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공지사항  |  전체글보기

7) 송(宋 960 ~ 1279)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라는 혼란을 통일한 것은 후주 절도사를 맡고 있었던 조광윤이었다. 먼저 황제가 된 그는, 당의 멸망이 절도사를 통한 지방 세력의 무력 확장이라고 믿었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 중앙 황제 중심의 문치주의(文治主義) 정책을 폈다. 이는 곧 인재 등용제도에도 영향을 미쳐 황제가 과거를 주관하는 ‘전시’라는 제도가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인재는 황제에게 뽑힌 인재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바야흐로 송은 본격적으로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과거를 통해 붙은 관리라고 하여, ‘사대부’라는 새로운 이름의 지배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송의 문치주의는 국방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결점을 낳았으며, 송은 결국 유목민족으로부터 평화를 사게 된다. 때문에 송은 유목민에 대한 세폐(일종의 세금)라는 엄청난 부담이 지어야했으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왕안석이 시역법, 청묘법, 보갑법, 보마법 등을 아우르는 ‘신법’을 발표하였으나, 지배 세력에게 지지를 받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또 한 번 북방 유목민족들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화북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군대는 부족중심으로 개편이 되어 언제든지 싸움에 임할 수 있도록 태세가 갖춰져있는 강력한 군대였다.(* Tip : 이는 유목민족의 정복왕조가 모두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처음 화북지역을 차지한 것은 거란의 요(遼 916 ~ 1125)였다. 요나라는 거란족과 한족을 구분하여 정책을 폈는데, 그것을 남면관제, 북면관제라고 한다.
<Tip. 요의 정책은 'ㅛ'와 'ㅕ'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암기하자.>
  요를 멸망시키고 중국과 맞닿은 것은 여진의 금(金 1115 ~ 1234)이었다. 금 역시 요와 같이 유목민과 한인을 구별하여 통치하는 이중정책인 맹안모극제를 실행하였다. 또한 금은 송의 황제를 납치하여 송을 남쪽으로 내쫓아버렸다.
  송대에는 드디어 강남의 경제가 화북의 경제를 추월하였다. 비록 농업 부분에서는 소작제도인 지주 전호제가 자리 잡고, 대규모 장원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대만에서 참파벼를 수입해서 강남에서도 벼농사가 가능해졌다. 또한 비단길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이젠 중국의 주 수공업품은 도자기로 바뀌었기 때문에, 바닷길을 이용한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의 발달은 상공인들의 집주를 야기하였으며, 상업, 공업 도시가 만들어지고, 행(行 : 상인 조합), 작(作 : 공인 조합)이 생겨났다. 화폐 역시 발달하였는데, 교자(북송), 회자(남송)가 그것이다.
  송은
도시 중심의 서민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무역의 발달로 사대부가 아닌 사람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떠들썩거리는 무역항과 항구에 붙어있는 도시를 상상하면 되겠다. 이를 와자(瓦子)라고 하며, 와자에선 연극 등의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송대에 와서는 완성된 훈고학을 바탕으로 하여 선종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 성립, 발전하였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웠으며, 가족중심의 윤리관으로 황제의 독제체제를 지지하였다. 역사서로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나왔으며 문학은 서민문학인 사(詞)가 발달하였다.
  송의 가장 큰 히트 상품으로는 3대 발명품인
인쇄술, 화약, 나침반이 있다.
 * 추가사항 : 당 말기 안사의 난과 더불어 송의 건국은 중국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꼽는다. 앞선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송나라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8) 원(元 1271 ~ 1368)
  원나라는 원래 테무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일부였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죽게 되면서 아들들에게 각각 나라를 물려주어 다스리게 했는데, 칭기스칸의 손자였던 쿠빌라이가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새운 것이 원이었다(몽골제국은 원과 4한국(汗國)인 킵차크, 일, 차가타이, 오고타이로 나뉘었다). 원은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족이 지배층이었고, 그 아래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색목인, 화북지방의 한인(漢人), 남송 사람이었던 남인(南人)으로 구성된 민족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몽고인 제일주의’라고 한다. 과거 또한 보지 않았다.
  원은 비단길에는 역참제(驛站制)를 통해 상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주었고, 임안, 항조우 등에 시박사를 설치하면서, 해상 무역 또한 발전하였다. 유목민족이 원래부터 사용했던 초원길도 많이 사용하였다. 몽골인의 개방적인 성격은 이러한 동서무역의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원의 이러한 사회배경은 국제적, 서민적인 문화를 낳았다. 희곡인 『서상기』,『비파기』 등의 원곡(元曲)와 인형극 등의 서민 오락이 발달하였으며, 한족의 민족주의격의 소설인 수호지』,『삼국지연의』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몽골족이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몽고 문자인 ‘파스파’어를 사용하였고, 당연히 공용어 역시 몽고어였다. 마르코 폴로는 원을 여행하고 『동방견문록』을 저술하여, 서양 사람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블로그 이미지

비회원

데이터분석 및 교육 전문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