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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모죽지랑 이야기

 

모죽지랑 이야기

죽만랑(죽지랑)의 낭도에 득오실이라는 급간(후에 급간이 되었다는 말, 당시 급간이 아닌 듯함)이 있었는데, 풍류황권(화랑도 명단을 적은책)에 이름을 올려두고 날마다 출근하더니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죽지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물으니 어미가 말하였다.

<당전(군대책임자)인 모량부의 익선 아간(아찬)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고지기로 뽑아서 데려갔습니다. 급히 가느라고 낭에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낭은 <네 아들이 사사로운 일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다.>라고 말하였다. 낭은 떡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측근을 거느린 채 가니 낭도 137명이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거 물었다.

<득오실은 어디 있는가?> 문지기가 답하길,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니, 익선은 끝내 안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세금수취인 간진이 추화군(밀양)의 능절조 30석을 거두어부산성으로 싣고 가다가 낭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릅답게 보았다. 익선이 융통성이 없는 것을 더럽게 여겨, 가지고 있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낭의 요청을 거들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간진 절사지(세금수취인)가 말안장을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화랑일을 보는 관리)가 이 말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더럽고 추함을 씻어주려 하자 익선이 도망하여 숨으니 그 아들을 잡아갔다.

- 삼국유사 2권 죽지랑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신라 시대상에서 여러 가지를 알게 하는 사료입니다.

화랑도 명부에 오른 무리 가운데에 특정한 명칭이 보이며, 그가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노역이라고 뒷글에 나오며, 문제는 부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랑인 죽지랑이 무리를 이끌고 익선에게 득오를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즉, 화랑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죽지랑의 이야기에서 화랑의 구성은 진골 출신의 화랑과 평민까지 포함된 낭도 무리로 이루어졌으며, 귀족인 화랑이 평민출신의 낭도를 면회 가는 죽지랑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귀족과 평민의 융화 속에 계급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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