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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1. 영화 쌍화점?

유하 감독이 만든 쌍화점이 극장가에서 화제라고 한다. 19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작품은 머리 아파서 잘 보지 않는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과 한국 정치 상황을 <무림>이라는 코드로 때려맞춰 만든,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박정희가 무림최고수, 무림인들이 먹는 금단의 술 <에이주 AIZu>, 5.18을 풍자한 듯한 무림의 난?.... 뭐 그 정도 껴 맞추기 수준?

압구정동이나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이슈가 앞선 감독이었다. 쌍화점에서도 동성애 코드에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일단 보고 와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해야 하니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건가?

영화 쌍화점이 히트 상품이라니까, 쌍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야겠다. 고려의 왕들이 과연 동성애자인가?

2. 무신보다는 몽골쪽을 택했던 원종

영화 쌍화점은 어느 왕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그랬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포스트모던 코드를 지향한다. 왜냐면, 역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 역사를 차용한 것 뿐이니까...

그럼 실제 역사에서의 쌍화점은 어떤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을까?

<쌍화점>이라는 고려 가요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최초로 <충>자 항렬을 사용한 <충렬왕>부터이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몽골에 저항하던 최후의 세력인 삼별초가 완전 타도된 직후, 왕이 되었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은 몽골에 항전한 <무신정권>을 뿌리뽑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쪽에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1264년 몽골에 가서 몽골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서 고려가 망하는 것만큼은 방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국내 무신들들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무신 임연을 시켜 실세인 무신정권의 김준을 죽여 버렸고, 다시 임연을 죽이려다가 왕에서 쫒겨났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몽골의 원조를 위해 원종은 동녕부(서경을 비롯한 서북부 영토)를 몽골에 바치기도 하였다.

몽골과 마지막으로 항전을 준비한 임연과 무신들은 결국 원종과 몽골(원)의 연합부대에 밀려, 결사항전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삼별초의 최후 항쟁>이다.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에서 모두 제거당하자, 몽골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 원정을 위한 비용을 고려에 전가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 고려의 부녀자들을 몽골에 보내기 위해 결혼도감을 만든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문란해졌고, 부모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린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기 시작한다. 

   원종이 삼별초를 제거한 직후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예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자를 붙여 <충렬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충>자 돌림의 왕들...

왕이 된 충렬왕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왕비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신하들 역시 친원파들이 대세였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었다. 몽골은 1대 징기스칸 - 2대 오고타이에 이어 다시 칸을 뽑아야 했는데, 고려 원종은 후계구도에서 멀었던 비주류 왕족 쿠빌라이를 적극 밀어주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도움을 받아 <원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고려는 망하지 않았지만, 충렬왕은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종>을 붙이던 왕호는 <충>자가 붙은 <왕>으로 격하되었다.

황제국의 예법은 부마국(사위국)인 고려에 적용되었다. 태자는 몽골이, 세자는 고려가 사용하였다. 왕을 칭하는 <짐>은 몽골이, <고>는 고려가 사용했다. <폐하>는 몽골이, <전하>는 고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은 원종이 실시했던 <전민변정도감> 사업 등 토지개혁을 하면서 친원파에게 소극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조그만 반항만으로도 친원파들에게 크게 찍히고 말았다. 충렬왕의 유일한 보호막인 몽골 부인이 죽자 마자, 충렬왕은 바로 폐위당한다.

충렬왕 24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충렬왕의 아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유명한 <충선왕>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충렬왕보다 더 친원파들을 미워했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의 황태자인 친킴 가문의 공주였다. 충선왕은 대놓고 몽골 공주를 구박하였다.

여기서 쌍화점의 줄거리로 알려진 <바람피우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다. 충선왕은 부인을 구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워 5명의 첩과 비를 두었다. 특히, 몽골의 천한 여자인 <의비> 등과 바람을 피워 몽골 공주를 자극하였다.

실제로, 27대 충숙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의비가 낳은 아들이다. 거기에 친원파들이 아닌 신진 유학 세력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개혁조서>를 발표해 버린다. 그 개혁조서는 친원파들의 불법점유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 아버지 충렬왕은 다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거나, 바람 피는 것을 묵인하였고, 심지어 며느리인 몽골 공주에게 이혼과 재가까지 권유하였다. 몽골 공주는 충선왕에 맞서 계속 맞바람을 피웠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결국, 원나라 왕실은, 충선왕을 단 4개월만에 다시 짜르고, 충렬왕을 왕으로 재즉위 시켰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마저도 적으로 돌린 충렬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아들의 개혁정치를 뒤로 하고...

충렬왕 본인도 개혁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충렬왕도 초기에는 능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원나라에게 패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영토 수복도 원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혁정치를 무산시키고 다시 왕이 된 이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불교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치보며 바람을 피웠지만, 이젠 눈치볼 사람이 없어졌다. <쌍화점>이라는 속요가 원래 민간 속요였는지는 모르지만, 늙고 할 일 없는 국왕이 즐기기에는 딱 좋은 뮤직컬이었다.

쌍화잠이 처음 궁중에 들어온 것은 충렬왕 5년부터였고, 충렬왕은 이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을 궁궐내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인 공연을 찾았고,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후에는 거의 공연에 미쳐산 듯 하다.

일설에는 충렬왕의 신하인 <오잠>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쌍화점을 뮤직컬로 개편하여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잠이 누구일까?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그는 고려라는 나라를 원나라에 바치자고 말한 <입성운동파>였다. 입성운동이란, 몽고의 행정단위인 <성>으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것과 같다.

이 입성운동은 공민왕 직전까지 집요하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친원파 입장에서는 까질한 고려왕에게 아부하는 것보다는, 몽골 부족에 편입되는 것이 더 빠른 출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입성책동운동은 <원나라>가 거부하였다.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게 넘기자는데, 부시가 거부했다고나 할까? 이유는, 명분과 실리 때문이었다.

고려를 원왕조로 편입한다면, 삼별초의 40년 항쟁을 책임져야 했고, 끔찍한 내란이 일어날 경우 뒷감당도 해야 했다. 또, 고려를 자주국으로 둔다는 것은 고려에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칸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 입장에서는 고려를 편입해서 제국화하려는 시기가 아니라, 점령한 중국인들에게 신경써야할 시기였다. 이 입성운동을 행했던 일파는 훗날 공민왕이 시시비비를 따져 척살해 버린다.

아무튼, 친원파 오잠은 쌍화점을 국립 뮤직컬로 만들어 버리곤, 왕의 총애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5. 쌍화점은 변태적인 궁정 공연일까?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 / 그 절 사주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번지면 / 조그만 어린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 그 집의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바가지야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쌍화점은 궁중악 대본이었고, 실제 공연은 기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자배우들이 노래, 춤, 미모 등을 뽑내며 남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으로 단순히 <동성애 코드>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풍이 몽골에 유행했듯이, 몽골 양식이 고려에 유행하였다.

   남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변태적 취미라고 몰아붙이기에도 이상하고, 일상적인 동성애 코드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몽골인들도, 그들과 다른 고려의 사냥술 등을 새로운 문화인 양 받아갔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궁중악으로 연출되기 위해 대화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명이 <만두 사러 갔더니 내 손목 잡더라>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나도 가고 싶어..> 하는 식으로 되받고, 후렴구를 같이 노래하는 형식이다.

원래 이 노래가 민중 속요에서 비릇된다고 볼 때는, 왕궁은 우물, 왕은 용 등으로 풍자해서 혼란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짓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지배 속에서 충렬왕 때만 혼란한 시기였을까? 충자 돌림의 모든 왕들은 개혁정치와 자주정치, 그리고 친원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25대 충렬왕은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혁을 실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살았고, 26대 충선왕도 아버지가 죽은 뒤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친원파들이 제공(?)한 미녀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고뇌했다. 심지어 유학자 이제현은 충선왕이 사랑한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창녀와 다를바 없이 즐기고 산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하면서 왕의 여자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였다.

27대 충숙왕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몽골 공주와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없이 몽골 공주를 때리고 구타했다고 한다. 몽골 공주가 골병들어 죽자 17살의 어린 몽골 공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공주도 어린 나이에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결국 충숙왕은 몽골 여인들을 학대한 죄로 왕에서 쫒겨나게 된다.

28대 충혜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고려 여인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몽골의 정권이 바뀌자 빽없는 충혜왕은 쫒겨났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충혜왕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훗날 다시 왕이 되어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성폭행하고, 외숙모, 황태후도 욕보인다. 결국 충혜왕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원에 압송당하였는데, 가는 길에 쓸쓸히 죽어 버린다.

충혜왕이 죽고서, 고려의 왕은 친원파가 선출하는 분위기였다. 충목왕, 충정왕은 나이 어린 꼬마였고,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원에서는 친원파 기철의 누이가 <기황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친원파 세상이었다.

이 때 등장한 공민왕은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지만, 원의 노국대장공주와 원의 수도에서 정략결혼을 함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전의 왕돌과 다르게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몽골 공주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 공주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할 정도였다고 한다.

왕호에 <충>자를 사용하는 저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공민왕은 드디어 <충>자 왕들을 따라다녔던 <몽골 여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몽골 공주 외에는 몽골 여인이 없었으며, 유력 신하들과 신돈의 딸만을 귀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혼란한 시기가 서서히 끝나면서, <충>자 돌림 왕돌의 엽기적인 행각도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 <충>자 돌림 왕들의 행적은 <남녀상열지사>로 기록되어 나쁜 왕의 선례로 거론되었다.

  쌍화점은 단지, 충렬왕 때의 엽기적인 행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충>자 돌림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던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토록 몽골 여인이 싫었을까? 몽골 공주들은 부인이 아니라 원의 황제가 보낸 감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실제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자 돌림의 왕들처럼, 왕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왕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어떻게든 원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다. 친원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자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만 물러가면 만주와 요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어두운 시기를 참고 견뎌내었다.

  고려 전시기를 통털어 각종 제도 개혁을 가장 많이 발표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 세력이 태동한 시기도 이시기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개혁은 모두 원나라와 친원파에 의해 실패했으며, 그들은 좌절감에 묻혀 살았다. 몽골 공주에게나 한풀이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행적은 <엽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남겨진 <고려사> 등의 기록은 그들을 방탕한 왕으로 기록하였다.

  언젠가는 공민왕이나 신돈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충>자 왕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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