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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들었다 등)

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

1. 황제나 지배자를 뜻하는 <카이저, 차르>의 어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러시아의 지배자를 뜻하는 뜻인 <차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요? 러시아의 지배자인 차르, 독일에서 황제라는 말은 카이저는 모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지배자였던 카이사르(시저)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민중파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빵과 서커스 정치>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양아들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은 훗날 연극 등에서 주요 소재 거리가 되었는데, 유럽의 각국은 그의 이름과 황제라는 말을 연결시켜 칭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로마의 황제란, 카이사르가 죽은 뒤 그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됩니다. 정작 카이사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동양 중국에서 유래된 황제란 말은 전설적인 3황 5제 시대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황제>의 명칭에서 시작됩니다. 서유럽에서 말하는 지배자 슐탄-칼리프은 황제(슐탄)이자 종교지배자(칼리프)를 모두 어우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황제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왕보다 높은 지배자를 통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의 황제는 중국 주나라 이후 주변의 제후국들을 왕으로 칭하면서 <그들의 우두머리>성격을 가진 자들을 통칭하는 말로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에서부터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유럽식 언어와 연결시켜 황제의 개념을 설명하곤 하죠. 예로, 서양에서 각국의 수장을 왕이라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을 정복하여 유럽 자체를 나폴레옹 왕가로 만들어 친인척을 왕으로 임명하면서 황제의 칭호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황제의 칭호는 관념적인 것으로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정치적 상황과 세력을 고려하여 칭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묘청도 황제를 칭하여 금국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조선 후기 고종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합니다. 황제의 역사적 개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분봉된 왕들의 수장>으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실제 관념적인 개념은 <자신의 세력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2. 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영국과 각국의 산업혁명이 언제인지 아시죠? 영국의 산업혁명은 18세기, 유럽과 미국, 독일, 일본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초반부터 후반부까지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구요? 보통 우리나라는 광복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과 증기선>을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세력을 막아낸 흥선대원군 아시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배가 <증기선>이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앞으로 계속 침략할 서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우수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죠.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글을 올려 서양의 증기선을 물리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때 채택된 방법이 바로 <학우선>이라는 기발한 방법의 배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학우선이란 학의 깃털로 배를 만들면 그 탄력성 때문에 서양의 포탄을 맞아도 배에 구멍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만든 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실제 그 배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여 전국에서 학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현상금을 받고 싶었던 사냥꾼들은 학을 잡아 그 깃털을 모으고, 국가에 깃털을 보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깃털에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보고 만족하여, 그 배를 포구(마포)에서 시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배의 진수식을 하자마자 배는 물이 새어 곧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 배의 증기기관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철갑선을 만들고 다시 마포에서 진수식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엔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을 석탄이었지만, 석탄이 아닌 석탄의 대체재인 숯을 연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배는 몇 미터 나가다가 멈추어 버렸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당시 집권당이 하나 하나 연구하였던 성과물들은 민씨정권으로 바뀌면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민씨정권은 서양에서 직접 무기기술과 최신 무기를 가져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마젤란과 라프라프는 서로에게 영웅과 역적이 되었다!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은 유럽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마젤란은 실제 세계일주를 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으며 그의 부하들이 세계일주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1521년 마젤란은 세계 일주 도중 필리핀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젤란은 세계일주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식수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크리스트교를 강요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주변 섬들은 마젤란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교도가 필리핀에서 포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신자인 마젤란과 필리핀 주변 섬에 큰 영향을 미치던 마크탄의 왕이었던 라프라프는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싸움을 하느님의 가호로 쉽게 이기리라던 마젤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필리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마젤란은 죽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다급했던지 마젤란의 부하들은 함장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섬에서 다급히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 후 크게 좌절한 마젤란의 일행들은 여행 도중의 섬들에서 제대로 된 식수를 공급받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그들이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에는 식수부족, 영양실조 등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함대 중 한 척인 빅토리아 호만 요한 세바스찬 엘카노의 지휘아래 모국에 돌아옴으로서 세계일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역사적인 여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 아시죠? 무적함대로 전 유럽을 호령하였던 위대한 에스파냐의 왕입니다. 펠리페 2세는 마젤란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마젤란이 죽은 섬을 국왕가인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이름지었답니다.

그러나 과연 필리핀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젤란의 항해가 위대한 업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필리핀의 역사 박물관에는 <마젤란 비석>과 <라프라프의 비석>이 동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마젤란의 비석에는 <애석하게도 라프라프에게 죽고만 여행가>라는 입장에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라프라프의 비석에는 <침략자인 에스파냐인들을 무찌른 필리핀 최초의 국왕>으로서 라프라프의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바뀌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광개토대왕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잔인한 학살자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점진론을 주장하고 조선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정벌에 앞장선 영웅 이토 히로부미지만, 한국에서는 역적 이토 히로부미로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고만 일본인으로 묘사되죠. 역사를 뒤집어 보면 승자와 패자가 꼭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