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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1) - 황하문명이 절대적인 문명이었는가?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1)

황하문명이 절대적인 문명이었는가?

1. 토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가장 애착을 갖게 된 사유 재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토지일 것이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생산력에 관련된 문제는 농경을 주로 하는 동아시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생산력의 발전이 곧, 그 사회 경제력의 척도였기 때문에 국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는가는 <토지를 어떻게 장악하는가>에 달려있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연재될 이야기는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와 세금제도, 그리고 토지와 관련된 국가와 지배층 간의 알력싸움, 지배층과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는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의 토지제도를 설명하겠지만, 농경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면 유목민족의 토지 소유 방식도 조금은 다뤄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종교이야기, 포스트모던이야기와 더불어 2009년에 계속될 핵심 연재물이 될 것 같다.

자, 그럼 오늘은 간략한 소개글만 한번 적어보도록 할까?

2. 황하문명이라고? 누구 맘대로?

자, 토지제도를 이야기하기 앞서 <토지제도>라는 전근대 생산소유양식을 가능하도록 만든 <농경생활과 문명>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해보자.

인류의 기원과 관련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유럽-아리안 계통>과 끊임없이 싸워왔단다. 그 이유는 유럽인들이 <유럽-아리안> 계통의 석기 문명이 동아시아보다 우월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림 : 세계4대문명, 앤더슨은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문명에서 황하문명으로 채도가 넘어왔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아리아 계통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서구 제국주의 역사관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채도란 채문(彩紋)을 한 도자기를 말하는데, 채문이란 붉은빛 등의 색상으로 무늬를 입힌 것을 말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문화가 존재한다고 해서 서쪽에서 건너왔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채도>라는 말 대신 가지무늬 토기, 혹은 칠무늬 토기라고도 부른다.

최초의 문명 탄생지역인 세계 4대 문명에서 동아시아의 문명은 <황하 문명>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황하문명의 기원이 서아시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특히, 서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 검고 붉은 채도형 토기들이 서아시아 양식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찍개, 찌르개 등의 도구 역시 서아시아의 도구가 동아시아의 도구보다 우월하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 중국문명은 단순한 황하 문명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 문명>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전에는 <황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이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다. 그 이유는 황하의 황토 지역이 석기로 개간이 가능할 만큼 물렁했기 때문이다. 농사에 편리한 물도 많고, 물고기 잡이나 사냥, 열매 채집 등이 동시에 가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설이 뒤집히고 있다. 중국에는 요하강도 있고, 양자강도 있다. 관개농업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문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연구가 계속될수록, 남쪽의 양자강과 북쪽의 요하강에서도 같은 시기에 농경이 이루어졌으며, 문명이 발생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중국인들은 양자강 일대가 동아시아 벼농사의 기원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내몽골 지방과 요녕지방에서도 농경 유물들이 다수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한반도와 일본의 농경 연대도 계속 올라가고 있다.

링크 - 한겨레 기사 : 한반도 토기가 시베리아에 영향을 준 것일수도...

결국, 동아시아에서의 <황하 문명>이란, 동아시아 최초의 기원이 되는 문명이 아니라 다양한 동아시아 문명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과거 중국인들이 다양한 문명을 대표하기 위해 내세운 황하 문명을, <동아시아 전통 문명>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고대 문명은 <황하 문명>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다. 황하강, 양자강, 요하강에 걸친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대에 여러 문명이 존재하였으며, 그것을 대표하는 문명이 황하문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을 황하 문명으로만 인식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후대 역사 자료에 근거한다.

한반도의 구석기, 신석기와 청동기 문명, 심지어 철기 문명까지의 모든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은 우리 초기 국가들의 몇몇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도 <동이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명 형태가 아닌 <동쪽 오랑캐>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그것은 한반도와 만주, 요동지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몽골지방의 문명은 아예 기록 자체도 없으며, 양자강 이남의 역사도 사마천의 사기 이전까지는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분류되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황하문명은 훗날 <한> 왕조로 통일되면서 <중원>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이들이 기록한 절대적 문명이었다. 춘추시대 오, 월, 한 등의 남방국가는 <중원>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오랑캐 문명으로 인식되었고, <치우>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기록은 <황하>의 승리를 말하고 있지만, 유물과 유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각 지역에서 다수 출토되는 농경 유물과 유적지의 수준은 <황하>와 다른 지역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세계 역사를 단순히 서구역사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문명>은 서쪽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서쪽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된 최초의 문명이 동아시아 황하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는 가장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맞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문명 자체가 <황하>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황하>가 다양한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자>라는 것과, <황하>에서 모든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은 완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은 이 점을 이야기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다음 장부터는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의 토지제도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중국의 토지제도를 통해 동아시아 토지 제도에 등장하는 기본 용어들을 정리하고, 우리 조상들의 토지제도와 조세 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룬 뒤, 일본의 토지 제도를 우리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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