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조선 시대 경연 사료 모음(1)

조선 시대 경연 사료 모음(1)

1. 세종 003 01/01/30(을해) / 경연에 나아가 변계량과 {시경} 빈풍 칠월편에 대해 이야기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은 말하기를,

"칠월편(七月篇)은 백성의 가난한 것만을 갖추어 말했고 시설의 방법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장차 무슨 술책으로 해 나간단 말이냐."

고 하니, 변계량은 답하여 아뢰기를,

"백성을 구원하는 요령은 사람됨을 잘 알고 쓰는 데에 있사옵니다. 사람됨을 알고 잘 쓴다면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무엇이 어렵겠사옵니까."

하고, 정초(鄭招)는 아뢰기를,

"각도 감사가 수령들을 올리고 낮추는 것이 적중하지 않고 대개는 민첩하여 사리를 잘 판단하는 것만을 능사로 하여, 드디어 진실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원컨대 이제부터 새로 임명된 수령은 전하께서 반드시 친히 인견(引見)하시와,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살피신 다음에 부임케 하면 수령으로서도 적격자를 얻을 것이며, 백성도 진실한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은 "그렇겠다."고 하였다.

 

2. 세종 051 13/01/25(경인) / 경연에 나아가 전조 역사의 개수를 논의하다

상참(常參 : 신하들로부터 국무에 대하여 보고를 받음)을 받고, 윤대(輪臺 : 매달 세 번씩 각부의 낭관이 차례로 직무에 대하여 보고하는 일)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일식(日食)하는 곳을 강독하다가 말하기를,

"내가 {삼국사(三國史)}에 쓴 것을 보니, 일식의 기사를 혹 한 나라에선 썼는데 두 나라는 쓰지 않았고, 혹 두 나라에선 썼는데 한 나라에선 쓰지 않았으니, 태양의 일식은 비록 침침한 구름이 가렸다 하더라도 어찌 세 나라 가운데 혹은 보이고 혹은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김부식(金富軾)·하윤(河崙)·권근(權近)이 역사를 편수하였는데, 그 쓴 것이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좌대언 김종서(金宗瑞)가 대답하기를,

"사필(史筆)에 의해 편수하기 때문에 세 나라가 각기 다른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옳은 말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한 자가 종(宗)을 고쳐 왕으로 일컬었으니, 이는 너무나 그 진상을 멸실(滅失)시킨 것이다. 초(楚)나라가 침람하게 왕으로 호칭한 것을 공자(孔子)가 이를 낮추어서 자(子)라 호칭하고, 오히려 말씀하기를, '나를 알고 나를 죄책할자가 오직 이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역시 공자가 노(魯)나라 역사의 직필(直筆)에 필삭(筆削)을 가한 것을 비난하고 있은 즉, 전조의 역사를 편수한 자가 종(宗)을 고쳐 왕(王)으로 일컬은 잘못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한 뒤에 전조의 역사를 개수(改修)하려 하는데 어떤가."

하니,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옳은 말씀입니다."

하였다.

 

3. 세조 033 10/07/26(정축) / 윤대에서 아뢴 것을 초록하여 들여보내게 하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니, 좌의정(左議政) 구치관(具致寬)·이조 참판(吏曹參判) 홍응(洪應)·공조 참판(工曹參判) 임원준(任元濬)·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에게 명하여 윤대(輪對)할 사람 20인을 거느리고서 들어오게 하여, 훈련관 사(訓鍊觀使) 이계손(李繼孫) 등에게 이르기를,

"윤대(輪對)는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여 임금의 총명(聰明)을 넓히려는 목적이니, 너희들을 동시에 공동으로 윤대(輪對)하게 하여 부주(敷奏)의 길을 넓히려고 한다. 그러나 일일이 상세히 들을 수가 없으니 너희들이 각각 그 대강을 진술(陳述)하여 초록(抄錄)해서 들여보내면 장차 채택(採擇)하여 쓸 것이다."

하였다. 이계손 등이 각각 말할 바를 쓰니, 임금이 친히 읽어보고 조문(條文)에 따라서 가부(加否)를 정하였고, 가(加)한 것은 즉시 시행하였다. 이어서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명중(金命中)·직예문관(直藝文館) 이영은(李永垠)·사예(司藝) 정자영(鄭自英)·좌랑(佐郞) 최호원(崔灝元)·지리학(地理學) 안효례(安孝禮) 등으로 하여금 음양(陰陽)·이기(理氣)·{역학계몽(易學啓蒙)}을 논란하게 하고, 임금이 기뻐하여 정자영에게 가자(加資)하고, 안효례(安孝禮)의 고신(告身)을 돌려주었으니, 안효례가 일찍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복(喪服)을 벗고 궐문(闕門)에 들어왔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고신(告身)을 거두었던 것이다. 뒤에 음양(陰陽)의 기술(技術)로써 서운관(書雲觀)에 다시 근무하였다.

 

4. 세조 033 10/07/27(무인) / 예승석 등이 변방의 군사를 부리는 일 등의 폐단에 대해서 아뢰다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갔다. 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행 상호군(行上護軍) 송처관(宋處寬)·이조 참판(吏曹參判) 홍응(洪應)·형조 참판(刑曹參判) 임원준(任元濬)과 승지(承旨)·입직(入直)한 제장(諸將)·겸사복(兼司僕) 등이 입시(入侍)하니, 술자리를 베풀었다.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예승석(芮承錫) 등 18인이 윤대(輪對)하니,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에게 명하여 말할 것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예승석이 아뢰기를,

"변방(邊方)의 병사(兵使)·수사(水使)·만호(萬戶) 등이 사사로이 군졸(軍卒)을 부리므로, 오로지 적(敵)을 방어하는 데 종사(從事)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승석을 불러서 물었다. 예승석이 대답하여 아뢰는 것이 상실(詳悉)하니, 임금이 가상(嘉尙)히 여겨 말하기를,

"내가 깊이 궁중(宮中)에 있어서 변진(邊鎭)의 폐단되는 일을 아직 들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 네 말을 들으니, 바야흐로 윤대(輪對)의 유익(有益)함이 증명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이파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의 말한 바를 조목(條目)별로 해당 관사(官司)에 내려서 시행하게 하였다. 또 저폐(楮幣)의 이익(利益) 여부를 가지고 윤대(輪對)에 물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익됩니다."

하였으나, 교리(校理) 김승경(金升卿)이 홀로 말하기를,

"이익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승경과 이롭다고 말한 사람 1인에게 명하여 각각 자기 소견(所見)을 논(論)하게 하였는데, 날이 다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또 성균 사예(成均司藝) 정자영(鄭自英)·김영벽(金暎璧) 등에게 명하여 성리(性理)의 설(說)을 강론(講論)하게 하고, 정자영에서 이르기를,

"너는 학문에 매우 익숙하니, 반드시 남이 알지 못하는 공부(功夫)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자기를 위해서 많이 공부한 데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위한 학문이란 스스로 다복(多福)을 구(求)하는 것이다. 지금 네가 나에게 칭찬과 포장(褒奬)을 받는 것도 또한 다복(多福)을 구하는 것이다."

하고, 명하여 현질(顯秩)을 제수(除授)하였다.

임금이 또 양성지(梁誠之)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경(卿)이 우활(迂闊)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4가지 있으니, 혹은 재주를 사랑하거나, 혹은 색(色)을 사랑하거나, 혹은 마음을 사랑하거나, 혹은 재물(財物)을 사랑하는 것인데, 경(卿)과 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뿐이다."

하니, 양성지가 고두(叩頭)하면서 사례하였다. 이어서 양성지와 임원준 등에게 명하여 여러 학문(學門)을 나누어, 학문에 6인을 두고 나이 어린 문신(文臣)을 여기에 배정하였는다.

 

5. 세조 034 10/08/06(정해) / 7학에 능한 것이 문신의 일이 아님을 말한 김종직을 파직하다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남윤(南倫)·감찰(監察) 김종직(金宗直) 등이 윤대(輪對)하였는데, 김종직이 아뢰기를,

"지금 문신(文臣)으로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율려(律呂)·의약(醫藥)·복서(卜筮)·시사(詩史)의 7학(學)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그러나 시사(詩史)는 본래 유자(儒者)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雜學)이야 어찌 유자(儒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學)이겠습니까? 또 잡학(雜學)은 각각 업(業)으로 하는 자가 있으니, 만약 권징(勸懲)하는 법(法)을 엄하게 세우고 다시 교양을 더한다면 자연히 모두 정통(精通)할 것인데, 그 능통(能通)하는 데에 반드시 문신이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학(諸學)을 하는 자들이 모두 용렬(庸劣)한 무리인지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뜻을 이루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비루(鄙陋)한 일이라 하나 나도 또한 거칠게나마 일찍이 섭렵(涉獵)하면서 그 문호(門戶)에 며칠 동안 있었다."

하고,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김종직은 경박(輕薄)한 사람이다. 잡학(雜學)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 유사(攸司)에 내려 그 정상을 국문(鞫問)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미 윤대(輪對)의 법(法)을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견을) 다 말하게 하는데, 또 말한 자를 죄준다면 언로(言路)가 막힐 것이니, 그것을 중지하고 파직(罷職)을 시키라."

하였다. 또 전지(傳旨)하기를,

"김종직은 어떤 학(學)을 나누어 맡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곧 사학(史學)입니다."

하므로, 배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6. 선조 003 02/08/16(정사) / 교리 이이가 {맹자}를 강하고 인심의 진작과 성학의 정진을 말하다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의 관직) 이이(李珥)가 경석(經席)에서 {맹자(孟子)}를 진강하면서 임문(臨文, 책을 펴놓고 읽음)하여 아뢰기를,

"세대(世代)마다 각기 숭상한 바가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숭상한 것은 부국 강병(富國强兵)에 있었으므로 전쟁에 이기고 공략하여 탈취하는 데 그쳤습니다. 서한(西漢) 때의 순후한 풍조라든가 동한(東漢) 때의 절의(節義), 서진(西晉) 때의 청담(淸談) 등이 모두 한 시대의 사조였습니다. 임금으로서는 한 시대의 사조(思潮)가 어떠한지를 살펴서 그 사조가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권간(權奸)이 국정을 전단한 뒤를 이어받아 사습(士習)이 쇠약하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충군 애국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시속(時俗)에 구애되어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속의 풍조가 이러하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킨 뒤에야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 맹자는 필부의 힘으로 다만 언어(言語)로써 사람들을 가르쳤는데도 오히려 사론(邪論)을 종식시키고 바른 도(道)를 넓히어 우(禹)임금과 같은 공을 이루었습니다. 더구나 임금은 치세(治世)의 책임을 맡고 있으니 이 도로써 제대로 백성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후세에 교화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당대에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비단 맹자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오늘날 인심(人心)의 함닉됨을 홍수의 재해와 양묵(楊墨)의 피해보다 심하니, 성상께서는 다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포시(布施)하시어 군사(君師)의 책임을 다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고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이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다스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학문에 공을 쏟아야 합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와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하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실지로 공효가 있게 된 다음에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부는 집에 있으므로 아무리 학문의 공이 있다 해도 그 효과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아 마음과 뜻에 온축된 것이 정사(政事)에 발휘되는 까닭에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재 민생은 곤핍하고 풍속은 박악(薄惡)하며 기강은 무너지고 사습(士習)은 바르지 못한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해가 되는데도 그 다스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의 격물·치지·성의·정심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처럼 인습적으로 이어가 날로 더욱 퇴패(頹敗)해진다면 나라 모양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도학(道學)에 마음을 두시고 선정(善政)을 강구하시어 성주(聖主)가 장차 삼대(三代)의 도를 흥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신민들이 환히 알게 하소서. 그런 뒤에 뭇 신하의 선악을 자세히 살피시어 충군 애국하는 자들을 가려 그들과 함께 일을 같이하시고, 아무 뜻도 없이 평범하게 국록만 탐하는 자들을 큰 직임에 외람되이 있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거조(擧錯)가 타당함을 얻고 인물과 자리가 서로 걸맞게 된다면, 경세 제민(經世濟民)하는 선비들로서 세상의 소용이 되는 자가 반드시 나와 나라의 일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다스리는 데에 뜻을 두신다면 평상인의 말도 성덕에 보탬이 될 수 있겠지만 만약 전하께서 유유 범범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형식만을 일삼는다면 비록 공자와 맹자가 좌우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리를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유익함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체통(體統)을 지켜야 하는데 저번에 승지가 면대(面對)를 청한 것은 근규(近規)가 아니어서 체통을 무너뜨린 듯합니다. 가령 두려워해야 할 만한 조짐이 있더라도 본디 대간과 논사(論思)하는 신하들이 있는데 하필 승자가 청대(請對)한단 말입니까."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단지 말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가 문제입니다. 말한 것이 옳다면 체통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승지도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이니 청대하여 일을 말하는 것도 그 직분입니다. 이준경의 말은 크게 편집(偏執)되어 있습니다. 지금 선정이 거행되지 않아서 모든 법도가 폐이(廢弛)된 판국에 만약 분연히 일으켜 한 시대의 규구(規距)를 새롭게 하지 않고 그저 일상 해오던 옛날 법도만 따르고 지킨다면 어떻게 적폐(積弊)를 제거하고 큰일을 성취하겠습니까. 대신으로서 임금을 정당한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다만 근규(近規)를 준수하는 데 힘을 쓰게 하니 자못 아랫사람들의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이가 상에게 아뢰기를,

"정치를 하려면 먼저 시대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임금이 잘 하려는 의욕이 있어도 권신이 국정을 독단하거나 전쟁이 일어나 소란스러우면 아무리 뜻이 있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일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다행히 권간이나 전쟁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급급히 하셔야 될 때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긴 하다. 다만 요란스러웠던 전국 시대에도 맹자는 제(齊)와 위(魏)에 왕도(王道)를 권했었으니 비록 전란이 있다 해도 왕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이이가 배사(拜辭)하고 아뢰기를,

"전하의 견해가 진정 천고에 탁월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왕도가 행해지는 것은 실질적인 공을 쌓는 데에 있는 것이지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는 실질적인 공부에 힘을 쏟으소서. 맹자의 말에 '일단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만 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긴요한 말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일단 바르게만 되면 정사를 처리하는 사이에 조그만 실수가 있다 해도 스스로 개혁해 나가겠지만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정사가 도리에 우연히 맞는다 해도 점차 변하여 그릇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먼저 성심(聖心)을 바르게 하시어 일상의 언행이 순수하게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오게 해서 신민의 모범이 되신다면, 군자들은 믿는 바가 있게 되어 충성을 다해 보좌할 것이며, 소인들 역시 상의 마음을 사사로이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앞으로는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선을 향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마음을 일단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