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창해군의 설치에 대한 짧은 역사적 기록

 

창해군

원삭 원년에 예군 남여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서는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와서 소속되자, 무제는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으나 몇 년만에 없애버렸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논쟁이 되고 있는 창해군에 대한 내용입니다. 창해군은 중국의 한(漢)나라가 랴오허 강[遼河]의 동쪽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인데요. 위만조선의 성립 이후 고조선이 한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직접 접촉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자 한과 만주·한반도 일대의 세력들은 고조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두 지역간의 직접교역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을 중심으로 한 28만여 구에 이르는 동방 예맥세력의 일부는 BC 128년 요동군에 귀속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 사료는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한은 이 사건을 동방진출의 좋은 기회로 여겨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 등으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뚫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고 공사진척도 지지부진하여 BC 126년 무제는 공손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해군으로 향하는 교통로 개척을 중단시키고 창해군도 폐지함으로써 동방진출을 포기하였습니다. 이후 한은 동방진출에 장애가 되는 고조선 세력의 제거와 이를 통한 직접적인 동방지배를 꾀하게 되었지요. 비록 창해군은 설치 2년 만에 폐지되었으나 교통로 개척공사는 중국의 허베이[河北]·산둥[山東] 일대 주민들을 동방으로 쉽게 유입하게 만들어 BC 108년의 고조선 멸망과 3군의 설치, BC 107년의 현도군설치 등 이후 전개되는 중국세력의 동방진출에 있어서 전제조건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