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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로마사 이야기 7 - 제정 로마의 신분제도와 로마 제정의 몰락과정

제정 로마의 사회 체제와 제정의 몰락 과정

1. 제정 로마의 신분제도

제정 로마의 신분제도는 크게 4계층입니다. 원로원 계층, 에퀴테스 계층, 평민계층, 노예계층이죠.

그럼 제정기 원로원을 한번 볼까요?

원로원은 공화정 초기의 귀족과 공화정기 신흥귀족인 노빌레스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전에 말했죠? 원래 이들은 귀족으로 고위 정무관직, 원로원직, 속주총독직, 군단지휘관직을 맡는 정치적 실세였죠.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확립기에 이들은 점차 황제 자문기구로 변질됩니다. 실제 로마 제국의 모든 권한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네로 등 독재적 기질의 황제를 몰아내고, 양제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황제는 원로원의 결의에 의해 선출되기도 합니다. 5현제의 첫 번째 황제인 네로바가 바로 원로원 출신의 황제입니다. 그 이후 5현제 시대에는 황제가 양자를 들일 때 <원로원의 충고>가 약간은 먹혀들었죠.

2번째 계층은 에퀴테스 계층입니다.

에퀴테스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등을 속주로 삼는 시기에 속주(식민지)의 징세청부업, 해상업 등을 통해 성장한 신흥계급이였습니다. 그들은 제정 성립 후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자문까지 하게 되면서 제 2계급으로 급성장합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자이면서, 특별한 신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원로원이 정치적인 로마의 중심계급이라 한다면, 에퀴테스는 경제적인 로마의 중심계급이였고, 이들은 특별한 신분표시의 반지를 착용하면서 노빌레스 계급과 분리되었습니다. 제정기 그들은 법관, 군장교, 속주총독, 징세청부업, 황제재정자문 등 다양한 직업에서 로마를 이끌어간 일꾼들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에퀴테스를 황제권 강화에 이용하면서 신분상승을 시켜주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원로원에게 상위신분의 명예와 위엄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에퀴테스를 더 신임하고, 국가기관의 주요 관직에 에퀴테스를 임명함으로서 실제 황제정치의 보조 계급으로 이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예로, 황제의 개인재산인 이집트 총독인 반드시 에퀴테스 계급에서 선발하여, 노빌레스의 간섭을 완전 배제하였습니다. 또, 로마로 징수한 세금의 관리 책임자, 속주에서의 식량 공급 책임자, 국왕의 친위대 대장 등은 에퀴테스 계급에서 선발하였죠.

일반평민계급은 자영농, 부유한 상인, 빈민, 무산자 등 다양했습니다. 부유한 계급은 에퀴테스와 마찬가지로 상업, 무역업 등에 종사하였고, 이들은 신분상승을 열망하였습니다. 빈민들은 지원병으로 자원하여 황제로부터 곡물을 무상으로 지급받았습니다. 빈민도 로마 시민인 만큼, 검투사의 경기 등 흥행 오락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빈민층이 로마에 불만을 가지는 것을 사전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사람 취급을 안하는 고대 사회의 특징상 가장 하위 계급입니다.(아예 계급으로 분류하지 않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거든요.) 노예는 원래 고대 사회의 특징상 착취 당하는 계급입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노예활용 정책으로 해방노예들이 황제의 사적 재산관리, 황제비서역할 등의 역할을 하면서 에퀴테스 계급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는 전형적 고대사회입니다. 로마에서의 4계급은 철저하게 신분적 위계질서를 가집니다. 그러나 신분 변동은 가능한 사회였습니다. 카스트제도와 같이 신분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노력 여하나 운이 따르면 신분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지요. 특히, 로마의 신분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분보다는 <시민권>의 개념입니다. 시민권을 가지는가 못가지는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며, 시민권을 획득한 경우에는 신분투쟁이나 맡은 소임의 중요도, 노력 등에 따라 상층계급으로 올라설 수도 있습니다.

2. 제정 로마의 경제 제도

로마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입니다. 그러나 실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에퀴테스나 노빌레스 처럼 농업과 무관한 상공업 계층이거나, 귀족계급입니다. 다수 농업농민들과 노예가 지배집단의 경제력을 지원하는 체제를 지닌 사회죠. 그러나 농민들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수많은 속주가 있어서 농민경제보다 더 큰 경제력을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로마의 평화기는 속주로부터의 정기적인 공납에 의존하는 정복사업의 결과였습니다. 로마의 평화기 속주의 농업을 바탕으로 속주 물품을 로마에 연결하는 상공업, 토목업, 건축업, 은행업 등이 융성하였습니다. 실제 로마는 러시아, 인도, 중국까지 왕래하였다고 하네요. 그러나 로마의 원거리 무역은 국가 재정에 도움은 안되었습니다. 원거리 무역의 교역품이 대부분 귀족들의 사치품인 금, 은, 비단 등이였거든요.

그러나, 로마 제국이 정복사업을 마무리하고 대부분의 유럽지역과 소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로마 제국은 내국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속주로부터의 끊임없는 지원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이젠 점령지역에 대한 치안과 수비에 비용이 쏟아져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로 들어오는 돈은 더 늘어나지 않습니다. 로마의 경제는 농업중심의 자족자족체제이므로, 속주체체가 원활히 돌아가고, 새롭게 <시민권>을 얻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토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또, 로마의 시민들은 로마의 평화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 정복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고 모든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세금납부가 가능한) 자유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로마와 속주의 구분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평화기가 끝나고, 로마의 경제는 쇠퇴기로 접어듭니다.

3. 군인황제시대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특징인 양자제도를 무시하고, 아들인 코모두스를 황제로 지명하였습니다. 가장 현명한 황제라는 사람이 자식사랑에 눈이 멀어 마지막에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지요. 코모두스는 어리석은 정치를 한 끝에, 로마의 정권은 사령관 세베루스에게 넘어갑니다. 이로서 5현제 시대는 끝났습니다.

5현제 시대 이후 로마는 재정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민족인 게르만족이 로마 영내로 계속 넘어왔고, 로마는 국경 수비를 위한 군사비가 계속 들어갔습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이러한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전 로마 제국안의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버립니다. 그 목적은 로마 시민에게만 부여되던 상속세, 노예해방세 등을 모든 사람에게 징수하기 위함이죠. 그 결과 로마는 모든 속주와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고, 로마시민만이 갖는 우월함은 사라졌습니다.

로마는 점차 혼란에 빠집니다. 특히 황제권이 약해진 가운데, 원로원마저 힘을 못쓰게 되자, 황제 자리를 실력으로 찬탈하는 군인황제 시대가 왔습니다. 유력한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옥타비아누스> 시대의 화려함을 꿈꾸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가 됩니다. 50여년간 26명의 황제가 바뀌는 초유의 혼란기가 왔습니다.

4. 로마의 위기 극복 노력

군인황제 시대의 무렵 외부적으로는 강력한 이민족들이 로마에 도전합니다. 파르티아를 대신한 사산조 페르시아(226)가 로마의 큰 위협이였고, 게르만족들도 로마를 위협하였습니다.

로마는 위기 극복을 위해 로마시민으로 구성된 정규군단에, 속주민을 마주 입대시킵니다. 카라칼라 황제 이후 속주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은 댓가로 군에 입대해야 했습니다. 또, 변경의 주민들은 군인직을 세습화시켜 버립니다. 이들이 <변경주둔군>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이 세습군인들은 원치않는 군인직과 노역을 싫어했습니다.

국경에 이민족이 쳐들어올 경우 변경주둔군이 죽어가면서 임시로 막습니다. 그 동안 로마의 기병부대가 달려서 이민족을 무찌른다는 것이 로마 제국이 구상한 병 기본 전술이죠. 그러나, 로마 제국 전역에 달려가야 하는 기병부대를 유지하는 것도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또, 제대 군인들에 대한 사회보장, 연금(토지지급)은 로마 제정이 악화될수록 더욱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로마는 이러한 제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더욱 많은 세금을 각 도시에 부과합니다. 로마의 각 도시들은 어이가 없었죠. 도시는 그 세금을 상인, 수공업자, 해양업자, 지주들에게 내라고 강요합니다. 또 지주는 자영농민과 소작인들에게 세금을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세금을 위해서 노예들은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로마는 부족한 재정을 극복하려고 돈을 마구 찍어냅니다. 이것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상공업과 도시의 재정기반을 파탄내기도 합니다. 실제, 로마 말기에 대외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과 도시기반은 로마의 이러한 정책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고 파탄나게 됩니다. 중세 초기에는 상공업, 자치도시 등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가 반대로 돌고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그리스, 로마 이후 식민지 건설과 대외 무역의 발달이라는 큰 흐름의 상황이 반전되어 중세의 역사는 <장원제> 위주의 중세 농업사회로 전환됩니다.

물론 이것이 중세사회가 농업사회인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수많은 이유 중 한가지이죠. 그럼, 나머지 이유도 알아봐야겠죠?로마의 부흥노력과 멸망, 중세사회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다음 장을 열어보겠습니다. 다음 파트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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