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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항일 의병 전쟁

항일 의병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특징과 유명했던 의병장들은 꼭 알아두자. 또한 EBS나 여러 모의고사 중에 활빈당 관련 지문이 나온 적도 있으니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을미 의병(1896.1)

 을미 사변과 단별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주로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유인석, 이소응과 같은 의병장들이 대표적이다. 아관 파천(1896) 때 고종의 해산권고로 해산하였다.


2) 활빈당

 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 의병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의병이 해체되고 난 뒤에 별도로 조직한 조직이다. 이미 양반 유생들은 고종의 해산권고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농민들로만 구성된 단체였다. 주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격이며, 반외세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 을사 의병(1905)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을사 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하자, 이에 항의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 의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반 의병장(최익현)을 비롯하여,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평민들 역시 의병단체를 만들어 항일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4) 정미 의병(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제가 알아차린 이후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자 민중들의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군대 마저 해산하여, 해산된 군대가 무기 등을 가지고 의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의병은 보다 조직적인 작전 전개가 가능하였으며 화력적인 면에서도 눈에 띄는 증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이 극에 달했을 무렵,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실행(1908)하지만, 당시 지위를 맡고 있던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하자, 부친상을 치루고 오겠다며 이인영이 떠나버리자 뜬구름처럼 흐지부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5) 남한 대토벌 작전(1909)

 일본는 남한 지방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의병들을 탄압하였다. 대다수의 의병장들과 의병부대가 이 때 일제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등 의병활동은 시련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실질적인 의병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의병장들의 대다수가 북쪽으로 향해 만주 등에 거주하면서 게릴라적인 소규모 부대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6) 의병 운동의 의의와 한계

 의병 투쟁은 1920년대부터 주를 이루게 되는 무장 독립투쟁으로의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반면, 의병 운동은 주로 그동안 지식층인 유생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행하여졌으며, 그로 인해 봉건적인 계층 구조, 명분에 대해 탈피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의병장들 대부분은 거의 유생이었으며, 그들은 신돌석과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거의 무시하다 싶이 하였다. 또한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을 담당했던 이인영 역시 명분에 의해 행동하였으며, 그 결과 의병 활동에 어려움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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