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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화랑도의 기원 - 원화, 용화향도

 

화랑도의 기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명주(강원도 강릉)에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악을 고쳐 선으로 옮기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오상과 육예와 삼사와 육정이 널리 행하여졌다.

(참고 - 오상 : 인, 의, 예, 지, 신 / 육예 : 예, 악, 사, 서, 어, 수의 6가지 과목 / 삼사 : 태사, 태부, 태보의 3가지 최고 관직 / 육정 :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의 6가지 바른 신하)

-삼국유사 권 3,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전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뽑아 300여명 이나 되는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로 인해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다시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의를 닦거나 서로 가악으로 즐겁게 하면서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현좌와 충신과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라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라고 하였으며,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의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국인이 모두 높이 섬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

공(김유신)은 나이 열다서에 화랑이 되어 다이 사람을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이를 용화향도라 일컬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

참조글 :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인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전해갔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전에는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입문(入門)·입사(入社)의 뜻인데, 이는 아마도 성읍국가시대 마을의 젊은이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에 들어가 단체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6세기초에는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함에 따라 지금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당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조정에 의해 제정된 것이 원화(源花:또는 原花) 제도였다.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원화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인재를 양성·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6세기 전반기가 되면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 나아가서는 고구려·백제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이에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에 국가는 화랑도를 정식으로 제정했는데, 이때 조정은 화랑도조직을 통해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결국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이었다.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의 이행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기간이 3년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18세의 청소년이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흔히 6세기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5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 간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화랑도가 즐긴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놀이는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그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랑도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를 미륵을 쫓는 무리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국난기에 즈음하여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하루 빨리 이상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위에 조국수호, 나아가서는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기를 약속할 정도의 사우(死友)·맹우(盟友) 관계였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에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武士道)의 화신이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화랑집단의 무사도가 화랑도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국가에 기여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약하던 시기는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 귀족, 일반 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같았는데, 그 이유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종전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전사단으로서 화랑도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화랑도의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의 성격이 강해졌다.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은 유교·불교·도교 3교의 융합에서 나온 풍류도(風流道)라고 규정한 것도 이처럼 삼국통일 후 변질된 화랑도에 대한 정의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도의 도풍(道風)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고, 민간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도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같은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조합적(歌舞組合的) 기능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화랑이라고 하면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비롯해 〈훈몽자회 訓蒙字會〉·〈속대전 續大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의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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