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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삼국통일 후 민족융합정책

삼국통일 후 민족 통일 정책과 삼한 일통의식의 표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14年)  

처음에 신라는 고구려·신라와 경계가 들쭉날쭉 혼란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질하였는데, 나중에 당과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고 드디어 9주를 두게 되었다. 본국(신라)의 경계 안에 3주를 두고… 백제의 옛 영역에 3주를 두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역에 3주를 두었다.

(《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  

22일에 왕이 돌아와 논공(論功)하였다. … 백제인들도 다 그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으니, 좌평(佐平)인 충상(忠常)·상영(常永)과 달솔(達率)인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一吉瑗)의 관위를 주어 총관(摠管)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恩率)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大奈麻)의 관위를 주어 대감(大監)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弟監)의 직에 임명하였다.

(《三國史記》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 7年 11月)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그 관등의 순위는 본국(本國)에서의 관직을 보아서 하였다. 경관(京官)인 대나마(大奈麻)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한솔(?率)에게, 당(幢)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대오(大烏)는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으며, 외관(外官)인 귀간(貴干)은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선간(選干)은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상간(上干)은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간(干)은 본국의 한솔(?率)에게, 일벌(一伐)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일척(一尺)은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다.

(《三國史記》40, 雜志9 職官 下)  

신문왕 6년에 고구려인에게 그 본국의 관품(官品)을 헤아려서 경관(京官)을 주었다. 일길찬(一吉瑗)은 본국의 주부(主簿)에게, 사찬(沙瑗)은 본국의 대상(大相)에게, 급찬(級瑗)은 본국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소형(小兄)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제형(諸兄)에게, 길차(吉次)는 본국의 선인(先人)에게, 오지(烏知)는 본국의 조위(?位)에게 주었다.

(《三國史記》40, 雜志9 職官 下)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詔勅)에 답하였다. "…선왕(先王) 춘추(春秋)는 자못 현덕(賢德)이 있었고, 더구나 생시에 김유신이란 양신(良臣)을 얻어 정치에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일통(一統)하였으니, 그의 공업(功業)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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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삼한일통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후 가장 중시했던 사상으로 위 사료 등에서 보입니다. 삼국은 같은 혈통과 언어, 관습으로 묶인 공통체라는 의식을 전제한 것으로서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고 회유하기 위한 신라의 노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무열왕 7년에는 백제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배정하여 백제의 일부 지배층을 신라 사회에 편입시켰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고구려 귀족들을 신라 사회로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문무왕과 신문왕은 옛 백제, 고구려인들에게 신라의 괸직과 관등을 수여했습니다.

또 신라의 통일 후 9주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을 3주씩으로 고르게 편재한다고 하여 민족적 융합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또 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 역시 신라,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고루 편재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렇한 정책으로 삼국통일은 곧 민족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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