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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자료제공/초중고수업자료

모택동의 잘못된 선택

모택동의 잘못된 선택

개국지공 開國之功

치국지범 治國之凡

문화득죄 文化得罪

 공산주의를 향한 비뚤어진 이상이 빚어낸 세기의 범죄는 바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다. 현대 중국을 이루어 냈다는 등소평 역시 천안문사태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모택동의 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엄청난 혈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약진 운동운 약 3000만 이상의 아사자(餓死者)를 남겼고 문화 대혁명은 그에 못지않은 지식인들에 대한 혈풍을 일으켰다. 특히 문화 대혁명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나 청조(淸朝)의 문자의 옥과 비견할 만한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었다. 물론 그는 중화 인민공화국의 영웅이었다. 국민당에 의해 거의 몰살의 단계까지 이르렀던 공산당을 이끌고 대 장정의 투쟁을 거쳐 제 2차 국공합작을 이루었고 더 나아가 공산당의 중국을 세계의 선포하였다. 공산당의 영웅이자 부정부패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새시대를 열었던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했다. 그는 소련의 스탈린체제가 무너지고 후루시쵸프와 고르바쵸프에 이은 온건적인 수정 공산주의가 등장하자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모택동은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골수 공산주의의 장벽을 쌓았으며 국내에서 생산과 소비를 이루려는 대 약진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비뚤어진 하부계층의 열정으로 인한 거짓 성장보고와 선진기술력 부족으로 결국 수천만의 餓死者만 남기고 중국의 발전을 뒤처지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이에 책임을 지고 정권에 물러났다. 그러나 군권은 계속 유지 하였다. 모택동이 정권에서 내려왔을 때만해도 모택동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개국전 대장정으로 이룩했던 신격화는 계속 되었다. 그 후 유소기와 등소평이 정권을 잡고 난 후 뒤쳐진 중국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지식인들을 모아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내부의 지주층 혹은 상인층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중국이 다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수정 공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공산주의 종주국과도 과감히 손을 끊었던 모택동의 눈에는 공산주의의 순수함이 사라져버릴 위기였다. 그의 이상과 혁명의 업적이 물거품이 된다고 느꼈을까? 그는 공식적으로 비판을 하고 전국에 글을 쓴다. 순수 공산 혁명의 불꽃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왜곡된 모습으로 전국에 영향을 준다. 시장경제의 물결에서 도태되었던 세력들과 모택동을 영웅시하고 신격화 교육으로 성장한 어린 아이들에게 무모한 혁명의 불꽃을 당겨주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들이 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기준이나 원칙도 없이 지식인이나 지주들 혹은 부유한 자들을 처단하며 자아비판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열풍은 전국을 휩쓸었고 수백만의 중국 지식인들과 지주층 혹은 지도자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어나갔다. 사태가 겉 잡을 수 없이 커지고 국가 전복의 위기까지 일자 모택동은 군대를 동원하여 홍위병을 강제해산 시키기 시작하였다. 많은 홍위병들이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또 수많은 홍위병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비극이었다. 한사람의 시대에 어긋난 이상과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념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후 다시 정권을 잡은 모택동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바보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불만이 표출될 시기 모택동의 심복이자 서열 2위 주은래는 결단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너무 늙어 판단이 흐린 모택동을 속이고 미국의 닉슨대통령과 핑퐁 외교를 통해 나라의 문을 개방한 것이다. 속은 것을 안 모택독이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고 혁명의 동지이자 스승과 같은 주은래를 처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주은래는 얼마 안가서 노환으로 죽게 된다. 어찌 보면 모택동은 치세 말년에 주은래의 결단이 없었다면 또한번의 엄청난 혁명이나 혹은 혈풍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모택동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 이후 등소평의 재 집권은 중국을 지금의 발전된 중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비록 등소평 역시 천안문사태를 통해 중국의 공산 주의를 강력히 지켰지만 문을 개방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함으로써 매우 자유로운 수정 공산주의를 이루어 냈으며 공산당 1당 중심의 정치 지배체제도 확고히 했다.

중요한 것은 모택동에 대한 평가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모택동은 공산주의의 영웅이자 중국의 영웅이다.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의 리더십이나 2차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당의 힘을 키웠고 대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국민당이 일본보다 공산당에게 더 신경쓰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중화인민 공화국을 개국하면서 모택동은 절대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 역시 거기 까지 였다. 치국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공산 주의를 꿈꾸었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선진 기술력의 부재와 상공업의 부재는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뒤처지게 만들었고 폐쇄적인 국제외교는 중국을 더욱 고립시켰다. 그리고 그의 이상에 가까운 공산주의 이념은 국민들로 하여금 점점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선사해 주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생각지 않는 무모한 열정을 요구했고 그 결과 대약진 운동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이념에 대한 맹신은 문화혁명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을 꿈꾸게 만들 수 있는 리더십은 위대하다. 그러나 다음단계로 도약에 실패하여 다른 꿈을 꾸게 되었을 때 그 리더십은 재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