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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원광 법사 이야기

 

원광 법사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니 황룡사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설치하고 여러 고승을 청해다가 강론을 하였는데 원광(圓光)이 가장 윗 자리에 자리하였다.

- 삼국유사 4권, 의해5, 원광사학 -

진평왕 30년(608) 왕은 고구려가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함을 걱정하여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원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지으라 했다. 원광은 말했다. "자기가 살기를 구해서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이 할 일이 아니나, 빈도는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사오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씁니까." 이에 지어 올렸다.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30년 -

진평왕 35년(613)에 황룡사에서 백좌회(百座會)를 설치하고 비구를 맞이하여 강경을 하였는데 원광법사가 윗 자리에 앉았다.

- 해동고승전 2, 원광 -

사료해석 :  신라의 불교 수준은 고대와 중대 이후의 차이가 극명합니다.

신라 초기에 원광이 성실종과 열반종을 자장이 계율종을 신라에 보급하는데, 이것의 특징은 <집단지배위주의 국가불교책>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들의 불교는 백성(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백성에게 전파되기 위한 장치도 마련하지 않았으며, 불교의 목적도 왕권 강화를 위한 합리적인 수단 수준에 머문 초기 불교였습니다.

1번째 사료와 3번째 사료는 백좌도량 자체을 열게 되니 국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국사를 모셔 강연하였다는 내용입니다.

2번째 사료는 유명한 걸사표로 원광은 국왕의 땅에 살기에 국광의 명을 받들어 수나라에 글을 쓰겠다는 내용입니다.

즉, 이러한 불교의 이방인적인 행동은 신라 중대 이후 삼국 통일기에 접어들어서야 불교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대중불교화 되는데, 이것에 기여한 사람이 바로 중대 원효 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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