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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수능 근현대사 정리 13 :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노력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에 의해 빼앗긴 빛을 되찾아왔다. 광복과 독립, 우리 민족이 약 34년 동안 갈망해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사의 역사 구분에 의거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를 근대사(近代史)로, 8. 15 광복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현대사(現代史)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편의를 위한 구별이며, 단순히 딱, 하고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8.14은 근대이고, 8.15는 현대로,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사적 특징에 해당하는 민중의식의 성장 등은 이미 근대 후반에 나타나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Tip : 역사는 흐르는 것으로 칼로 무를 자르듯이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한 유명한 중국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는 연대표에 '/' 대신 '~' 으로 연대를 구분했다고 한다.

29. 대표적인 건국 준비 운동의 성향과 건국 구상
  광복 이전부터 여러 독립운동 단체나 임시정부 등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질 나라에 대해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하 노력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단체들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김두봉의 조선 독립 동맹, 그리고 국내에서 여운형 등이 결성한 조선 건국 동맹들을 꼽아볼 수 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위기를 구한 김구가 결성한 1940년에 결성한 한국 독립당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국 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1941)하고, 이듬해인 1942년 나머지 조선 민족 혁명당의 군대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가담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앞서 설명하였다.(* Tip : 무장독립투쟁 참고)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보통 선거(정치적 평등),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경제적 균등), 의무 교육(교육적 균등)을 주장하였다.

 2) 조선 독립 동맹
  중국 국민당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북상하여 화북지방에 있던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어서 조선청년연합회를 근본으로 화북에서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의 산하 군대인 조선 의용군(1942)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공화정)을 수립하고, 일제가 관리했던 재산과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관리하며(국유화), (하루) 8시간 노동제, 의무 ․ 무상 교육을 주장하였다.

 3) 조선 건국 동맹
  조선 건국 동맹은 국내에서 여운형이 결성하였다(1944).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재빠른 활동이 가능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하여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일제의 망령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해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 참고 : 사회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독재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과도기로 인식한다.)
  이들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이러한 자주적 건국을 위한 노력에 미군정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또한 지도부가 좌익 중심으로 선출됨에 따라 대다수의 우익인사는 단체를 떠나기도 하였다.

Tip. 건국 준비 주요 단체 주장의 공통점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제 정부 수립
주요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료1)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2.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여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 아동 전부의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 선거 제도가 구석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이하 생략)
  6.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 정책을 집행함.
   가. 대생산 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 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城市), 공업 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혹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함.

(사료2)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선언과 강령
  (전략) 조선 전 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 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이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30. 광복과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1) 광복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 전부터 많은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일제로부터 독립을 여러 차례 협의한 바가 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최초로 거론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그 의견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독립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자주적인 방법(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광복에 대하 수동적인 입장이 될 것이라던 김구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견해는 후에 미 군정기에도 맞아떨이지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무수한 노력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의 조선 건국 동맹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되어 자체적으로 질서유지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이 광복 이후에도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구실로, 소련과 협의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을 제안하였고, 소련도 이를 승락하였다. 이는 훗날 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2)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각각 점령하게 된 미국과 소련은 군정(軍政)을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판이하게 다른 통치양상을 보였다.
  우선 남한에 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일체 부정하였다.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한 조선 인민 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미국은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열의 인사들은 정부단체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면, 미군정은 앞서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였던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여, 온갖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 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겪고 있는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에 불씨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친미파로 변모한 친일 인사들(친일 기업가, 지주 : 송진우, 김성수 등) 등으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을 지원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남한에는 우익세력 이었던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들을 무시당하였다. 특히 조선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으로 개편 등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하였다(고는 하지만, 거의 식민통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직속기관인 ‘신한회사’를 만들어, 그동안 일본인에게 소유되었던 재산을 관리하였다.( * 참고 :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한회사는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던 토지들을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1/3의 값싼 소작료에 지급하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과 소작료의 추가 인하, 그리고 금납제를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갈등은 겪었다.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 등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 시장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상인과 지주들에 의해 매점매석으로 인해 미곡과 물가가 폭등하였다. 후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여 쌀을 거둬들이려고 하였으나, 춘궁기에 생산비도 안떨어지는 허접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인다는 그들의 방침은 농민들과의 갈등을 커져만 갔다.
  또한 실업자의 증가 등의 문제로 미군정의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9월 미군정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대구 등 여러 민중 봉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쌀 공출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 토지 개혁, 미군정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군정은 미군정에 비해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것은 아니여서, 조만식 등이 있던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해야만 했다. 대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결성(1946)하고, 이 인민 위원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할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정기에도 많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었다. 이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 반대를 하였던 유산가 계층은 남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무상분배 된 토지는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요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였으며, 남녀 평등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북한은 이 무렵 친일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Tip. 정치 양상
좌익 : 박헌영, 김일성
중도 좌익 : 여운형, 김원봉
중도 우익 : 김규식, 안재홍
우익 : 이승만, 송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