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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개혁 - 1차 개혁의 내용

1. 갑오개혁은 여러 이권이 맞물려 시작되었다.

보통 갑오개혁을 이야기할 때, 자주적이었는가, 의세의존적이었는가를 많이 이야기 합니다. 1차 갑오개혁은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비교적 조선 관리들에 의해 차분히 진행되었습니다. 1차 개혁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은 평가할 만 합니다.

1차 개혁에서 일본의 역할이 왜 축소되었는지는 지난 파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부연하지면, 동학농민운동이 전주화약으로 평화롭게 끝나가는 것을 일본이 방관하지 않았고,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과 조선이 그것을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무력으로 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에게 군사적인 협박을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실제 개혁을 강요한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도하지 못하였습니다.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이, 6월 23일 청국 함대와 교전을 시작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은 너무 어지러운 한 해였습니다. 3월부터 동학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1차 동학농민운동이 겨우 마무리되나 했는데, 6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때 1차 갑오개혁이 일어났으니까요. 9월에는 농민들이 일본군 철수를 외치며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을 진압한 일본은 12월에 2차 개혁, 을미년에 3차 을미개혁을 추진합니다.

2. 교청청과 군국기무처의 차이점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이 스스로 개혁을 하기 위해 마련한 교정청은 6월 11일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교정청에서 하려던 개혁은 농민군이 요구한 환곡의 폐단과 잡세 폐지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고, 신분제, 과거제 폐지 및 탐관오리 숙청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 교정청은 철저히 조선 자체의 내부 모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가진 기구였죠. 그럼 교정청 줌싱의 개혁안을 한번 볼까요?

우리 정부는 왕명을 받들어 교정청을 설치하였고 당상관 15명을 두고 먼저 폐정 몇 가지를 개혁하니 모두 동학당이 주장해온 말이다. 자주 개혁을 점차 추진하여 일본인들이 끼어듦을 막고자 하였다. 6월 16일 교정청에서 혁폐 조건을 의정하여 방방곡곡에 부쳐 각 도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1. 이포(착취한 세금)가 많은 자는 일절 너그러이 용서하지 말고 일률로 시행하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족징을 절대로 금하라.

1. 지방관은 부임지에 토지를 매입하거나 묘를 쓸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기면 토지는 속공하고 묘는 파내어 옮겨라.

1. 채무에 관한 소송은 30년이 지난 것은 받아주어서는 안된다.

1. 각 읍 이속은 신중하게 뽑아 안에 올리고 이를 임명하는 데 만을 뇌물을 내어 법을 위반하는 자는 공금 횡령으로 다스려라.

1. 세력에 기대어 남이 먼저 써놓은 묘를 빼앗는 것을 일체 엄금하고 묘는 일일이 적발하여 세금을 거두어라.

1. 각 읍관에 쓰이는 물건은 시중가격을 따르고, 진배 물종 역시 시중가격의 낮음에 따를 것이다. 소위 관지정(관아에서 알아서 정한 것)은 혁파한다.

1. 부보상 외에 이르을 칭탁해 무리짓는 것을 각별히 금할 것이다. (사료상 보부상이라는 표기는 안 나온다. 교과서에 나오는 보부상이라는 표기는 일제시대 일본식 표기이다. 부보상이 맞다.)

1. 경각사에서 따로 복정하는 것은 반드시 정부에 보고하고, 만일 사사로이 백성에게서 거두는 이는 반드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1. 원결외 추가로 더하거나, 호포 외 더 걷는 것은 금지한다. 만일 드러나면 곧 바로 다스린다.

1. 경우리 역가미는 구례로 시행하고, 20년 이래 가마련은 아울러 거론치 말라.

1. 민고는 혁파하라.

- 속음청사 7권, 교정청 의정혁폐조건, 고종 31년 6월 26일 -

그러나, 이것에 불안을 느낀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면서 개혁의 내용이 약간 바뀝니다. 그 이유는 <군국기무처>가 정상적인 기구가 아니라, 초법적인 비상 개혁 추진 기구였기 때문입니다. <군국기무처>의 성격이 전두환 독재시절의 <국가비상회의>같은 느낌이랄까요?

군국 기무처의 역할

1. 군국의 기무 일체의 개혁을 담당한다.

1. 군국의 기무는 본처에서 이결한 뒤 뜻을 품어서 시행한다.

1. 의원 10인 이상 20인 이하.

1. 군국에 관한 사무는 일단 모두 회의에 올려 상의할 것

1. 회원 반수 이상의 참석으로 개최하고,

1. 회의원이 논의하는 안건의 가부는 다수에 따라 결정한다.

- 경장장정존안, 개국 503년 6월 26일, 27일 -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형식적으로 대원군 정권을 불러들였습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에는 대원군 계열이 일단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화의 개혁인만큼, 실질적으로는 동도서기 계열과 개화파 계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일본의 강요로 이루어진 만큼, 일본인 고문과 친일파, 그리고 형식적으로 각국 고문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의 개혁에 어느 정도 간섭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개혁의 중심층은 동방의 정신을 지키고 서양의 좋은 것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 계열이였습니다. 이것이 1차 개혁이며, 1차 개혁은 7월말에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이후 11월부터 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2차 개혁이 진행되어도, 1차 개혁의 큰 틀은 바뀌지 않습니다.

3. 1차 개혁의 큰 틀

1894년 7월부터 진행된 1차 개혁은 교정청 대신 <군국기무처>가 들어섰지만, <교정청>에서 제시한 개혁안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굳이 군국기무처를 신설한 일본의 압력이 청일전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일본이 개혁을 추진한 것은 조선의 이권을 빼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이권을 놓고 청과 전쟁중이니 개혁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대원군을 데려다놓고 시작한 개혁이었지만, 일본이 빠지자 어윤중을 대표로 하는 동도서기 개혁파들은 대원군을 왕따시키면서 개혁을 추진합니다. 왜냐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축소하고, 국왕의 생부인 대원군의 세력을 견재하면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모델인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 역시, 민씨세력 견제를 위해 흥선대원군을 데려왔지만 대원군에게 실권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죠.

따라서 1차 개혁부터 3차개혁까지 전체적인 틀에서 개혁을 보았을 때, 핵심은 <왕권의 약화>를 통한 개혁 세력, 즉 <내각의 강화>입니다. 그럼 한 번 그 내용을 볼까요?

4. 1차 갑오년 개혁

정치 개혁의 핵심은 <왕권 약화>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되, 국가 주권은 강화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입헌군주제>를 성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해 버립니다. 국왕이 모든 재정을 좌지우지하던 조선시대의 관행을 폐지하고, 재정은 <탁지아문>이라는 재정부에서 관리하도록 합니다.

또 왕실의 업무와 국가 업무를 분리하여 <행정질서>도 법체계에 의해 확고히 합니다. 궁내부의 일과 의정부의 일을 분리하여, 국왕은 군림하되 행정 각 부의 담당 업무에 하나 하나 참견할 수 없게 한 것이죠. 행정업무는 총리대신과 8아문에서 전문적으로 담당하게 됩니다.

왕권과 집결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없이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특히 삼사, 언론기관 등 조선 시대 신하들의 기관을 폐지해 버립니다. 이 말은 왕권의 약화와 함께, 왕권의 지지기반인 신권도 약화시켜 조선시대 모든 지배계급의 권한을 제한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은 더 이상 신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독점할 수도 없고, 신료들도 과거제를 이용한 출세나 권력남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권한은 강화시켰습니다. 일단, 만국공법에 입각한 <국민주권,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고, 국가의 주권이 중요함이 강조됩니다. 청과의 주종관계는 청산하겠다고 천명하였고, 독자적인 개국연호를 사용합니다. 경찰기관인 경무청도 설치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은 <재정일원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왕을 중심으로 왕실, 외척, 세도가문 등에 의해 정리되지 못한 모든 재정은 <탁지아문>이라는 재정전담부서에서만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도 <은>을 화폐단위로 하여 <일원화>하였습니다. 흔히, 조세의 금납화라고 부르는 대목이지요.

또, 그동안 일치하지 않았던 도량형을 통일합니다. 쌀 한 되, 한 말, 1리, 서양식 인치 등의 단위를 기준을 정하여 통일한 것이죠. 쌀 한 되가 바가지 크기에 따라 달라지면 곤란하니까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가장 큰 개혁은 <신분제도의 폐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분제도의 폐지는 양반, 상민이 법적으로 차별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노비가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또, 조혼제도, 고문과 법에 의하지 않은 처벌, 연좌제도도 공식 폐지됩니다. 물론, 법적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므로, 이후에도 사람들의 인식에는 아직 신분제도와 같은 구제도의 불합리함이 남아 있긴 합니다. (실제 양반들은 이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 양반으로, 소작농은 이전 노비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은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되지 못했다>가 답입니다. 청일전쟁 중인 일본은 조선의 군제문제 만큼은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갑오개혁 때 우리 군은 근대화되고 강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모가 축소되고 이전보다 나아질 것 없는 군대였습니다. 훈련대와 시위군을 설치했지만, 이것은 국가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왕실을 호위하는 수준의 <의장대 역할>의 군대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종로를 지키는 수비대와 나팔부는 경악대 정도라고 할까요?

1차 개혁 때의 내용들은 2차 개혁 때 홍범 14조로 발표됩니다. 여기서는 1차 개혁에 대한 법령만 간략히 볼까요?

갑오개혁 개혁법령(1894. 7)

1. 현재 이후 국내외의 공사 문서에는 개국기원을 사용한다.

1. 문벌과 양반, 상민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쓴다.

1. 문무존비의 구별을 철폐하고 다만 품계에 따라 상견의를 규정한다.

1. 죄인 자신 이외 일체의 연좌율을 폐지한다.

1. 적실과 첩에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양자를 허가한다.

1.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여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라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

1. 과부의 재혼은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않고 자유에 맡긴다.

1. 공사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의 판매를 금지한다.

1. 비록 평민이라고 해도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이 있다면 군국기무처에 상서하여 토의하게 한다.

1. 각 아문의 조예는 그 수를 조절하여 늘 비치하게 한다.

1. 공금 횡령한 관리에 대해 징계를 엄중히 하되 횡령한 공금을 변상하여 납입하게 한다.

1. 조관품급의 정, 종의 구분을 없애고, 각 아문이 마음대로 체포, 시형하지 못하게 한다.

1. 역인, 창우와 피공 등의 천민 대우를 폐지한다.

1. 관민이 휴관한 뒤에 상업을 경영함은 그 자유에 맡긴다.

1. 과거문장으로만 취사하는 것은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쓰기 어렵다. 임금의 재가를 주청하여 변통하되 따로 선용조례를 제정한다.

1. 각 도의 부세, 군보 등으로 상납하는 크고 작은 쌀, 콩, 면포는 급납제로 대처하도록 마련한다.

- 경장의정존안, 개국 503년 7월 2일, 3일, 10일 -

5. 1차 갑오년 개혁의 평가

1차 갑오개혁에 대한 평가는 2가지 정도입니다.

갑오개혁의 타율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1차 개혁이 일본의 침략적인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일단, 당시 갑오개혁에 대해 조선의 백성들이 심하게 반발하였고, 농민들의 개혁안이 많이 반영되었음에도 <일본>에 의한 개혁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또, 이 개혁의 실시를 놓고, 조선, 청, 일본의 감정이 대립하였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교청청이 일본에 의해 <군국기무처>로 바뀌었으며, 조선의 심장인 경복궁이 점령당하였습니다. 이 개혁안을 놓고 청과 일본은 청일전쟁을 하였고,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특히, 1차 개혁에서는 조선의 군대 개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자율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일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들이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서 요구한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노비 해방, 재정일원화> 등의 내용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타율론자들은 갑오개혁의 왕권약화로 인해 일본의 침략이 수월해졌고, 이것이 일본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율론자들은 왕권 약화는 진정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꾸준히 진행된 근대화의 흐름이었다고 이해합니다.

자, 지금까지 동도서기 계열인 어윤중을 중심으로 한 1차 개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음 장에서 이야기할 2차 개혁은 개화세력과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김홍집, 박영효 내각의 개혁 이야기입니다. 1차 개혁과 2차 개혁은 내용상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상이 아닌 다른 이유로 2차 개혁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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