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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구려의 식읍 제도

 

고구려의 식읍

왕이 군사를 삼도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할 때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 등을 사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사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 주어 구사자로 삼고 아들 다우는 대사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곡림에 이르렀다. 그 때 신성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를 거르리고 왕을 맞아 적을 세차게 치니 모용외가 지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고노자에게 대형의 벼슬을 더하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

선비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계책과 힘이 다하니 투항하여 속국기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내려 상주려 하니 부분노가 사양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

명림답부가 천여 기병으로 추격하여 좌원에서 한군을 물리치니 한 마라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

사료해석 : 식읍과 녹읍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7차 교과서는 식읍, 녹읍 모두 지역단위로 토지를 지급한 것으로서 그 영내의 인신적 지배가 가능하였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최근 논의에서 소장학자들은 식읍은 지역적 지배가 맞으나, 녹읍은 면적단위의 수조권적 지배라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료를 보면 공신에게 압록, 거곡 등 지역단위로 토지를 하사하고 있습니다. 공신의 대부분은 전쟁 공신이 많구요. 고대사 자료방에 들어가서 식읍, 녹읍에 대한 논쟁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