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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신라시대 상대등과 시중은 그 위치가 바뀌곤 했었다?

1. 원래 상대등의 개념

상대등은 신라 법흥왕기에 출현하여 신라 말기까지 있었던 관직입니다. 상대등이란 신라의 진골귀족 관료(대등)들을 총괄할 수 있는 상위의 대등이란 뜻입니다. 즉, 원래 상대등이 등장한 배경은 귀족들의 대표로서 국왕권을 견재하고 국사를 총괄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가진 직책입니다.

법흥왕대 상대등을 처음 만들 때에 상대등은 국왕과 귀족이 같이 정치를 한다는 연합적 성격의 관직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은 명령을 내릴 때도, 유력 부족과 공동하교로 명을 내렸고 국왕이 화백회의의 의결사항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국왕은 이념적으로는 초월적인 군주이나 현실적으로서 귀족의 대표 성격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법흥왕은 상대등을 설치함으로서 국왕권을 견재할 수 있는 귀족회의 의장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국왕와 귀족권이 타협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진흥왕기에 이르서 왕권이 강해지면서 상대등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왕권이 약했던 선덕여왕의 시대에는 상대등이 엄청 강했습니다. 선덕여왕은 상대등인 비담, 염종의 난으로 왕이 제거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과 상대등의 알력 다툼은 곧 새로운 세력으로서 김춘추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즉위한 후 왕과 상대등 외 제 3의 진골세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 진골계 무열왕으로서 즉위합니다.

2. 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의 상대등의 개념

무열왕이 즉위한 이후 상대등은 이제 형식적인 위치로 전락합니다. 상대등은 국왕의 입장을 대변하여 귀족세력을 통제하는 국왕권 보호 기구가 된  것이죠.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왕들은 상대등의 형식적인 지위만을 인정하면서 상대등도 시중과 같이 왕권을 위한 행정업무를 맡깁니다. 그러나 실제 업무는 시중이 다 했고, 상대등은 거의 형식적인 존재가 되었죠. 대표적인 예로 문무왕은 자신의 측근인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해 버립니다. 이것은 상대등이 시중과 함께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등의 역할 변화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와 신문왕기에는 귀족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귀족대표인 김군관을 상대등에 임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군관이 왕의 비판세력으로 부상하자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에 김군관과 그 가족을 연결시켜 모두 죽여버립니다.

3. 선덕왕이 즉위한 하대의 상대등의 개념

신라 하대의 상대등은 신라 중대의 상대등과 완전 별개의 성격을 갖습니다.

왜냐면 신라 하대가 시작된 배경 자체가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이 반란으로 왕이 되어 선덕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덕왕의 반란을 도왔던 시중 김경신이 상대등이 되었습니다. 선덕왕 김양상이 자식이 없이 죽자,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원성왕이 되어 원성왕계라는 혈통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대등이라는 직책은 다음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상대등이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 하대의 왕들은 가장 가까운 친인척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상대등의 정치적 도전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상대등이 다음 왕위계승권을 가진 자라고 인식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신라 하대의 거대한 세력은 왕권과 상대등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등과 관련된 귀족들은 왕족의 소가계를 형성하여 극단적인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 가담하게 됩니다.

4. 시중의 변천사

시중이란 신라 진덕여왕기에 행정 체제 개편을 위하여 행정 전문관료로서 왕의 직할 업무를 담당하던 관료를 말합니다. 원래 명칭이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중시였는데, 경덕왕 때 다시 행정체제를 개편하면서, 신속한 업무를 담당한다는 뜻의 시중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시중은 따라서 국왕권의 밑에서 국왕의 업무를 보좌하고 기밀사무를 담당하며, 국왕과 관련된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최고 직책을 말합니다.

시중이 처음 생긴 것은 진덕여왕 때 중국 정치를 수용하면서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진덕여왕기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면서 집사부(행정부), 이방부(법률부)를 만들었고, 선덕여왕기 상대등의 발란으로 여왕이 죽은 것을  뼈져리게 느낀 진덕여왕(선덕여왕의 사촌이였음)은 집사부의 장관을 중시로 임명하여 상대등을 견제하려고 하였습니다.

실제 진덕여왕이 죽은 뒤 강력한 왕위계승자였던 상대등 알천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친 중시계열에 밀려 왕위를 김춘추에게 양보하고 맙니다.

중시는 신라 통일기 이후 강력한 국왕 보좌 기관이 됩니다. 국가 행정 실무를 총괄하면서 왕권을 적극 옹호하는 기관이었죠. 국왕은 중시를 왕권의 방파제로 쓰기도 합니다. 만약 국정의 실책이나 국가의 재난이 있을 경우, 왕에게 돌아올 비난의 화살을 중시에게 돌림으로서 중시를 희생하여 왕권이 추락하는 것을 막기도 하였죠. 중시는 경덕왕 때 다시 한번 중국식 한화정책을 하면서 명칭이 시중으로 바뀝니다.

신라 하대의 시중은 이제 상대등 김양상의 즉위 이후, 왕권 옹호자가 아닌 귀족 대표자들이 거쳐가는 일종의 관례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원성왕 김경신은 시중, 상대등의 자리를 차례로 거쳐 왕이 되었죠. 즉, 상대등과 시중은 신라 하대에는 둘다 귀족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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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료

법흥왕 18년 4월에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로써 상대등이라는 관직이 처음 시작되었는데,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 권 38 잡지 7 관직 상편

집사성의 본 이름은 품주이다. 진덕여왕 5년 집사부로 고치고 흥덕왕 4년 집사성으로 고쳤다. 중시는 1인으로 진덕여왕 5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 때 시중으로 고쳤다. 대아찬에서 이찬까지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권 38 잡지 7 관직 상편

품주를 집사부로 고쳐 파진찬 죽지를 집사 중시로 삼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진덕왕 5년 2월

선덕왕 16년 정미에 대신 비담과 염종이 여주는 잘 다시를 수 없다. 라고 외치며 군사를 일으켜 폐하려 하였다. 왕이 이를 안에서 막아내자, 비담등은 명활성(경주 천군동)에 주둔하고 관군은 월성(경주 인왕동)에 진영을 베풀어 공방이 열흘동안 이어졌지만 풀리지 않았다. 김유신이 여러 장졸을 독려하여 분격하니 비담 등이 패주하였고 쫓아가 목을 베고 9족을 멸하였다.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편

진덕왕대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남산 오지암에 모여서 나라일을 논하였다. 이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공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메어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에 앉았으나 그래도 여러 공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삼국유사 1권 기이편 2 진덕여왕

진덕왕이 돌아가자 군신들은 이찬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고사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덕행도 없다. 덕망으로 볼 때는 춘추를 따를 사람이 없다. 실로 그는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다. 라고 하였다. 춘추는 세 번 사양한 뒤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즉위년

상대등 금강이 죽으니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정월

영묘사에 화재가 났다 경도에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중시 원훈이 물러나고 이찬 원문이 중시가 되었다.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성덕왕 2년 7월

상대등 김사인이 해마다 재이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이유로 상소하여 시정의 득실을 극론하매,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9 경덕왕 15년 2월

3월에 경도에 지진이 일어났고 4월에 또 지진이 있었다. 상대등 양상이 상소해서 사정을 극론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혜공왕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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