요. 호기심에 모르는 척 계속 물어보았는데, 아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다들 수행평가는 멀리있는 문화재로만 하나봐요. ^^

안자묘는 안향의 후손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집 안쪽에 있었습니다. 밖에서 일단 사진을 몇 장 찍고, 벨을 살포시 눌러봅니다. 안 계시네요... 어쩔 수 없이 옆집 식당은 <보릿골>로 간 후, 사진 촬영을 허락받고 식당 2층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유리가 두꺼워 사진이 잘 안찍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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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 모든 사진을 더블클릭하시면 크게 원본으로 보여집니다.>

4.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촬영하다.

다시 벨을 눌렀더니, 할머니가 <학생이십니까?>라고 바로 물어보십니다. 학생들이 문화재 탐방으로 많이 왔다가나보네요. <아뇨, 선생님입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들어가서 안자묘를 몇장 사진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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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차분히 읽고 싶었는데, 이런... 옥편이 없군요. 걍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서 아는 부분만 읽어볼랍니다. 할머니께서는 친절하셨습니다. 안자묘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예 안자묘에 관련된 유인물을 먼저 주시더군요. 안자묘도 많은 분들이 찾아오나 봅니다. 후손이신 할머니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신주가 있는 건물들 사진을 찍었습니다. 평일에는 건물 내부 공개는 안된다고 하시네요. 외부만 찍고, 내부 사진은 나중에 안자묘 제사 때나 찍을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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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친회에서 관람객에게 배포하는 안자묘 소개글

저희 회현 안향 선생의 24대 종손 안재찬 인사드립니다. 오늘 이곳 안자묘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안자묘에 대한 말씀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안자묘는 고려시대 명현유학자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신주(위퍠)를 모신 사우이며 부조묘라고도 합니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분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어 영구히 제사를 지내게 하는 외례의 특전입니다. 안자묘는 원래 한양(서울 도동)에 모셔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종손이 황해도 연백군 백천땅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사우를 재건하고 수백여년 동안 봉안하고 있었습니다. 이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국토가 양분되어 1947년 가을에 선생의 신주만을 모시고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소규모 사우를 짓고 제사를 모시던 중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977년 가을에 여기 의왕시 월암동에 부지를 마련 안자묘를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현재 도시 계획 관계로 부지가 일부 도로에 편입되어 협소해졌습니다.

안자묘의 <자>자는 예로부터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 성현에게만 부여되는 최고의 존칭입니다. 1917년 우리나라 유림들이 공자의 고향인 중국 궐리, 연성부(우리나라 성균관)에 가서 안향 선생의 신도비명을 요청하니, 공자 76대 사손 연성공 공영이 선생은 비문을 지어 말하기를, "성인의 도를 밝혀 600여년 동안 빛나게 한 사람은 실로 우리 회헌 안자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도학이 높으신 안향 선생이 안자라는 최고의 호칭을 받게 된 시초입니다.

고려시대 최초로 주자학을 도입한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이며 명신이셨고, 고려 고종 30년 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홍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처음 이름은 유요 후에 이름은 향자로 개명하였으며,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 안씨, 시호는 문성공입니다. 안향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셨으며 18세 원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곧 교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생은 33세에 상주 판관으로 부임하셨을 당시 민중을 혼란시키는 즉, 혹세무민의 미신을 타파하여 민풍을 쇄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충렬왕 15년 고려 유학제가가 되어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셨을 시에 주자전서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손수기록하고 또 공자, 주자화상과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육경, 제자사 등을 구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시고 신유교문호를 부흥케 하셨습니다.

유교는 조선조 500년 동안 윤리도덕의 통치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편 선생은 인재양성을 위해 섬학점(장학금)을 마련학여 많은 학자와 인재를 베출하였으며, 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선생은 도첨의중찬, 즉 영의정 정일품을 하시고 향년 64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장지는 경기도 장단군 전서면 대덕산 명승지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이북입니다. 선생은 주자학을 전래하여 발전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서 이제는 성균관 대성전에 배향되고 서원, 향고, 사에도 배향되어 춘추로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안자묘는 전국 자손들이 매년 음력 9월 12일 기신제를 드리는 곳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올해(2007년)로 701주기가 됩니다.

선생은 유국자제생문에 즉, 성균관 학생들에게 밝히신 글에서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에 있어 인륜 도덕을 잘 지키는 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둘째, 국민은 국가에 마땅히 충성하고

셋째, 예의 범절로 가정을 다스리고

넷째, 신의로써 벗(친구)를 사귀며

다섯째, 몸가짐을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며

여섯째, 무슨일이든지 시작하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라

선생님은 위 여섯가지 덕목은 항상 우리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간단히 소개를 마치며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 안자묘 보존회>

5. 종친회에서 제사지내는 광경

안자묘는 매년 음력 9월 12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종친분들이 큰 규모의 제사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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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에 제사지내는 모습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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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순흥안씨 다움 사이트>

첫 번 째 기행으로 집 근처에 가까운 곳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곳이 안자묘인데, 너무 대책없이 갔다와서 쓸 말이 거의 없군요. 다음부터는 좀 계획적으로 연구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 유적지 돌아보려고 엄청난 거금을 털어서 천만화소짜리 삼성 디카도 샀는데, 아직 찍는 방법도 서툴러서 사진들도 맘에 안드네요. 틈틈이 관심있었던 여기저기를 다녀보고 글을 올려볼 예정입니다. 글과 사진이 서툴러도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