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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대 역사와 문화 코드 (1)

포스트 모던으로 역사를 쓰는 것이 바람직할까?

1. 역사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일까?

21세기는 알 수 없는 시대이다. 역사는 드라마로 재탄생되었고, 문학은 역사를 조롱하듯이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역사를 재구성한다. 사람들은 역사를 즐기면 되는 것이지, 딱딱하게 외울 거리는 못된다고 말한다. 어느 날, 리니지의 주인공처럼 레벌업을 하는 주몽이 등장하였다. 신윤복은 여자였단다. 뉴라이트 아저씨들이 날뛰면서 근현대사를 말같지 않은 상상력으로 다시 구성해 버린다.

역사는 어느 덧 시대의 큰 흐름인 <포스트모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역사를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최근엔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과거를 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료만을 보면서 역사를 공부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스스로 생각하면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구성된 역사는 수많은 문학이야기나 영상이야기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 흥미롭게 구성된 문학, 영화 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역사란 것이 딱딱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선에서 끝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적 자료들을 활용하여 재구성된 역사도 진짜 역사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 논쟁은 문화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한류 열풍이 몰아치는 <지금의 한국>에서 누구나 생각하면서도, 논의하기를 꺼리는 이중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을 <포스트모던>이란 관점에서 한번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영상매체에서, 역사소설에서, 만화와 게임에서 셀 수 없이 등장하는 문화 코드를 역사가 어떻게 따라잡아야 할까?

먼저, 이번 장에서는 포스트 모던이란 것이 무엇인지부터 다루고 본격적인 역사 표현 매체들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 탄생하기 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본다.

2. 랑케 사학의 금기 : 너의 생각은 말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post-morden)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 등장한 사회 철학이다. 20세기, 선진국들은 현대화라는 큰 전환기를 맞이하여 엄청난 물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고, 인류의 발전은 무한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회 내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급속한 발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소외된 계층과 인종이 있었고, 빈부격차와 성차별이 존재했다. 과학의 발전은 환경을 파괴하기도 했으며, 역사는 개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인류의 업적은 <교과서>로 편찬되어 모든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똑같은 지식을 주입받게 되었다. 교과서는 인류 발전의 <홍보물>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에 씌여진 말들이 모두 진리인 것일까? 교과서를 비판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점차 사회 주류 계층이 만들어놓은 엄청난 발전과 현대적 장치들이 만능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에서 포스트모던이 등장한 것도 포스트모던 철학이 등장한 것과 유사한 이유 때문이었다. 자, 그럼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역사학의 역사에서 간략히 짚어볼까?

서구에서 역사라는 말이 단독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그 이전 시기, 역사란 철학의 일부였다. 역사는 문학과 철학, 신학 속에서 논의되었다. 서구 중세 사회에서는 교회의 말씀이 곧 역사로 편찬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겪는 오랜 시기 동안, 역사는 철학자들의 소재거리에 불과하였다.

역사라는 학문이 대중화 된 것은 19세기 <랑케> 학파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철학과 분리시키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공적 자료>를 이용해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만 역사로 규정하였다. 과거의 중요한 사실을 중요한 자료를 통해 분류한 뒤 사실 그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중요한 이야기를 <인과관계>를 적절히 활용해서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구성하면 역사가의 임무는 끝난다. 철학자들처럼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역사에서 금기시 되었다. 이것은 역사를 철학, 문학과 분리시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역사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그대로 주입받아서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것도 객관적인 자료를 활용하다보니, 국왕이나 지배층이 겪었던 자료들을 위주로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과거, 우리 교과서가 조상들의 이야기를 지배층 이야기와 동일하게 설정하여 쓰고 있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그나마 랑케 사학은 역사가 흥미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놓은 방책이 있었다. 역사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연결하여 이야기로 꾸며진 역사는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수많은 수람들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초창기 역사학의 한계점은 명백하였다. 역사는 철학도 문학도 아니기 때문에 <너의 생각을 역사에 집어넣으면 안된다>는 금기가 있었다.

3. 20세기의 아날 사학 : 사회과학의 힘으로 역사를 증명한다!

20세기 역사학은 랑케사학의 금기를 깨어 버렸다. 역사학에 여러 다른 학문을 첨가시켜서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깨 버린 것이다.

20세기 역사학의 큰 흐름은, <모더니즘>이었다. 현대화를 이룬 과학과 사회학의 힘으로 역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역사는 어느 순간, 근대화를 이룬 근본 구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의 이야기>를 논의하는 것은 20세기의 시대적 요청과 거리가 멀었다. 이제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을 다룬 <사회 구조>가 역사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과학적 방법이 역사에 동원되었다.

고고학과 지질학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연결해주었다. 경제학은 경제사를 지원해주었고, 사회학은 인류발전의 보편적 특성과 사회 발전의 법칙을 제시해 주었다. 문화인류학은 정치사 뿐 아니라 문화사도 역사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모든 학문의 모든 자료가 역사학의 자료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역사학은 <다른 학문의 과거사>와 자료를 공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체적인 인류 발전 자체를 역사로 생각하다보니, 정착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 하나 하나>의 이야기를 잃어 버렸다. 시대구분이니, 과학적 접근방법이니 하는 방법론들은 역사가 정말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학의 정체성이 뭐냐>라는 의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역사학의 경계인가? 정치보다 사회를, 개인보다는 집단을, 이야기보다는 구조를 중요시하는 역사학이라면 차라리 사회과학이 아닌가?

20세기 역사학을 대표하는 아날 학파를 한번 보자. F.브로델의 <지중해>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의 저서이다.

지중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서 혼자 살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집단 속에서 살아야 하며, 당대의 유산이 후대에 계승 되어야 인류 발전이 지속된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들은 전체적인 사회 구조 속에 소속되어 맞춤형으로 살아가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면, 그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조그만 발견으로 생활의 어떤 부분이 바뀌게 된다. 집단에 속한 누군가의 특이한 행동으로 또 조그만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들이 긴 시간 반복되면 사회 구조는 알게 모르게 변해 버린다.

즉,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일상적인 변화가 전체를 바꾸고, 집단을 바꾸는 것이다. 20세기의 <물질문명>은 <지중해의 삶>과 같다. 그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연구 성과를 축적해야 하는 과학적 방법이 필요하다.

결국 아날 학파가 생각한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찾고, 사회구성원간의 관계를 집단 속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 구조 속에는 변화의 맥락과 법칙이 숨어있기 때문에, 역사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찾아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얼마나 재미없는 것일지 상상해보라. 이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이지, 대중들이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은 아닌 것이다. 대중들이 역사적 사건 하나를 파악하기 위해서 모든 사회과학적 이론들에 접근해야 하는가?

물론, 역사가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대중에게 전달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역사적 연구성과를 직접 비판할 수가 없다. 너무 권위있어 보이기 때문에, <와~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었구나~>라고 감탄하고 끝내야 한다. 역사학자들이 거짓말을 한다 해도 우리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역사학자들은 과거에 대해서 만큼은 하나님이요, 교주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눈높이가 있는 대중들은 누군가가 써 놓은 역사 법칙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왜 그 역사가 그 법칙으로 설명되는데?

역사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대학교에서도 역사학은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과연 역사가 하나의 <법칙>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과학>인 것일까?

역사를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근대화 과정에서의 믿음, 그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던>인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말한다.

무엇을 근거로 법칙을 말하는가? 무엇을 근거로 그 과거가 진리라고 말하는가? 당신이 살아본 과거도 아닌데, 그 과거의 어떤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 누가 아는가? <교과서>와 같은 지침서도 과거를 살아본 적이 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견해로서 써 놓은 것이 아닌가?

그 결과 모든 역사적 사실은 부정된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진실일 수 없다.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닌 과거를 진실인 양 써놓은 모든 <교재>들은 비판의 대상일 뿐, 진리의 대상일 순 없다.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보자. 포스트모던은 왜 이런 주장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 문화산업은 왜 포스트모던이 제시한 <역사의 허무주의>를 옹호하는 것일까?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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