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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간략하게 정리하는 삼국통일의 과정

삼국통일의 과정

1. 6c 신라의 성장과 백제의 부흥 노력

6세기에 신라가 성장한 배경은 551년 신라의 한강 점령입니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을 독차지했습니다. 본래 한강의 남쪽을 보장받기로 했던 성왕은 격분한 나머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흥왕을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연, 백, 사씨 등 8대성이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귀족체제가 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당항진에 당항성이라는 요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곧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는 고구려, 백제로 하여금 여제동맹을 맺게 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장수왕 시기 고구려에 크게 당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너무 깊어 이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상당히 적대적이었고, 결국 3국이 서로 국경에서 항쟁하는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백제는 무왕이 즉위하면서 일대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신라의 여러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한강 유역을 확보하지 못하여 남북으로 영토가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은 황해지방에서 고구려와도 항쟁이 심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무왕은 8대 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익산 미륵사를 창건하고 천도계획까지 세웠지만 실현하지는 못했습니다.

2. 고구려는 힘들게 버텨나가다.

고구려는 이 당시 신라의 외교적 전략에 의해 중국 수, 당을 상대해야 하는 버거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당이 건국된 후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시행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적극적인 대당 정책을 펼쳐나갑니다. 고구려는 대당항쟁을 위해 신라와의 남쪽 국경이 안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함흠평야에 대한 신라 영유권을 인정하여 신라의 침입을 일시 무마했던 고구려는, 대당 항쟁을 위해 백제를 간접지원하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즉, 신라가 고구려 견제 수단으로 당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실시했다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백제를 적극 활용한 것이지요.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고구려와의 동맹을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고 신라 공격에 최선을 다합니다. 의자왕의 공격으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지키는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품석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신라의 김춘추는 자신의 정치적지지 기반인 사위가 죽음으로서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고,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중국과의 친밀한 외교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또 고구려, 백제 양군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고, 대당 교통로이자 삼국항쟁의 중심지인 당항성을 지키려던 신라 선덕여왕은 당에 적극적인 구원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당은 여왕이 왕이라서 일어난 문제라는 식으로 신라에 딴지를 걸었고, 신라 왕을 당 왕족으로 바꿀 것을 요청합니다. 결국 신라 귀족층은 이러한 사태에 동요하였고 비담과 염종의 난으로 선덕여왕은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성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덕의 사촌 진덕여왕이라는 여왕을 또 추대합니다.

이러는 동안 중국과 고구려는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었으나, 안시성 싸움 이후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보다 후방에서 고구려를 지원하고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부터 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합니다.

3. 백제와 고구려는 사라지다.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여제동맹, 일본과의 협조을 얻고 끊임없이 신라를 압박하였습니다. 당나라는 신라 무열왕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고, 백제는 결국 계백의 황산벌 결사 전투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이것을 후에 웅진도독부와 7주로 개편합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과제를 앞두고 당의 이러한 도발적 행동을 묵인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 멸망후에도 계속적으로 중국과 항쟁하며 버텨나갔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독재로 민심은 점차 어지러워지고,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막리지에 오른 뒤에는 동생 남건, 남산의 반란 등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당은 고구려의 영토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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