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한국사사료/1.초기국가사료'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32건

  1. 2007.04.23 초기 철기 국가 관련 사료 (1)
  2. 2007.04.23 위만 조선 (1)
  3. 2007.04.23 단군 설화 (1)
  4. 2007.03.29 고조선의 8조의 법과 해석 (9)
  5. 2007.01.13 삼한의 제정분리 사료 - 소도와 천군
  6. 2007.01.13 삼한(마한)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1)
  7. 2007.01.13 후한서에 나오는 삼한 기록 (1)
  8. 2007.01.13 진한의 풍속과 특징 (2)
  9. 2007.01.13 변한의 풍속과 특징 (2)
  10. 2007.01.13 동예인의 풍속 - 족외혼, 책화, 무천 등 (2)
  11. 2007.01.13 옥저의 민며느리제도 (1)
  12. 2007.01.13 북옥저인의 생활상 (1)
  13. 2007.01.13 동옥저인의 생활상 (1)
  14. 2007.01.13 부여인의 생활상(삼국지) (1)
  15. 2007.01.13 한나라의 분열정책과 삼한의 책봉 허용 (1)
  16. 2007.01.13 한사군 점령기의 법령 증가 기록 (1)
  17. 2007.01.13 한사군 설치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1)
  18. 2007.01.13 창해군의 설치에 대한 짧은 역사적 기록 (1)
  19. 2007.01.13 알려지지 않은 삼한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 (1)
  20. 2007.01.13 연의 침략과 위만의 배신 (1)
  21. 2007.01.13 위만조선 열전 (1)
  22. 2007.01.13 제왕운기의 3조선설 (2)
  23. 2007.01.13 치우설화와 단군신화는 깊은 연관이 있다... (1)
  24. 2007.01.13 조선상 역계경 (1)
  25. 2007.01.13 부여인의 생활 (2)
  26. 2007.01.13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설 (2)
  27. 2007.01.13 초기 국가들의 생할 - 고구려, 옥저, 동예, 부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2)
  28. 2007.01.13 단군신화 - 삼국유사 - (1)
  29. 2007.01.13 부여인의 생할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1)
  30. 2007.01.13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1)

초기 철기 국가 관련 사료

<옥       저>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있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자라며 농사짓기에 적당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동옥저


<동     예>

    나라가 작아서 큰 나라 사이에서 시달리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침내 고구려에게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그 나라 사람 가운데 대인을 뽑아 사자로 삼아 토착지배층과 함께 통치하게 했다, 또한 대가로 하여금 맥포(담비의 가죽), 물고기, 소금, 해초류 등 조세를 한꺼번에 모아 천 리나 되는 거리를 져나르게 하였다. 또 옥저의 미녀를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며. 옥저의 사람들을 노복과 같이 취급하였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옥저>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굿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병전을 잘한다.  음식, 주거, 의복과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예>

(1)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 구슬과 보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

(2)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곡령(목 둘레를 등글게 한 옷)을 입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

(3) 대군장이 없고, 한대 이후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를 통치하였다. .....예의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

(4) 위나라의 2군인 낙랑군과 대방군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조세를 거둘 일이 있을 때에는 예의 백성들도 마치 군의 백성들처럼 세금을 납부하게 하고 일을 시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


<마   한>

(1) 마한은 삼한 중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을 토착민으로 곡식을 심으며 누에를 치거나 뽕나무를 가꿀 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2)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토착민인 그 백성은 곡식을 심으며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았으며 면포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삼          한>

(1) 그 풍속은 기강이 서 있지 않으며, 각국의 도읍에는 우두머리가 있으나 읍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꿇어앉아 절하는 예절도 없다. 거처로는 초가에 흙으로 집을 만들어 사는데,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나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은 없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머리카락은 틀어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2)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犮)쯤 되는 나무막대기를 매달고 온종일 소리지르며 일을 하는데도 아프게 여기지 않고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이를 건강한 것으로 여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3) 왕망의 지황연간(20-22) 에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낙랑의 땅이 비옥하여 사람들이 풍요하고 안락하게 산다는 것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동네를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쫒던 사내를 하나 만났는데, 그 말하는 것이 한(韓)인이 아니었다. 이유를 물으니 사내가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이며. 내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무리 1천6백 명이 나무를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염사치가 “나는 한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고 하니 호래가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떠나 함자현에 이르렀다. 현에서 군에 연락하자 군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증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가면서 호래 등을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l천여 명을 구했는데 나머지 5백여 명은 이미 죽었다. 염사치가 이를 진한에 따져서 '너희는 6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에서 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배를 타고 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고 하니, 진한은 '5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대신 보상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진한인 l만 6천 명과 변한 포 l만 6천 필을 내어 놓았다.  

[위략]

(4) 별다른 진귀한 물건은 나지 않으며 동물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 만하다. 또 꼬리가 가는 닭이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 남짓이나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한


<변        한>

(1) 변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당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나 말을 탈 줄 알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

(2)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낙랑과 대방의 두군에도 공급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


<부     여>

(1) 옛 부여인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2) 형벌은 엄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그 집안 사람들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l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 집에서 그 여자의 시체를 가져 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한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은 흉노의 풍습과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3)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내며,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은 사용하나 관은 쓰지 않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4) 토질은 오곡(쌀, 보리, 조, 콩, 기장)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복숭아, 오얏, 살구, 밤, 대추)는 생산되지 않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5) 백성들의 호수가 8만여 호, 백성들은 지상에 집을 짓고 살며 궁실과 창고와 감옥 등이 있다.

<삼국지> 동이열전30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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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조선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고후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外臣)을 삼아 요새 밖의 오랑캐를 막아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이를 막지 않도록 하자고 하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게 되자 그 옆의 작은 고을을 침략하여 항복을 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온 사람들을 유인한 것이 자못 많았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 않으면서 진번의 곁에 있는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해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

원봉 2년(기원전 111년)에 한에서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어 달래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 근처 패수에 도착하자 부하를 시켜 자기를 배웅나온 조선비왕 장(長)을 죽인 다음 달아났다. 돌아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요동동부동위가 되었다. 조선은 섭하를 원수로 여거 요동을 습격하였다.

<사기> 권115, 조선열전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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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설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할 목적으로 바람, 비, 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곡식, 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이다.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다.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고조선조

옛적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다. 때는 요임금 첫 해였다.

누가 처음 나라를 세워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서……이름을 단군이라 하였는데, 조선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니, 신이 되어 죽지않은 까닭이다.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 데, 이름이 웅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하려는 뜻을 갖고 천부인을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여오니 이를 일어 단웅천왕이라 하였다. 환인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이 되게 한 다음 단수신과 혼인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으니 이름이 단군이었다.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제왕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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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8조의 법과 해석

1. 8조의 법

고조선의 8조법은 현재 한서지리지에 3개조만 남아있습니다. 3개조에 대한 해석내용은 이전 8조법 해석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이지만, 이 환단고기는 위작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8조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을 않을까라는 부분이지요.

사실, 고대 법들은 함무라비 법전 등을 포함하여 모두 살인, 절도, 간음, 주술, 독신 등의 인간의 기본적 범죄에 대하여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법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임은 상상력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 환단고기 8조의 내용은 고대 법인 함무라비 법전 등의 법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고대 사회의 공통적인 부분이 바로 여성의 음란함의 규제(가부장성), 신에 대한 모독(성역침해), 노동에 대한 신성함(근면과 공경) 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내용은 고대 일반법들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8조법이 남아있는 한서지리지의 원문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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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동이전 - 소도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기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하여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옳고 그름에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

사료해석 : 소도에 대한 삼국지 동이전 사료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천군, 소도의 사료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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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동이전 - 마한

마한은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민인은 토착하여 곡식을 심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며 면포를 만든다. 각기 장수가 있어, 큰 세력을 지닌 이는 스스로 신지라고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은 없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

사료해석 : 마한에 대한 삼국지 동이전 사료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마한의 사료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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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 한

삼한 78개국 중 큰 나라는 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이다.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리 이며, 동쪽과 서쪽이 바다와 접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크르모 여러 나라가 함께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으니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땅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사람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 -

사료해석 : 3한에 대한 후한서 사료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목지국의 사료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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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동이전 - 진한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된 부역을 피하여 한(韓)나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성책이 있으며, 그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며, 도적(盜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商)이라고 한다. 서로 불러 모두 도(徒)라고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한 점이 있으니 단지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를 아(阿)라고 하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처져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차츰 나뉘어 12국이 되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

사료해석 : 진한에 대한 동이전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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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동이전 - 변진

변진은 진한과 서로 섞여 있으며 역시 성곽이 있다. 입는 옷과 사는 곳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은 서로 비슷하지만 제사하는 귀신에는 다른 점이 있다.

변진은 역시 12국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가 있다. 그 중 큰 세력을 지닌 이를 신지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험측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가 있으며, 다음에는 살해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하면 모두 23국이다. 대국은 4-5천가이고, 소국은 6-7백가로서 모두 4-5만호이다. 그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복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면서 진왕 스스로 서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을 이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서 공급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 -

사료해석 : 교과서에 나오는 변한에 대한 내용입니다. 철이 생산되어 중계무역을 하였다던가, 각각 12국의 연맹국으로 구성되었다 하는 등의 내용은 모두 이 사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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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인의 생활과 풍속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대군장이 없고 한 시대 이래로 후, 읍군, 삼로라는 관직이 있어 하호를 다스렸다. 그 나라 노인들은 예로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언어와 예절과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옷차림은 다르다. 풍속은 산과 내를 중요시하여, 산과 내에 각기 부분을 만들어 놓고,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를 부리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노비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라고 하였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서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장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쓰기도 하며, 보전에 능숙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 -

사료해석 : 교과서에 나오는 무천, 족외혼, 책화 등의 내용의 증거가 되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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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 민며느리제도

그 나라 혼인 풍속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한다. 신랑집에서는 여자를 맞이하여 다 클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어른이 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집에서 돈을 지불한 뒤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민며느리제도는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교해서 생활상을 파악하시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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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옥저의 생활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이며 읍루와 맞닿아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읍루를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 바위 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뱃길을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동옥저인의 생활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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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의 생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는데, 개마대산은 큰 바닷가에 맞닿아 산다.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움루,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맞닿아 있다.

호수는 5천호인데, 대군왕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장수)가 있다.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여러 옥저 읍락 거수들은 스스로 삼노라 일컬으니 삼노는 예전에 한나라 현이었을 때 제도다. 나라가 작아서 큰 나라 틈바구니에서 핍박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한꺼번에 거둬들이게 하여 맥, 포, 어, 소금, 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였다.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동옥저 땅은 기름지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5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 성격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전을 잘한다.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매우 비슷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사료해석 : 동옥저의 생활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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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생활 2

은력 정윌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고 하였다. 이 때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국내에 있을 때 옷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족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다 여우, 살쾡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 사람은 직몰하여 노비로 삼는다. 도죽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는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은 흉노와 같다.

옛날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5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문득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7차 교과서에 제시되어 있는 부여인의 모습의 증거가 되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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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분열정책 - 삼한의 조복과 의책

경초 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 바다를 넘어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더 주고, 그 다음 축들에게는 읍장의 인수를 더 주었다. 그 풍속에 의책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알현하러 갈 때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기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예, 맥, 한족 중에 마지막으로 한족이 중국 한나라의 분열정책에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염사치 사화, 고구려의 책구루 기사와 같이 읽어보면 중국의 분열정책에 대한 내용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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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시기 법령 증가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범금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

- 한서 지리지 제 8권 -

사료해석 : 초기 고구려는 8조목의 법만 있었고, 풍속이 각박하지 않아 도둑질이 없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사회가 새롭게 개편되는데 그중 하나가 법령 조목의 증가입니다. 법 조목이 증가하였다는 자체가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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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싫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차별적인 이중구조였다고 합니다. 또 한사군은 기존 조직을 해체시킴에 있어 읍락단위로 집단적 예속을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토착세력의 공동체적 유제가 살아남아 훗날 한사군에 대한 반항의 기초가 됩니다.

한사군의 설치는 한단계 앞선 중국문물의 일반적 침투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 변화를 초래합니다. 한인들의 공적인 침탈과 더불어 개인간 한인들의 수탈적 상거래가 만연하였는데, 염사치 사화 등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예맥한족들은 이러한 정치적 압박에 대하여 저장과 선진문물 수입이라는 2가지 자구책 속에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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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군

원삭 원년에 예군 남여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서는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와서 소속되자, 무제는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으나 몇 년만에 없애버렸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논쟁이 되고 있는 창해군에 대한 내용입니다. 창해군은 중국의 한(漢)나라가 랴오허 강[遼河]의 동쪽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인데요. 위만조선의 성립 이후 고조선이 한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직접 접촉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자 한과 만주·한반도 일대의 세력들은 고조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두 지역간의 직접교역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을 중심으로 한 28만여 구에 이르는 동방 예맥세력의 일부는 BC 128년 요동군에 귀속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 사료는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한은 이 사건을 동방진출의 좋은 기회로 여겨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 등으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창해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뚫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고 공사진척도 지지부진하여 BC 126년 무제는 공손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해군으로 향하는 교통로 개척을 중단시키고 창해군도 폐지함으로써 동방진출을 포기하였습니다. 이후 한은 동방진출에 장애가 되는 고조선 세력의 제거와 이를 통한 직접적인 동방지배를 꾀하게 되었지요. 비록 창해군은 설치 2년 만에 폐지되었으나 교통로 개척공사는 중국의 허베이[河北]·산둥[山東] 일대 주민들을 동방으로 쉽게 유입하게 만들어 BC 108년의 고조선 멸망과 3군의 설치, BC 107년의 현도군설치 등 이후 전개되는 중국세력의 동방진출에 있어서 전제조건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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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에 대한 중국기록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하니, 사방 한 변이 가히 4천리 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중국)이다. 진왕이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 신이아불예구사진지렴이라는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이들 관직에는 위솔선,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 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한에는 세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삼한 땅을 합하면 사방 한 변이 4천여리로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으니 모두 옛 진국이라.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함께 그 종족을 추대하여 진왕으로 삼는데,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 왕으로 군림한다. 삼한 여러 나라 왕의 선조는 모두 이 마한 사람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 -

조선 후 준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받아 나라를 빼았기자 그 축근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 한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불렀다. 그 후손은 아주 멸망하였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3한에 대한 현존하는 중국측 기록입니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삼한에 대한 기록도 이 사료에 의거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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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변화 2

(연이 쳐들어 온 이후 뒤이어) 진이 천하를 아우름에 미쳐서는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조선왕 비가 섰는데, 진이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두려와하여 책략으로 진에 복속했으나, 조회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비가 돌아가고 아들 준이 왕이 된 지 20여년에 진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워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 갔다. 준은 이들을 서쩍 지방에 와서 살게 하였다. 한이 노관으로 연왕을 삼자 조선과 연은 추수로 경계를 이루었다.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인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홀을 하사하며 땅 100리를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거짓을꾸며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들어가 숙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결국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하였다.                    

                                                             - 삼국지 위서 위략 -

사료해석 : 기자조선이 연의 침입 이후 영토를 잃어 중심지가 이동된 이후, 위만이 망명하여 위만조선의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중국측 사료로서 사실여부의 신뢰성부터 의심이 가지만 딱히 반박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이 자료를 인용하여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인가하는 문제인데, 그것에 대한 한국사의 입장은 부정적입니다.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복장을 하였으며, 조선의 토착민족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관직 등을 유지시켰다는 점에서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관점이 더 많습니다. 위만에 대한 논쟁은 한국사 자료실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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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 고후(한나라 혜제왕 대 여후 섭정기)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외번)을 삼아요새 밖의 만이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자 주변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자못 많이 유인하였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한반도 남방의 중국, 3한의 모태)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에 한에서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달래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 위에 이르러 패수에 도착하자 부하를 시켜 자기를 배웅하러 나온 조선비왕 장을 죽인 다음 재빨리 강을 건너 요새로 달아났다. 돌아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자기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하자 천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 캐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수로 여겨 군사를 내어 습격하여 죽였다. 이에 천자는 죄인을 모집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좌장군이 양군을 합하고는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사 노인, 상 한음, 이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누선이 체포되고 좌장군 혼자 장군들을 합쳐 전투가 더욱 급하니 더불어 싸울 수 없을 것 같은데 왕은 항복하려 들지 않는다.” 하고는 음, 겹, 노인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원봉 3년 여름, 이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이가 거듭 항전해왔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강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들을달래 성이를 죽이게 하였다. 이로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삼았다.

                                                             - 사기 조선열전 -

사료해석 : 위 사료는 사기의 관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위지동이전같은 사료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사기에 나온 조선의 내용 자체가 <열전>에 포함되기 때문에 정치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동이정복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반면 위지동이전 같은 사료는 민족지학적인 관점이 훨씬 많죠.

중국의 동이정복관점에서 전쟁의 명분이라는 측면에 사기에 많이 들어가 있으므로, 이러한 사료를 비판할 때 중국입장을 생각하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진짜 그랬을까, 그랬다면 다른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중요한 사건을 누락시키지 않았을까하는 사료 비판이 첨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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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의 3조선설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상제 환인은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였다고 한다.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명을 거느려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이라 이론다고 한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니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이사달에 들어가니 신이 되어 죽지 않은 연고이다.   

                                                             - 제왕운기 전조선기 -

사료해석 : 제왕운기는 3조선설을 제시합니다. 단군은 전조선기의 시조요, 기자는 후조선기의 시조라는 것이지요. 이중 단군은 민족의 동원성, 유구성, 독자성의 상징이며, 기자는 문명화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3조선에서의 위만조선은 그 정통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즉, 전조선과 후조선의 <조선전통>은 위만의 찬탈이후 삼한과 삼국으로 정통이 이어졌다고 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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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설화와 단군신화의 관계

1. 헌원전의 기록을 옮기다

헌원이 살던 때는 신농씨가 다스리는 세상이 쇠퇴하여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베어 죽이며 백성에게 포학질을 일삼았으나 신농씨가 능히 이를정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헌원이 방패와 창 등 병장기 쓰는 법을 익혀서 조공을 하지 않는 제후를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는 가장 난폭하여 정벌할 수가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불의에 습격하여 능멸하고자 하였으나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속하였다. 헌원은 이에 덕을 닦고 병력을 정돈하여 5기를 다시르고 5종을 심어 만민에게 어루만지며, 4방을 제도하고 곰, 말곰, 비휴, 추호를 길들여서는 명제와 판천이라는 들에게 결전하였는데, 세 번을 싸운 후에야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치우가 난을 일으켜 제명을 듣지 않으니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대를 징발하여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이리하여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찬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가 곧 황제다.

2. 용어하도의 기록을 옮기다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라는 사람이 있어 형제가 81명이였으며, 몸은 짐승인데 말을 하였다. 구리로 된 얼굴에 이마는 쇠로 되었고, 모래와 자갈을 먹었으며, 전쟁에 쓰는 여러 기구와 칼, 창, 큰 활을 만들어 위세를천하에 떨쳤으나 법도가 없이 마구 사람을 죽이니 어질지 못하였다. 만민이 황제로 하여금 천하의 일을 다스려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황제가 인의로서 치우를 저지할 수 없자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하늘이 현녀를 내려보내 황제에게 군사를 움직이는 데 쓰는 신표와 신령스런 부절을 주고 치우를 제압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이를 가지고 병력을 주관하여 팔방을 제어하였다. 치우가 몰락한 뒤에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자 황제는 드디어 치우 형상을 그려 천하를 위협하자 천하가 함께 말하기를 치우는 죽지 않았다 하고 팔방의 모든 나라가 복종하였다.

3. 산해경의 기록을 옮기다

황제가 응룡을 시켜 치우를 공격하자 하자,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청하여 따르도록 하고 큰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황제는 이에 가물귀신이라는 천녀를 보내 그치게 하였다. 비가 그치자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 사기, 오제본기 -

사료해석 : 최근 학계에서는 이설이 아닌 정설로서 치우설화를 연구하려는 분위기가 많은 듯합니다. 특히 사기에 나오는 치우가 동이족이며, 그 기록의 내용들로 보아 단군신화와 연계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치우 설화에 풍백, 우사 등이 나오며, 특히 형벌(불, 벼락)과 관계있는 운사개념이 포함되면서 단군신화의 구조와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무씨사당 벽화라던가 용정하도의 치우설화 등은 더욱 그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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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 역계경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않자 동쪽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역계경을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천호나 되었으며 이들은 조선 공번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삼국지 위서 위략 -

사료해석 :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이 칭호로 고조선 시대의 <상>이라는 용어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왕이 있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상> 등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계층은 곧 고조선이 연맹왕국 단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이 있었으나, 그들이 왕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들 지배계급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읍락 내부는 이들에 의한 <점유지>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예로, 동예에서는 산천을 경계로 침입하지 않았고, 그 영역이 곧 촌락 전체에 의해 소유가 아닌 <점유>상태였다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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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의 생활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접해 있다. 북쪽은 약수가 있으며, 그 영토는 2천리에 이른다. 가옥은 8만이고, 그 백성은 토지를 가지고 있다. 궁실, 창고, 뇌옥이 있으며, 넓은 평야와 구릉이 많아 동이의 영토 중에서는 최고로 비옥하다. 토지는 오곡이 많이 나나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백성은 몸이 크고, 성품이 강인하고 용맹하고 근면하며 후덕하고, 노략질은 하지 않는다. 국가에는 군왕이 있으며, 모두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지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이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으며, 이른바 하호들은 모두 노복이다.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가 있는데, 큰 것의 주인은 수천호와 작은 것의 주인은 수백호에 이른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부여는 송화강 일대에서 반농반목으로 생활하던 국가입니다. 1세기 초 왕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중국과 외교를 통해 발전하였습니다. 3세기에 선비족(모용외)의 침략으로 국가가 흔들리면서 4세게에 고구려에 편입되는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입니다.

부여의 특징은 <가>라는 5부족 연맹장들이 사출도를 통해 지역을 다스리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서 <왕을 추대하고, 수해나 한해시 왕에게 책임도 묻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료의 궁궐, 감옥, 창고, 순장 등의 내용 등에서는 일정정도 왕의 세력도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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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제후가 있었다. 은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동쪽을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제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오히려 연을 물리치고 주왕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부인 예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또 서쪽 연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니 연도 역시 중지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의 자손들은 점점 교만해져갔다.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차지하였다. 만번한을 경계로 이르게 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요동설을 주장하였고, 실증주의 학자들은 평양설을 주장하였는데, 최근에는 초기 요동에서 후기에 평양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동설이 많은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되는 사료가 이것은데, 중국 연에게 격퇴당하는 이 시점이 고조선이 영토를 잃고 중심지를 이동하는 기원전 4세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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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국가들의 생활

고구려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과 연못이 없어서 계곡을 따라 살며 골짜기 물을 식수로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도 배를 채우기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였다. 동이의 옛말로 부여의 별종이라고 한다. 그 국가의 대가는 힘써 일하지 않으며, 앉아서 일하지 않는자가 만여구나 된다. 하호는 멀리서 곡식과 소금과 물고기를 그들에게 공급한다.

부여에는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서 동이 지역 가운데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는다. 사람들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는다.

옥저는 군왕이 없이 계속 읍락이었는데, 그 이름이 장수 등의 명칭이 있었다. 그 토지는 비옥하고 배산항해(산을 등지고 바다가 있어)하여 당연히 과일이 나곤 한다.

동예는 산천을 중시하는 풍습이 있어 신천을 경계로 각각을 구분하며,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부득이 들어갈 경우에는  소나 말로 배상하여야 한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는 각각 별도의 읍이 있었는데, 이 명칭을 소도라 하였다.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두들이며 귀신의 일을 보았는데, 설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치더라도 모두 잡아올수 없었다.

                                                                                         - 위지 동이전  -

사료해석 : 같은 초기국가라고 하여도 고구려와 부여를 보는 관점이 다른건 중국 시각에서 우리 국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사료는 우리 입장에서 다시 해석해야할 여지가 많죠. 정말 고구려인들은 흉악범이고, 부여인들은 천사같았을까요?

고대사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료를 해석할 때, 역사적 상상력을 많이 동원해야 하고 사람들마다의 해석도 많이 다릅니다. 제 해석도 제 관점에서의 해석이지 다른 사람들은 다른 해석이 나오겠지요. 너무 익히 알려진 사료들이라 해석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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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매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로 내려왔다.[즉 태백이란 지금의묘향산이다.]신단수 아래에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선악 등을 주관하고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곧 桓雄)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 桓雄)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기(忌)한 지 21일〔三七日〕만에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에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 혹은 방자(方字)로도 되어 있다.---또는 금미달이라 한다  그는 1,500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어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 9백 8세였다.

                                                                                         - 삼국유사  -

사료해석 : 단군신화는 해석하고자 하면 끝도 없고, 해석도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단군신화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은 다움과 같습니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농업이 발달하여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정복활동으로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평등사회는 계급사회로 바뀌어 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군장(족장)세력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이러한 단계의 국가를 군장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바람, 비, 구름 등을 주관하는 풍백, 우사, 운사의 존재는 이 사회가 농경사회였음을 알수 있게 합니다. 또 곡식, 생명, 형벌, 선악 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사유 재산과 계급이 분화된 사회였다는 것도 알 수 있죠. 한편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군장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조선은 제정 일치 사회라고 볼 수 있구요. 자신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는 점은 선민사상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곰 토템이 보이는 것은 다 아실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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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인의 생활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접해 있다. 북쪽은 약수가 있으며, 그 영토는 2천리에 이른다. 가옥은 8만이고, 그 백성은 토지를 가지고 있다. 궁실, 창고, 뇌옥이 있으며, 넓은 평야와 구릉이 많아 동이의 영토 중에서는 최고로 비옥하다. 토지는 오곡이 많이 나나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백성은 몸이 크고, 성품이 강인하고 용맹하고 근면하며 후덕하고, 노략질은 하지 않는다. 국가에는 군왕이 있으며, 모두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지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이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으며, 이른바 하호들은 모두 노복이다.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가 있는데, 큰 것의 주인은 수천호와 작은 것의 주인은 수백호에 이른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부여는 송화강 일대에서 반농반목으로 생활하던 국가입니다. 1세기 초 왕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중국과 외교를 통해 발전하였습니다. 3세기에 선비족(모용외)의 침략으로 국가가 흔들리면서 4세게에 고구려에 편입되는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입니다.

부여의 특징은 <가>라는 5부족 연맹장들이 사출도를 통해 지역을 다스리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서 <왕을 추대하고, 수해나 한해시 왕에게 책임도 묻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료의 궁궐, 감옥, 창고, 순장 등의 내용 등에서는 일정정도 왕의 세력도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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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제후가 있었다. 은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동쪽을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제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오히려 연을 물리치고 주왕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부인 예가 중지할 것을 간청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또 서쪽 연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니 연도 역시 중지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의 자손들은 점점 교만해져갔다.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차지하였다. 만번한을 경계로 이르게 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요동설을 주장하였고, 실증주의 학자들은 평양설을 주장하였는데, 최근에는 초기 요동에서 후기에 평양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동설이 많은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되는 사료가 이것은데, 중국 연에게 격퇴당하는 이 시점이 고조선이 영토를 잃고 중심지를 이동하는 기원전 4세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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