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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가야의 건국과 주요 역사, 사료 모음

가야의 건국과 역사

1. 가야의 건국

가야는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도 서쪽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고대 연맹왕국입니다. 그 위치는 삼한시대 변한과 거의 일치하며, 여러 소국들이 가야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면서 정치, 문화적 연대를 이루었던 소국 연합 세력입니다.

가야에는 9간(수장층)이 신인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수로와 같이 신비한 탄생을 겪은 5나라가 있어서 6가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서 대외 교역으로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는데, 특히 이들의 주요 국가 사업은 왜, 낙랑, 대방 등으로 철을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2. 전개 가야 연맹체의 형성

가야는 낙랑, 대방과 남부 왜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성장했는데, 이 중심에 해안가 국가인 금관가야(구야한국, 대가락이라고도 함)이 있었습니다. 금관국은 가야의 20개가 넘은 수많은 소국들을 통솔하였습니다. 일종의 폴리스와 같은 도시국가의 맹주국이었지요. 그러나, 금관국의 중계무역 이득 독점은 다른 가야들의 반발을 가져옵니다. 1c 다른 가야국들은 금관국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을 <포상 8국의 난>이라고 합니다. 금관국은 이 난을 막기 위하여 적대국인 사로국(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사로국은 가야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금관국을 지원합니다.

금관국은 포상 8국의 난을 진압한 뒤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영도적 지위를 확고히 합니다. 그리고 사로국과는 다시 적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전기 가야 연맹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전기 가야 연맹체가 지속된 이유는 사로국과 금관국이 서로 적대시하는 긴장감 속에서 가야국들이 금관국의 영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전기 가야 연맹체의 해체

전기 가야 연맹체가 해체된 결정적인 이유는 4c 고구려와 백제가 상호 항쟁을 하면서 양국의 경계에 있던 낙랑군, 대방군을 격파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낙랑, 대방군의 축출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상호 격렬한 항쟁이 시작됨을 의미함과 동시에, 가야에게는 무역대상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야는 낙랑, 대방 ~ 가야 ~ 왜에 이르는 동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상실했습니다. 따라서 가야는 백제를 새 교역국으로 지정하여 백제 ~ 가야 ~ 왜로 이어지는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이 새로운 루트는 신라를 고립시키는 정책과 맞물려 돌아갑니다. 백제, 왜, 가야의 연합군은 신라를 공격하였고, 신라는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견재하기 위해 신라를  지원하였고, 이 전투에서 가야는 고구려에게 참패를 당하여 금관 가야의 전성기는 끝나게 됩니다.

4. 후기 가야 연맹체의 형성

후기 가야 연맹치는 5c 내륙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이루어 집니다. 대가야(미오야마국, 반파국이라고도 불림)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풍부한 철의 생산지였습니다. 이 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역 루트를 열려고 했던 대가야가 중심이 되어 가야 연맹체는 다시 집결합니다. 또 대가야는 전기의 금관가야와도 형제국임을 천명함으로서 가야국의 정통성을 확보합니다. 이어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정통성을 인정받고, 중국과 직접 교역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5c 후반은 고구려 장수왕의 전성기로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상황상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고구려를 막는 것에 주력하면서 6c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6c 이후 고구려 세력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았고, 백제와 신라가 가야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가야국은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백제, 신라의 항쟁에서 532년 금관국은 신라에 투항하였고, 662년 대가야도 신라에 투항하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관련 사료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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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신라습격과 왜의 지원

신공 49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대구, 창원쪽의 가야국가)에 이르러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과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깨뜨렸으니,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고해진(전남 강진)을 돌아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전남 해남)를마구 죽이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9년 3월 -

사료해석 : 이 내용은 4세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글입니다. 4세기는 근초고왕이 동아시아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입니다. 즉, 근초고왕은 낙랑, 대방군이 고구려, 백제에 의해 사라진 이후 그 곳의 무역권을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와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 새로운 동아시아 교역체계를 수립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 갸야 - 왜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 신공황후기 사료는 서남해 강진과 해남 지역을 공격하여 뱃길의 주요한 거점을 확보하였다는 증거 사료로 인용되는 사료입니다. 물론 신공황후기 자체가 믿을 수 있는 사료인지 의심이 많이 가기 때문에 완벽하게 신빙성 있다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일본의 임나부 지위 인정 요청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니, 순제 승평 2년에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였다.

- 송서 권 57, 이만, 왜국 -

비가 죽자 경이 즉위하여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어 제수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 송서 권 57, 이만, 백제국 -

사료해석 : 위 1번째 사료는 5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시기에 왜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 남조와 직접 교역을 하려 했던 증거입니다. 왜는 남조 왕조들에게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인정해야 함을 강요합니다.

중국 남조의 사서에는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지는 일본 5왕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임나 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될 수도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료는이러한 일본의 중국 접촉에 대하여 백제의 견제를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백제는 집요하게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어 대중국 교역에서 백제가 주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사료입니다

가야의 멸망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곧 첫째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력과 함께 국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왕은 김구해를 예로 대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교를 내려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은 그 부장으로 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왕궁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백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 람들은 두려워 하였다. 이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구형왕은 신라와 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동기 탈지 이질금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 등과 신리에 투항하였다.

-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하, 가락국기 -

사료해석 : 가야의 멸망에 대한 사료입니다. 금관가야는 법흥왕 대, 대가야는 진흥왕 대 멸망하면서 가야국은 사라지게 됩니다.

후기 가야 연맹체의 전성기

계체 천황 7년(513) 6월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주이 장군을 호즈미노오미오시야마에게 딸려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그러면서 아뢰기를,

<반파국이 우리 나라 기문 땅을 빼앗았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은으로 판단하시어 원래 속하였던 대로 돌려주소서> 하였다.

-니혼쇼키 17, 계체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6세기 대가야의 전성기에 대가야(사료의 반파 국)이 백제를 크게 무찌르고 영토를 많이 획득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야의 확장은 신라와 백제를 자극하여 양국의 협공을 받아 가야가 망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 니혼쇼키는 백제의 대부분 기사를 백제 사신이 일본왕에게 애걸하는 듯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관점으로 편찬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후기 연맹체 대가야의 설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9, 고령현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후기 가야연맹체인 미오야마국(대가야)의 설화입니다.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을 내세운 대가야는 자기 시조가 산신과 천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통하여 전가 가야의 전성기 때 금관국과 미오야마국이 형제의 국가임을 알리고 새로운 맹주의 전통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후기 가야 연맹체를 복원하면서, 가야는 장수왕의 남하를 막고자 하는 신라, 백제와 모두 연합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려고 하였습니다.

포상 8국의 난

나해 이사금 14년(209) 7월에 포상 8국이 가라를 침입하려 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구언을 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찬 이음에게 6부병을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도록 명하여, 8국 장수를 죽이고 6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사료해석 : 포상 8국의 난은 금관국(금관가야)에 대한 가야 소국들의 불만으로 시작된 난입니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가야 내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사로국에 구언을 요청하였습니다. 진한의 맹주인 사로국은 변한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대가야를 위한 군대를 보내 8국의 난을 진압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난을 통해 가야국들은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금관국을 위주로 연맹체를 형성하여 3세기에 낙랑, 대방, 왜 등과 정치, 무역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로국에 반격을 하지만, 4세기 광개토대왕이 내려와면서 이러한 연맹은 깨지고 맙니다.

대가야와 사로국의 전쟁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 병사와 황산진(양산 낙동강 나루터로 추정) 하구에서 싸워 천여급을 얻었다.

파사 이사금 15년(서기 94) 2월에 가야가 마두성을 에워싸자 아찬 길원이 기병 천명을 거느리고 차니 달아났다.

기마 이사금 4년(서기 115)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이 정예병 만명을 거느리고 따르니, 가야가 성에서 나오지 않고 굳게 지켰다. 마침 장마가 와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료해석 : 이 사료는 금관가야의 전성기에 사로국(진한 신라국)과의 전쟁을 담은 사료입니다.

금관국 가야가 적극적으로 사로국과 전쟁을 벌이려고 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른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했었던 듯 싶습니다. 즉, 가야 사회에 긴장감과 결속력을 더하여 가야 연맹체의 영도적 지위를 더하려 하였던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종속적 관계에 대한 반발을 초래하였고, 금관 가야는 이후 주도권을 다른 가야에게 넘기게 됩니다.

가야의 중계무역

낙랑군에서 왜로 가는데 해안을 따라 한국(韓國)을 거쳤다. 잠시 남으로 갔다가 잠시 동으로 가면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금관국을 말하는 듯)에 이르는 데 7천리였다. 여기서 천리 한 바다를 처음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김해 지방의 구야한국(금관국)인 대라락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대가야는 낙랑, 대방군과 왜를 연결하는 중계무역(특히 철을 수출하였던 듯합니다.)을 통해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면서 연맹왕국을 이끌어 갑니다. 이 사료는 초기 대가야의 중계무역을 제시하는 사료로 인용됩니다.

김수로왕 설화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 이름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 여도간, 파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수장들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00호 75000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 임인 3월 상사일(음력 3월 첫 번째 뱀날)에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들렸다. 9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뒤 하늘을 우러러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줄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그릇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 여섯이 있었는데 해처럼 둥굴었다.

12일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릇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그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는데 ,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고 <수릉>이라 하기도 하였다. 나라 이름은 대가락이라 하고 가야국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 가야국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에서 임금이 되었다.  

  -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 -

사료해석 : 가야는 왜의 임나일본부 설과 맞물려 현재 관심이 증폭된 지역입니다. 가야의 위치는 현제 경상도 서쪽 지역으로 삼한 가운데 변한의 영토와 비슷하여, 변한을 계승한 것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가야는 기원 후 등장한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인데, 처음에 9간이 있었지만 하늘에서 황금색 알이 내려와 수로왕이 탄생하였으니, 이를 추대하여 대가야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러한 수로왕 같은 성스러운 이가 내려온 것이 5국이 더 있어 6가야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야국의 숫자는 사료의 6가야 외에, 변진에 12국이 있었다. 25가야가 있었다 등등 많은 내용이 서로 다르지만, 가야라는 이름을 공유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국들을 초기에 이끌었던 맹주가 금관국(구야한국)의 대가락입니다.

일본의 임나부 지위 인정 요청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니, 순제 승평 2년에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제수하였다.

- 송서 권 57, 이만, 왜국 -

비가 죽자 경이 즉위하여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어 제수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 송서 권 57, 이만, 백제국 -

사료해석 : 위 1번째 사료는 5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시기에 왜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 남조와 직접 교역을 하려 했던 증거입니다. 왜는 남조 왕조들에게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영도적 지위를 인정해야 함을 강요합니다.

중국 남조의 사서에는 찬, 진, 제, 흥, 무로 이어지는 일본 5왕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임나 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될 수도 있는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사료는이러한 일본의 중국 접촉에 대하여 백제의 견제를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백제는 집요하게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어 대중국 교역에서 백제가 주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사료입니다

백제의 신라습격과 왜의 지원

신공 49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대구, 창원쪽의 가야국가)에 이르러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과 개로를 보내 군사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깨뜨렸으니,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고해진(전남 강진)을 돌아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전남 해남)를마구 죽이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 니혼쇼키 권9, 신공황후기 49년 3월 -

사료해석 : 이 내용은 4세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글입니다. 4세기는 근초고왕이 동아시아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입니다. 즉, 근초고왕은 낙랑, 대방군이 고구려, 백제에 의해 사라진 이후 그 곳의 무역권을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와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 새로운 동아시아 교역체계를 수립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 갸야 - 왜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확보해야 했는데, 이 신공황후기 사료는 서남해 강진과 해남 지역을 공격하여 뱃길의 주요한 거점을 확보하였다는 증거 사료로 인용되는 사료입니다. 물론 신공황후기 자체가 믿을 수 있는 사료인지 의심이 많이 가기 때문에 완벽하게 신빙성 있다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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