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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김춘추의 대당 외교와 외교적 전환점

김춘추의 대당 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시켜 교외에서 춘추를 위로해 맞게 하였다. 춘추가 도착하자 태종은 춘추의 거동이 법도가 있는 데다 영특하고 뛰어남을보고 후히 대접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정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자기가 지은 온탕비, 진사비와 새로 찬술한 진서를 주었다. 또 직접 춘추를 불러 한가로이 만나보고 금백을 후히 주며 [경은 마음에 깊이 품은 바가 있는가?]고 물었다.

춘추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바다 한구석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를 섬겨온 지 이미 여러 해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누차 함부로 침략하더니 급기야 지난해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왔습니다. 성 수십 개를 공격해 빼앗고 조종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폐하가 천자의 군대를 빌려 흉악함의 싹을 베어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인민은 죄다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멀리 찾아와 조회하고 아뢰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태종이 정말로 그러리라고 여겨 군대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 예복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자 진귀한 의복을 내어 춘추와 종자에게 주고, 조칙을 내려 관직을 제수하되 춘추는 특진을 문왕은 좌무위장군을 삼았다. 춘추가 귀국할 때는 3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니 우대하는 예법이 극찬하였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진덕왕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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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고구려와의 외교 단계에서 정의적 측면의 외교 실패를 뼈져리게 깨달은 김춘추는 당과의 외교에서는 정의적, 윤리적 측면보다 실제 외교가 돌아가는 원리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를 도와야 할 당위성이 중국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김춘추의 외교적 발상의 전환이 당나라가 신라를 적극 돕게 되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김춘추가 신라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게 되는 전환점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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