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수능을 거부했다는 것은 만용일까, 용기일까?

한국 사회 이야기

수능을 거부했다는 것은 만용일까, 용기일까?

수능이 끝났다.

수능은 <국가의 대사>이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입 시험에 온 국가의 관심사가 쏠리는 나라... 수능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문구.

<오늘 하루가 당신의 일생을 바꿉니다.>

수능이 끝나고, 고등학생들에게 격려의 글이나 남길까 하고 관련 카페와 블로그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수능을 거부한 고등학생?

나에게 관심은 수능보는 날, 수능을 보지 않고 입시교육 철폐를 외치는 학생에게 집중되었다. 관련 기사도 많고 사진도 많았다.

 

얼마나 입시제도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있으면 고 3이 수능일날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고 있을까? 나는 그 학생이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관련 글들을 찾아보면서 놀라게 되었다. 난 당연히 그 학생의 행동이 용기 있다라고 말하는 글들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많은 블로그 기사들의 초점은 그게 아니였다.

<대단한 용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능을 포기해야 했을까? 다른 날에 시위하면 안되나?>라는 글도 있었고, <부모가 너희를 가만 놔두었냐>는 글도 있었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수능 점수는 몇 점이길래...>라는 댓글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은 <수능>과 <입시>제도의 대안이 없는데. 저런 시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회의론이었다.

슬프다.  얼마나 수능이라는 교육제도에 시달렸으면, 이런 말까지 하게 될까? 한국의 입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입시의 피해자인 대한민국 청소년과 성인들이 왜 그렇게 말해야 하는지, 현실이 슬프다.

<입시 제도>에 대안이 없기 때문에 <무책임한 시위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대안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당장 서점에 가 봐라. 한국 입시제도의 역사부터, 입시제도의 문제점, 세계 각국의 입시제도와 대안을 논의한 책들이 한 책장 가득 있다.

입시제도에 대안이 없다고 말하면서 <수능을 포기한 여학생>에게 수능 점수 몇 점 나오니?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본질과 다른 공격이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다. 국가에 의해 의무 교육받을 권리를 받은 이상 자신과 후대를 위해 교육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방침은 <입시>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교육행정을 기획해 왔기 때문에 교육의 <기본틀>을 다시 짜는 일에는 관심 자체가 없다. 학무모들의 관심은 자녀들이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살아남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지, 교육의 대안 어쩌구 하는 것에 귀 기울일 시간도, 열정도 없다.

즉, 지금의 문제는 대안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관심이 적다는 것을 반영한다.

예전에 서울대 총장님께서 서울대를 평준화하고 대학원 중심의 교육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한마디 던졌다가 <보수단체>들의 못매를 맞으신 적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뭘 바꾸겠다고 혼자 튀면, <따> 당한다. <교육은 학력이며, 인재는 학문적 지식이다.>라는 명제를 대부분이 인정한다. 왜냐면,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말로는 창의적 사고를 이야기 하면서 국영수과사 음미체도기가... 뭐 과목이름 셀 수도 없이 많은 지식을 머릿 속에 주입시킨다.

그렇게 많이 공부한 학생들인데 일본의 독도 망언,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다. 딱 한시기 대입 논술 때만 빼고....

세계화 시대 어쩌고 말하는 뉴라이트들이 힘을 얻는 현 정부에서 <학생들을 이해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빨갱이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은 한국 사회의 발전 원동력이 국가 산업 체제의 발전 과정과 연관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발전>의 논리에 종속되어 온 교육을 <학습자> 중심으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 21세기가 된 이 시점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난, 새로운 교육에 대한 <대안>이 없어서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도 <대안적> 교육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이 없다.

입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교육을 하는 학교들이 우리 사회에는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대안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체계와 다르게 <그들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교육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안학교? 장애우들이나 문제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아냐?> 라고 말한다.그러나, 수많은 대안학교들이 정상적인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모집하여 독특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교육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학교도 있고, 특성화 학교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인가 학교들이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로부터는 꽤 많이 인정받았지만, 현 정부는 공교육과 다른 방식의 학교들에게 냉정하기만 하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문제는 <대안>의 부재가 아니라고 본다. 전 세계에 수많은 국가들이 있고, 수많은 교육철학이 있으며, 수많은 교육제도가 존재한다. 한국 교육제도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다룬 논문은 셀 수도 없이 많으며, 그것을 쉽게 풀이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관심을 가지며, 우리 아이가 급한데 무슨 10년뒤의 교육을 논한단 말인가? 여고생이 수능 날, 시위를 하고 있는데 <니 인생 어떻게 할래?>라는 걱정부터 드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교육제도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깨지는 것일까? 그 믿음만 깰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정부의 교육관계자들이 무능해서 교육제도가 개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교육부 장관을 한다해도 지금과 다른 교육철학으로 칼질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디서 어떤 교육제도를 내놓아도 교육부장관은 돌맞는 자리이다. 내신위주의 학교교육 정상화 방안은, 내신을 위한 사교육을 부추킨다. 논술위주의 사교력 강화 방안은 논술 과외가 성행하게 된다.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받는 보충수업 강화 방안은, 아이들을 새벽에 학원가는 파국으로 몰았다.

뭘 해도 안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입시>라는 틀은 불변한다는 모두의 믿음 때문이다. 머릿속에 하나라도 더 <지식>을 집어넣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입시>의 폐지 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게 가능할까? 수백 수천개의 대안을 내놓아도 우리 국민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경쟁이 없다면 어떻게 발전이 가능하겠어?>

이러한 인식은, 건국이후 한국사회는 무한 경쟁과 산업화의 논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뉴라이트같은 경제 우선주의 집단이 등장해서 경쟁을 부추킨다.

물론 경쟁은 성장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단순한 <지식>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육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이, 30년이상 근무한 현장 교사보다 교육을 더 잘알고 있을까? 교육부 장관에 교사 출신이 오른 적은 없다.

모든 것은 <지식>으로 평가한다. 수능은 학생의 창의적 사고를 테스트한다고 하지만, 실제 테스트하는 것은 <지식의 활용능력> 뿐이다. 지문을 읽고 가장 올바른 <사실과 논리>를 찾아내는 것만이 <능력>이다.

한국 사회는 <교육은 가난의 탈출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의 아이가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길은 <공부해서 대학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도, 교육이 신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회가 경제 성장을 겪는 동안, <교육>은 개인이 희망을 갖는 힘이었다.

어렵게 살았던 과거 세대들은 물론이지만, 지금의 신세대 부모들까지도 그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교육이 출세의 바탕이 될까?

지금의 교육은 돈놓고 돈먹기이다.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과외비용과 유학비용을 투자할 수 있고, 질 좋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다. 돈이 없다면 있는 돈을 교육비로 돌려 투자해야 한다. 부모들은 투자가 성공을 낳는다는 공식을 잘 알고 있기에, 없는 돈도 만들어서 교육에 투자한다.

사실, 돈 많은 집 아이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교육사회학에서도 인정하는 공식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생각한다. 우리 자식만큼은 그 공식을 깨고, 비좁은 명문대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주변의 일화를 보면 실제 그런 예들이 꽤 있다. 그러나, 실제 여러 조사에서는, 명문대 생들의 재산과 부모의 직업군이 비명문대의 그것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한다.

어느 날 부터, 대학은 투자의 성과물이 되었다. 학생들은 그 투자 결과에 만족하기 위해 피터지게 공부한다. 꿈이 뭐냐고 묻는 것은 형식적이다. 어느 대학, 어느 과의 커트라인에 맞추느냐에 따라 투자 비용이 결정된다. 물론 학생들은 그 안에서도 자신의 꿈과 열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그 노력하는 과정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리고, 그 가혹한 시련을 모두 학생과 학부모에게 떠 넘기고 있다.

누군가 말한다. 군대가서 배우는 것도 있듯이 학창시절의 고난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 시간에 학생들이 한번 더 꿈을 꾸고, 한번 더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한번 더 관심있는 철학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보다 100배 더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앞으로도 한국 사회의 <교육철학>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입시제도는 <경쟁> 체제를 지켜나갈 것이고, 수능 때는 국방부 비행기도 움직이지 말아야하는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뀔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뀌지 않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느 날, 더 이상은 안되겠다. 도무지 못살겠다. 바꿔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한 순간 확 바뀌지 않을까? 오바마가 미국 사회에 불가능할 것 같은 충격을 준 것 처럼 말이다.

홧김에 주저리 주저리 논리도 없는 글을 적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을 보고 있자면, 수능 때 학생들이 시위 표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너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