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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이가 <성골>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골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성골>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 일까?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용어일 뿐이다. 그럼 그 얼마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나온 <구분법>들을 총정리 해보도록 하자.

2. 신라의 건국과 <신성한 탄생>

자, 그럼 성골, 진골이라는 표현 방식부터 생각해보자. 성골(聖骨)이라는 말은 말 그래로, <성스러운 뼈대>라는 뜻이다. 진골(眞骨)이야 뭐, <진짜 뼈대>라는 뜻이겠지. 일단, 이 단어들은 모두 <뼈대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지배층>의 단어인데, 그 시작은 어떻게 될까?

먼저, 신라의 건국 시대로 올라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이민족인 혁거세를 기존의 신라 집단이 받아들여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이야기 역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화랑세기의 사료는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보려고 한다. 일단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원본이 없고, 일제시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 원본도 지금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사본도 지금 위작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박창화>라는 사람이 일제시대에 음란소설이나 위작도서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아마추어 소설가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박창화>라는 인물의 생애와 글쓰기 능력 자체가 논란이 되어, 화랑세기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는 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일단, 사로국(신라의 초기 명칭)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처럼 절대 강자가 등장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신라의 전신인 삼한 시대의 진한에는 <여섯 마을(6촌)>이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를 각각 <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고허촌의 촌장을 <도리>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철기 연맹체 국가>였다.

철기시대에는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맞게 국가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섯 마을이 같이 뭉쳐 세운 연맹체가 <진한6부>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사람>이었기에, 공동의 왕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 용(계룡)이 나타나 여자 아이를 낳으니, 그녀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짓고,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계룡의 우물(계정)에서 태어나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지었고,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스로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라의 시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성한 인물>이 왕이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신성한 왕, 왕비, 그 직계 혈족>을 성스러운 존재(성골)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골>이라는 말 자체가 최상위 지배층을 말하며, 성골이라는 관념은 이후 <계림>에서 후대 왕들이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3. 진한6부가 <골>의 시대로...

초창기의 진한6부를 다스렸던 세력은, 여섯 마을의 지배자였던 <간>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부른 것은 <간들 중에 대표적인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초창기에는 <간>들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진한6부가 <연맹체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의 군장,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던 6부의 지배자가 <내물>시대에 <마립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씨만이 왕위 세습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립간>은 교과서에서는 <대군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간들을 지배하는 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진한6부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간>들의 마을을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국왕의 신하로 복속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서라벌>이라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주변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자료가 적어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서서히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골품제가 등장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골품이라는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정해진 신분제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한번 정리해 볼까?

4. 골품 제도의 변화와 <진골> 용어의 등장

골품제도는 말 그대로 <골족>과 <품족>을 나눈 제도이다. <골족>은 일반적인 학설로 본다면, 신라 초창기 지배자들인 화백회의 6부족의 지배자, 즉 <간>이라는 마을의 지배자를 최고지배층인 <골>로 인정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부족의 관료층이나 행정실무층들은 그 능력에 따라 <품>으로 규정하고, 1,2,3,4,5 품의 5단계를 기준으로 <품>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그런데, 골품제는 초창기 진한6부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서라벌>에 거주했던 진한6부의 <간>층과 그 일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관등을 12등급으로 나누어, 골족과 품족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선을 명확히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지증-법흥-진흥>으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많은 부분이 손질된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면서 골품제를 다시 만든 왕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하려고 했던 왕이다.

특히, 법흥왕 때의 변화가 주목할 만 하다. 법흥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다시 개편하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12관등이었던 신라관등제도를 17관등으로 넓히고, 신라의 왕이 곧 <부처의 일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을 신라사회에 도입하였다.

이 때 신라의 <골>족들은 1-17등급으로 분화된 신라 지배 관등 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넓어진 신라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골>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골>족 사이의 분화가 생겨서 <진골>이라는 차별화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 학설은 진골이라는 용어가 내물왕 때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1-5두품밖에 없었던 신라에서, 새로운 관등에 적응하고, 새로 등장한 <진골>족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품>족들이 생기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품>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은 법흥왕대부터 삼국통일전쟁이 있던 시기에 새로 생긴 <품>이었다.

5. <성골> 용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문제

법흥왕 다음 등장한 <진흥왕> 때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국왕의 신성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진흥왕이 거칠부를 통해 편찬했던 역사서가 바로 <국사>였다. <국사>에서는 <성골>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칠부는 모든 신라왕들을 <성골>이라고 규정하고, 성골들에게는 어떤 <신성함>이 있었는지를 서술하였다. 즉, 국왕은 새로 등장한 <진골>이라는 계층보다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고대 왕들의 <신성관념>이다. 즉, 왕들은 성스러운 <성골>인데, 이미 성스러운 신분이기 때문에 왕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김춘추 이후의 진골왕들이 알게 모르게 강조한 <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라는 개념과는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고, 최초의 진골왕인 김춘추를 기준으로 <신라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성골>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 두었을까?

6. 전통적 주장 : 실증주의 사학

가장 전통적인 주장은, 실증주의 사학의 대표자이자, 과거 한국 사학을 이끌어갔던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병도는 이렇게 주장했다.

골품에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왕족의 혈통에서 구분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성골이면 성골, 한쪽만 성골이면 진골로 골품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모두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 공부했을 것이다. 교과서 자체가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였으니까... 왠만한 백과사전에도 이 주장이 실려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근거없는 주장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맞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이고, 어머니는 성골인 천명공주이다. 그럼 김춘추는 성골이여야 한다. 이병도는 진지왕이 패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진지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신라 성골이 다 진골이 되어야 한다.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맞는 부분이 거의 없지만 한국 사학에서는 이직도 이 분의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7. 진흥왕의 직계라는 관점

이 주장은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산물로 <성골>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흥왕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직계 후손과 방계 후손을 구별하기 위해, 진흥왕의 직계 후손을 <성골>이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는 동륜이었는데,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었고, 동륜의 손녀가 선덕여왕이다. 진흥왕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성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진흥왕의 다른 손자로 왕이 된 진지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용수와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성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의 계통을, 진골정통이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의 계통을 말한다.

여기서 화랑세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직계, 방계 구분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어머니가 신을 모시는 신당의 여사제 출신일 경우를 말한다.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바로 대원신통이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인 미실이도 대원신통(신녀) 출신이다.

반면, 진골정통이란, 신당의 족속이 아닌 <골>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합치는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성골은 아버지가 왕족인 왕의 자녀이고, 진골은 어머니가 왕족인 공주출신의 자녀를 말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은 화랑세기의 구분으로 모두 <진골정통>이다. 보통 왕은 <성골>출신에서 나오고, 왕비는 <진골>출신과 신당의 <대원정통> 출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8. 혼인 규율을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왕족 내부 근친혼에 근거한 주장이다. 신라시대에는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끼리의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성골은 왕족 내부 집단에서 혼인했을 때 태어난 왕족을 말하며, 진골이란 왕족이 다른 일반 귀족(품족 등)과 결혼해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견해이다.

예로, 무열왕은 왕족 내부 근친혼을 어기고,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밀려 족을 강등당했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긍정되어 인정받았다는 내용도 들 수 있다.

9. 왕위 계승권 분쟁에 관련된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왕족 자체가 근친혼이었으므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국왕의 직계 계승자와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순위권의 친족을 성골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왕위 계승권이 없거나, 소외된 집단의 귀족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골은 왕위계승권을 확정해 두어서 이후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 왕이 된 김춘추는 오히려 가장 확고한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가장 강력한 후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갔으며, 김춘추의 후손인 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성골>이라는 개념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골>은 왕권이 미약할 때 왕위계승분쟁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김춘추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없이 <골>이라는 명칭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성골의 개념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은, 성골의 특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골은 사실 중앙집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법흥왕, 진흥왕의 과도기 때부터 여왕집권기로서 정권이 흔들렸던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에 성골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사용된 용어이다.

10. 중국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의미없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골과 진골은 사실 큰 차이가 없는데, 중국의 황제 체제의 영향으로 왕을 <성골>로 신성화시켰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골이라는 관점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으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성골>이라는 신성한 개념을 도입하여 당나라 등 주변국의 <황제> 개념에 맞먹는 개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예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사회에서 보기 힘든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열왕 때에 성골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도 연결된다. 무열왕은 이전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여왕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명분을 찾았는데, 그 결과 그녀들을 <성골>로 추존하면서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뭔가 더 찾아내려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의견도 내놓는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여왕통치가 중국 중화사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 황제를 부인한다. 당나라의 <측천황제>도 <측천무후>로 강등시키고, 여자 황제의 통치기간을 <암흑기>로 만든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신라의 여왕 통치기를 중국이 조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성골> 개념을 만들어 <여왕통치의 정당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11. 성골은 유동적인 신분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최근 많이 인용되는 주장으로서 이종욱이 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실려있는 주장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다시 정비했다는 점을 위에 적어두었다. 그 때 법흥왕은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을 <성스러운 석가의 일족>이라고 격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골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 왕이며, 왕은 원래 <성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왕과 그 가족, 형제 등의 직계 친족들은 모두 <성골>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이들은 진골이 되는 것이다. <성골>로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새로운 왕의 가족과 형제 등을 포함한 새로운 <성골>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 외의 친족들은 <진골>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성골이란 현재 왕의 직계 후손들이 <성골>인 것이다. 현재 성골이더라도 다음 왕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되며, 왕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 때 성골들은 황궁에 거주하면서 그 신분을 유지하고, 후대 왕을 선출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게 된다. 즉,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골은 황궁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차별화 된다. 또한, 가야계(김유신계)라던가, 타국의 왕족이 흡수되었을 경우, 신라에서는 진골 신분으로 대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를 <성골남진>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더 이상 성골집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춘추를 예로 들자.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었으므로, 진지왕이 계속 왕이였다면 성골이다. 그러나 진평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직계 진척이 아니므로 진골로 격하된 것이다. 신라는 예외없이 선왕의 후손인 <성골>이 다음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상태에서 즉위했으므로, 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신라의 불교 공인과 성골의 연관성

이 주장은 성골이라는 관념이 불교전파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모든 신라왕들이 <성골>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그 주장은 진흥왕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편찬했기 때문일 뿐이며, 사실 성골은 법흥앙-진흥왕대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 왕의 신성함을 <미륵부처의 신성함>과 동일시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전 신라 시대를 지배했던 <신권>보다 강력한 힘을 불교에서 찾게 된다. 이 관념이 <성스러운 부처 일족>이라는 불교 설화와 맞물려 <성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원래, <골>은 모두 <진골>이었다. 그런데, 진골 중 일부가 <우리는 석가를 믿는 족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골>이 등장했다. 즉, 불교의 융성과 <성골> 개념의 등장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전파한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모두 진골의 진(眞)자를 이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진정한 석가모니 족속(진종설 : 眞種說)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불법왕인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고, 신라를 석가의 불국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진평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백정>이고, 그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이것은 모두 석가의 부모 이름이며, 신라 왕실의 성골들은 석가의 친척이름을 차용하였다. 즉, 다른 왕족과 다른 신성한 석가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족속(성골) 개념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13. 결국 성골이란 무엇인가?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성골이라는 족속을 정리해보자. 위의 주장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결국 성골이란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있는 자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골>은 하나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인가를 허가하는 <허가증>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라에는 <갈문왕>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왕위 계승>에 대비한 <보험>같은 것이었다.

왕은 다음 왕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다. 그런데, 왕이 자식이 없을 경우엔?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왕의 동생도 <성골>신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동생마저 죽어서 동생의 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왕의 동생도 미리 성골로서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을 해 놓아야 <왕의 동생의 아들>이 훗날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생을 책봉한 것이 <갈문왕>이라는 제도이다. 즉, 갈문왕 제도는 성골이 <왕의계승권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라의 제도이다.

성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역사책이 발견되던가, 성골과 관련된 신라왕의 무덤이나 비석이 나오지 않는 한, 성골의 실체는 영원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 뿐이다.

최근 학설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최근 학설은, <골>이라는 것을 김씨 왕권이 세습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 시대에서 찾는다. 내물왕의 후손들은 <김씨>로서 박씨, 석씨와 다른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진한6부의 <간>층, 즉 <골>들과 다른 진짜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에 와서 왕권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던 시기의 왕들은 <왕위계승권>자인 왕의 직계들과 다른 <진골>들을 구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를 위해 불교의 <석가모니 족속>이라는 이데올로기, 국왕은 원래 성스럽고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왕권 세습을 정당화하고, 왕권이 신성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진흥왕이 생각했던 <불가능한 꿈>을 이루낸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들은 <성골>이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삼국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서 백년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서들이 나타나서 더 정확하고, 확실한 <성골>의 개념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오늘 글을 정리한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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