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

◈ <삼국사기> 列傳 궁예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 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 善宗鬱不自安 潛結箕萱麾下

元會・申煊等爲友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劒擊之 其刃迹猶在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將軍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鐵椎打殺之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通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有商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玆瓦]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昌瑾初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 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相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宋含弘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 波珍亦必遭害” 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亂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제10 궁예)

◈ <삼국사기> 열전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출생하였고 나면서 이빨이 나고, 또 햇빛이 이상하니 아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이를 키우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그 사람이 포대기에서 그 애를 꺼내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인 여자 종이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이 멀었다. 이를 안고 도망을 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가 10여세 되자 놀기만 하였으므로 그 유모[乳婢]가 말하였다.

“자네가 태어나 나라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하지 못하여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자네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자네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궁예가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내가 떠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문득 세달사(世達寺)로 떠나갔다. 그 절은 지금[고려]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장년이 되자 승려의 계율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헌출하여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齋)에 참석하려고 가는 길에 까마귀가 입에 물었던 물건을 들고 있는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들여다보니 상아로 만든 첨대에 임금 「왕(王)」자가 쓰여져 있어 숨기고 말을 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가 쇠약하여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주현들이 반란세력에 따라 붙는 자가 거의 반에 이르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뭇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래 백성이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은 이런 혼란기를 타서 무리를 모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신해년(891)에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이 얕보고 거만하여 예로서 대접하지 않자,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불안해하여 기훤의 휘하에 있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몰래 결합하여 벗으로 삼았다.

천복(天復)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므로 평양의 옛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꽉차 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아마 이는 출생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여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할 때 흥주(興州)[현재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신라왕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찔렀다. 그 칼 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911)에 연호 성책(聖冊)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바꾸어 원년으로 하고,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錦城)[현재의 전남 나주시] 등을 치게 하였다. 금성을 나주로 개칭하고 그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선종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方袍]를 입었다.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로 삼아 외출할 때에는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였으며 소년 소녀로 하여금 깃발, 일산과 향기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고 비구 승려 200여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또 스스로 불교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바른 말이 아니었으며,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불법을 강설하였다. 중 석총(釋聰)이 이를 평하기를 “모두 사특한 설 괴이한 말로서 교훈이 될 수 없다.”고 하자 선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철퇴로 쳐 죽였다.

정명(貞明) 원년(915)에 부인 강(康)씨가 왕이 옳지 않은 법을 많이 행하자 정색으로 간하니 왕이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강씨가 말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하고는 뜨거운 불에 쇠 절구공이를 다려서 그 음부를 쳐죽였다. 그 두 아들에 대하여서도 이후 더욱 의심을 많이 하고 성을 급하게 내니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 및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부양(斧壤), 철원 사람들은 그 해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로부터 와서 철원의 시전에 임시 거처하고 있었다. 정명 4년 무인(918)년에 저자에서 모습이 걸출하게 크고 머리카락이 온통 희며 옛 의관을 입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왼손에는 옹기 사발을 들고 오른 손에는 옛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니 창근이 곧 쌀을 주고 바꾸었다. 그 사람은 받은 쌀을 거리의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후로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창근이 거울을 벽 위에 걸어두니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가늘게 쓴 글자가 있었다. 이를 읽어보니 옛 시 같은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리니 먼저 닭을 붙들고 후에 오리를 잡을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靑木) 중에 움추리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의 동쪽에 나타날 것이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발견하고는 보통 것이 아니라 하여 왕에게 이를 아뢰었다. 왕은 담당 관청에 명하여 창근과 더불어 그 원래 거울 주인을 찾도록 하였는데 찾지 못하고 오직 발삽사(颯寺) 불당에 서 있는 진성(鎭星)의 소상(塑像)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동안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이를 해석하도록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귀절에서 진마(辰馬)는 진한 마한을 말하고, 두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청목(靑木)에 감추었고 한 마리는 흑금(黑金)에 나타났다는 귀절에서 푸른 나무는 송(松)이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龍)자를 이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자손이니, 지금 파진찬 시중을 가리킴일 것이며, 검은 쇠는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징험이다. 먼저 닭[鷄]을 잡고 후에 오리[鴨]를 잡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후에 압록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함홍 등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지금 임금께서 잔학하고 난폭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만일 이를 사실대로 아뢰었다가는 우리들이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만 아니라 파진찬까지도 반드시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고는 꾸며서 거짓으로 아뢰었다. 왕이 흉악함과 잔학함을 거리낌없이 하자 신료들이 크게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름 6월 장군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능산(三能山), 복사귀(卜沙貴)<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어릴 때 이름이다.>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중에 태조의 집에 찾아가 말하였다.

“지금 임금께서 음란한 형벌을 마음대로 써서 자신의 처자를 살륙하고 신료를 목베이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 살아갈 길이 막연합니다. 옛부터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키고 지혜가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탕왕과 무왕의 일을 행하십시오!”

이에 태조는 얼굴 빛을 붉히며 거절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충성스럽고 순박하다고 스스로 믿어 왔는데 지금 비록 포악하고 난폭하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을 교체하는 것은 소위 혁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실로 덕이 없어 감히 은나라 주나라 건국자의 일을 본뜰 수가 없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기는 어렵고 기회를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모두 왕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니, 지금 덕망이 공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히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포악한 군주[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오?”

부인 유(柳)씨가 여러 장수들의 주장을 듣고 이에 태조에게 말하였다.

“어진이가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옛부터 그런 것인데 지금 뭇사람의 논의를 들으니 여자인 저도 오히려 분함이 생기는데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뭇 사람의 마음이 문득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직접 갑옷을 갖다 태조에게 드렸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옹위하고 문을 나섰다. 길잡이로 하여금 외치게 하기를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 하니 이에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 와 따르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사람이 또한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평복으로 갈아 입고 산 속으로 도망쳤으나 곧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는 당나라 대순(大順) 2년(891)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 4년(918)에 이르기까지 28년만에 망하였다.(삼국사기 권제50 열전 제10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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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의 시무 28조  (1) 200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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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정도전의 척불론

석씨가 자기 몸만 깨끗이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면서까지 산림으로 도망해 들어간 것은 하나의 도라고 할 수 있으나, 그 화복의 설은 요망함이 아주 심합니다. 저들은 “장황한 범패(음악), 불사가 매우 요망합니다.”고 말하므로 그를 위해 향을 내려줌이 잇따랏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아직 재해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출가한 무리들을 모아 본업으로 되돌리시고, 오교양종을 혁파하여 군사를 보충하며 각 사원은 그 곳의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노비와 재용도 그렇게 처리해야합니다. 엄한 금령을 세워 머리를 깍는 자는 죽여서 용서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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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

(가) 말기에 덕을 잃어 토지 대장이 불분명 하매 평민은 모두 큰 세력가에 속하게 되고, 전시과는 폐하여 사전이 되었다 권력가들의 토지는 광대하여 산천으로 표를 삼고, 징세를 한 해에 수삼 차에 걸쳐 시행하니 나라의 법이 무너져 나라도 망하게 되었다. <고려사> 식화지

(나)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가 글을 올려 과전을 지급하는 법을 정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따랐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하는 자는 직위의 고하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18둥급으로 나누어 150-10결까지 지급)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가 자식이 있고 수신(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하는 자는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 받고 자식이 없이 수신하는 자의 경우는 반을 물려 받는다.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그 자손이 유약한 자는 훌양전으로 아버지의 과전을 전부 물려 받고, 20세가 되면 본인의 과에 따라 받는다. <고려사, 식화지>

(다) 공전이나 사전을 막론하고 수조자는 논 1결에 최고 미(米) 30두(말), 밭 1 결에 잡곡 30두의 조를 바치며, 만일 그 이상을 징수하는 자가 있으면 엄벌한다. <고려사> 식화지

(라) 나라에서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은 10분의 1에 불과한데 지금 개인집에서 백성들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은 그 열 배, 천 배나 되니 조종의 영흔을 어찌 대하며, 국가의 어진 정사를 어찌 기대할 수 있습니까? 백성이 사전의 도조를 낼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서 층당하고 있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게 되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습니다. 이에 원통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위로는 하늘까지 통해 화창한 하늘의 기운을 슬프게 만들어 수재와 한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집이 비고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으며 왜놈들이 깊숙히 침입하여 천리에 시체가 나뒹굴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마)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오직 토지뿐인데, 밭을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지어도 부모 처자를 부양하기 어렵습니다. 조세를 거두는 자가 이르면, 만약 그 밭의 주인이 하나이면 다행이지 만, 혹 서너 집이 되거나 일곱, 여덟 집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힘이 서로 같고 세력이 서로 비슷할 때에는 누가 즐거이 양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세를 바치는데 부족하면 알맞도록 꾸어서 보태게 되니, 무엇으로 그 부모를 공양하며 무엇으로 그 처자를 양육하겠습니까. 백성의 곤궁함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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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농민 생활

(가) 요즈음 남방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린 백성 왕왕히 길가에 쓰러지는데

수령 중에 글자를 아는 자는 백에 두 셋뿐,

법을 업신여겨도 모른 척함을 장님 벙어리처럼 하네

농부를 몰아다 해구(왜적)를 막게 하니,

도적의 칼날 닿기 전에 먼저 흩어지누나.

대장은 막사에 앉아 악기를 타고,

소장은 땀흘려 무기를 나르네.

권세가의 노비들은 잇달아 말타고와 땅을 빼앗고,

관(官)은 밀린 세금 징수에 흥년을 고려하지 않네.

슬프다 민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뉘라서 우리 임금을 위하여 정무를 덜어줄까.

(나) 이 때에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둥이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나쁜 종들을 시켜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모두 물푸레 나무로 때리고 이를 빼앗게 하였다. 땅 주인이 비록 관가 의 문권(권리 문서)을 가지고 있더라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물푸레나무 공문’이라 하였다.

(다) 아침 굶고 저녁도 굶었는데, 가엾어라 허리엔 빈 자루만 차고 그래도 ‘어허야' 소리 입에 침이 마르니, 침마르고 목쉬어 소리도 안나오네. 소리 줄고 힘 다해 기진맥진 엎어지니, 흙 먼지 구덩이만 사람 발에 피를 뿌리네. 제발 원하노니 하늘이시여, 큰 나무나 돌 따위일랑 산림에 두지말고 임금님 옆에 두어, 큰 집의 기등과 주춧돌이 되게 하여 만민의 수고를 덜고 만 백성의 폐를 없이 하여 ‘어허야’ 소리 산골에 안들리게 하소서.

(라) 이런 일이 1 년에 한두 번이나 2년에 한 번씩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10-50 명에 이른다. 이미 그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여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국경에서 혜어질 때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 여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 사람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사람도 있다. 이런 예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 근래에 간신이 날뛰어 나라의 정권을 농락하며 질서와 규을을 파괴하고 공사의 토지와 백성들을 모두 빼앗고 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고 국고는 말랐는데, 권력을 잡은 자들만이 부유하고 창고가 넘치니 매우 가슴 아프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민전올 조사하고 조세와 부역을 이전의 법대로 공정하게 정하려 하니, 이는 첫째, 국용(천재 지변 등 응급 구제에 쓰는 비용)을 예비함이며, 둘째, 관리의 녹봉을 충분히 주고, 셋째,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사,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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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여말선초의 변화 : 신진사대부의 성장

(가) 나라에서 나이 어린 똑똑한 자들을 골라서 몽고어를 배우게 하였는데, 조인규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자기 동배들보다 특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을 닫아 걸고 3년 동안 몽고어를 학습한 결과 마침내 통달하였다는 명성을 얻고 제교의 관직에 임명받았다. 그 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고려사,조인규>

(나) 최우는 일찍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저 문학에 능하고 행정 실무에 능한 사람을 첫째로, 문학에는 능하나 행정 실무 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행정 실무에 능하나 문학에 능하 지 못한 사람을 또 그 다음으로, 문학도 행정 실무도 능하지 못한 사람을 최하로 하여 인사의 기준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원종

(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와 백성에 대한 병점은 국가의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울 뿐 만 아니라 무신 정권 몰락 이후 새로이 정계에 등장하는 중소 토지 소유자 출신의 신흥 관료들의 녹봉조차 지급되기 곤란하게 하였다. 이에 신흥 관료들은 비대해진 구귀족, 블교 사원의 사회 경 제적 기반을 국가에 환원시키고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를 하립하기 위하여 주자학을 수용하고 이를 신봉하였다. 여말 신진 유사(사대부)들의 주자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 개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① 주자학의 수용기(충렬왕조-충정왕조), ② 주자화의 이해기(공민왕조창왕 조), ③ 주자학의 대불교 투쟁기(공양왕조)가 그것이다. 안향, 백이정, 이제현 등이 주축이 되 는 첫째 단계에서는 주자학 수용과 문묘 제사, 관학 부흥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색,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등이 주축이 되는 둘째 단계에서는 불교의 윤리 사상을 유교적인 윤리 사상으로 바 꾸기 위한 주자학의 보급과 불교의 세속권과 타락된 측면만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 이는 아직도 신진 유사의 세력이 구세력을 타도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때문이다. 따라서 신진 유사들이 본격적으로 구세력을 공격한 것은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한 위화도 회군 이후의 일이었다. 정도전, 김 초, 박초 등이 그 주축이 되는 인믈이었다. <한우근, 양반 관료 국가의 성립>

(라) 우왕이 명의 군대가 ‘철령위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요동을 공격하려하였다.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지금 정복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한 점이 있습 니다. 첫째, 소로써 대를 거역하는 것이며, 둘째,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며, 셋째, 온 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것이 며, 넷째, 여름철이라서 비가 자주 내리므로 활이 눅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마)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권세가가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농토가 잇닿고 가 난한 자는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다. 전하께서 죽위하시기 전에 친히 그 폐 단을 보시고 개탄하여 산전을 혁파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나누 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하려 하였다. 당시 구세력들이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온갖 방해를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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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가) 5년 5월에 정동행성의 이문소(정동행성의 부속 기관)를 폐지하였다.

5년 6월 원의 연호인 지정의 사용을 중단하였다.

요사이 반역한 신하 기철 등이 군사를 움직일 것을 꾀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다행히 성덕에 의지하여 화근을 막게 되었습니다.

5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하니 쌍성총관부의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도주하였다. 이에 화주, 등주, 정 주 등 화주 이북을 꼬두 회복하였다. <고려사> 공민랑

(나)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다음과 같이 방을 내렸다. ‘요사이 기강이 크게 무너져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포학하게 되어 종묘. 학교, 창고, 사원 등의 토지와 세 업전민(대대로 내려오는 토지와 노비)을 호강가 (권세가)가 거의 다 빼앗아 차지하고는, 혹 이미 돌려 주도록 판결난 것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혹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 향리, 역 리, 관노, 백성 가운데 역을 피해 도망한 자들이 모두 숨어 들어 크게 농장이 설치되니,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며, 흥수와 가뭄을 부르고 질병도 그치지 않고 있다. 이제 도감을 두어 고치도록 하니,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이 지나 일이 발각되는 자는 엄히 다스릴 것이다.’ <고려사>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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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

(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고 블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러 좌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가 되었다. 권신이 정권을 잡자 이들 삼별초는 그 앞잡이가 되었는데, 권신은 봉륵을 후히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플었다. <이재현, 역옹패설>

(나1 원종 11년(1270)에 옛 수도(개경)로 환도할 기일을 정하여 방을 붙였는데, 삼별초는 딴 마음이 있어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그 명부를 거두어 오게 하니, 삼별초는 명부가 몽고에 전해질까 두려워 하여 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중손과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은 난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몽고병이 대거 쳐들어 와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으니, 무릇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모두 격구장에 모이라고 외쳤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주히 사방으로 흩어져 배를 타고 강올 건 너려고 서로 다투다가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삼별초는 사람들의 이동을 막으면서 강을 따라 큰 소리로 외쳤다. ‘만일 배를 타고 개경으로 떠나려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 특히, 문무 양반들이 섬을 탈출하는 것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적의 작은 배를 향하여 발사를 하였다....그리고는 금강고 병기를 군졸에 나누어 주고 배중손, 노영희가 이들 삼별초를 영솔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아 관부를 설치하고 관원을 임명하였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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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에 대한 천민들의 항쟁

(가) 명종 23년 7월 남적이 봉기하였다. 큰 도적인 김사미는 운문에 응거하고, 효심은 초전에 응거하며 주현을 노략질하였다. 국왕이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 김존걸 등을 보내어 치게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였다. 24년 2월에 괴수 김사미가 스스로 행영에 와서 투항하였고, 그 후 참하였다.

<고려사> 명종

(나) 권세가들이 사람을 시켜 조세를 징수케 하는데, 한 토지에서 두세 번에 걸쳐 징수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다. 그들의 원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니 화의 근원이 바로 여 기에 있는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

(다) 이미 우리 마을(공주 명학소)을 현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설치 하여 안무(백성의 사정을 살펴 위로함)하더니, 이제 와서 다시 군대를 발하여 나의 어머니와 처자를 붙잡은 의도가 어디있느냐.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반드시 왕경(개경)에 이르고 말겠다.

<고려사> 명종

(라) 경계의 난 이래로 공경 대부가 천한 노예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노비만이 어찌 매질 밑에서 고생하라는 법이 있는가. 우리들도 최충헌을 죽인 후 이어 각각 그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삼한에저 천인을 없애자.

<고려사>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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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개혁정치

(가) 충목왕이 즉위하여 공민왕을 강릉부원대군으로 봉하였다. 층목왕이 돌아가시니 고려에서 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원에서 충정으로 왕을 계승케하고 인하여 (공민)왕을 머믈러 숙위(궁궐에 머물러 지키는 것)케 하였다. 처음에 충숙왕이 공민왕을 윤택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으므로 충정 원년에 윤택이 이승로와 더불어 글을 (원의) 중서성에 올려 왕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이 해에 왕이 노국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 3년 10월에 원에서 국왕을 삼았다.

(나) 공민왕 5년 3월, 기씨의 족속이 후(기철의 누이 동생이 원순제의 후궁)의 권세를 믿고 횡포하매 어떤 사람이 밀고하기를 ‘기철이 은밀히 쌍성의 반란민과 작당하여 반역을 도모하 나이다.’하니, 왕이 환조(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돌아가 나의 백성을 진무하라. 만약 변이 있거든 나의 명령에 따를 것이니라.’라 하였다

(다) 공민왕 5년 5월,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평리 인당, 동지밀직사사 강중경 을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전대호군 최영, 전부정 최부개를 부사로 삼아 압록강 이서의 8참을 공 격케 하고,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쌍성 등를 수복케 하였다.

(라) 공민왕 5년 6월, 원의 연호 지정의 사용을 중단하고, 교시하기를 ‘생각컨대 우리 태조께서 창 업하시고 여러 성인들이 계승하여 다 능히 선대의 업올 지켜왔다. 그러나 요사이 나라의 풍속이 일변하여 오직 권세만 추구하게 되어, 기철 등이 군주를 전율케 하는 위협으로 나라 다스리는 법을 흔들어, 관리의 인사권이 그의 손아귀에 있고, 정령이 이로 말미암아 신축되어, 토지와 노비를 함부로 탈취하니, 이는 과인의 부덕 탓인가 아니면 기강이 무너져 통제할 방법이 없음인가. 깊이 이 연고를 생각하니 매양 슬프게 되노라.’하였다.

(마) 공민왕 5년 7월,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가 쌍성을 함락하니 쌍성총관부의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도주하였다. 이제 화주, 등주, 정주, 장주, 예주, 고주, 문주, 선주 및 선덕, 원흥, 영인, 요덕, 정변 등의 진을 수복하였다. 화주 이북은 고종 무오년(1258)부터 원에 합병당하였다가 이제 모두 이를 회복하였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바) 고려 태조가 나라를 개창할 초기에는 신라, 태봉의 관제를 참고하여 관서를 설치하고 관직을 구분하여 서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관호 중에는 혹 방언이 섞여 있었는데 개혁 할 겨를이 없었다. 성종이 제도를 크게 혁신하여 내외의 관제를 정하니, 이로써 일대의 관제가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충렬왕 때 관제를 고치게 되었으니, 상국(원나라)의 압력으로 모두 고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관직이 크게 문란해졌다. 이에 공민왕이 재위 22년 동안 관제를 고친 것이 넷이었다.

<고려사> 백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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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이자겸이 다른 성씨가 비(妃)가 되어 권력과 총애가 나뉘어질까 두려워하여 셋째 딸을 왕비로 바쳤으며, 넷째 딸도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신하들을 불러 논의하였으나, 이자겸의 심복이었던 척준경이 화가 나서 칼을 빼어 들고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쏘면서 공격을 하니 화살이 왕 앞에까지 날라 왔다. 밤에 왕이 산호정까지 도망을 하였는데 따라오는 자들은 10여인에 불과하였다.

왕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글을 지어 자겸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였다.

이자겸의 난,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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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최승로의 시무 28조

1. 요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그 지방에서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사람을 뽑아 국경을 맡도록 하소서.

2. 불사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많고 죄를 지은 자가 중을 가장하고, 구걸하는 무리들이 중과 서로 섞여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대 국왕은 체통을 지키소서.

3. 우라 왕조의 시위하는 군사들은 태조 때에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광종이 풍채가 좋은 자를 뽑아 시위케 하여 그 수효가 많아졌습니다. 태조 때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돌려보내어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4. 왕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 국으로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나, 적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상벌을 밝혀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일은 임금의 체통이 아니오니 폐지하소서.

5. 태조께서 수 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닦았을 뿐인데, 지금은 사신뿐만 아니라 무역으로 인하여 왕래가 빈번하니, 지금부터는 사신 편에 무역을 겸하게 하되, 그 밖의 때에 어긋나는 매매는 일체 금하도록 하소서.

6.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이 각기 주군(州郡)에서 사람을 시켜 관장하며, 해마다 비싼 이자를 주어 백성을 괴롭히니 리를 모두 금지하소서.

7.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이후에 수령을 두고자 하였으나 초창기에는 일이 번다 하여 미처 이를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외관을 두소서.

9. 관료들로 하여금 조회할 때에는 모두 중국 및 신라의 제도에 의해 공복을 입도도록 하여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분별하도록 하소서.

11. 풍속은 각기 그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12.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13. 우리 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을 설치하고, 겨울에는 팔관을 베풀어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히 번다 하오니 원컨대 이를 감하여 백성들이 힘펴게 하소서.

14. 임금께서는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히 대하고, 죄 지은 자는 모두 법에 따라 벌의 경중을 정하소서.

16. 중들이 다투어 절을 짓는데, 수령들이 백성을 동원하여 일을 시켜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엄히 금하소서.

17. 근래에 사람들이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재력만 있으면 다투어 큰집을 지으니 그 폐단이 많습니다.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헐어 버리도록 명하여 뒷날에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18.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을 만드는 데 모두 금, 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그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엄중히 금하여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19.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20.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곧 오늘의 할 일 입니다. 오늘은 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21. 우리 왕조는 종묘 사직의 제사는 아직 법대로 하지 않으면서 산악과 별자리에 대한 초제는 번거롭기만 합니다. 민심을 얻으면 그 복이 기원하는 복보다 많을 것이니 제사를 지내서는 안됩니다.

22.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니 천한 노예들이 주인을 모함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즉, 선대의 일에 구애되지 말고, 노비와 주인의 송사를 판결할 때는 분명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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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관과 기인 제도

(가) 태조 18년에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하였으므로 신라국을 없애고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 관직자들의 일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에게도 이를 본받아 각각 그 고향의 사심관으로 삼으니, 사심관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성종 15년에 500정(丁) 이상의 주(州)에는 4명, 300정 이상의 주에는 3명, 300정 이하에는 2명의 사심관을 두도륵 하였다. 현종 초년의 판(왕이 법제적으로 결정한 문장)에는 아버지와 친형제가 호장이 된 자는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종 10년의 판에는 모든 사심관을 파견함에는 기인과 백성의 여론을 따를 것이로되, 백성들의 추천함이 비록 작더라도 조정에서 고관대직을 맡아본 사람이나 여러 대를 두고 문벌을 형성한 사람을 아울러 아뢰어 보내게 하고, 일찍이 간사한 죄에 연루된 자는 파견하지 말도륵 하였다....

충렬왕 9년 여러 주의 사심관을 임시로 없앴다. 충숙왕 5년 4월 주와 군의 사심관을 없애니 백성들이 이를 심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권세 있는 호족이 스스로 사심관이 되니 피 해가 전보다 심하였으므로 5월에 하교하기를 ‘사심관을 설치한 것은 본래 백성을 가장 으뜸으로 삼고, 우열을 감별하여 부역을 평균케 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려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 여 공전을 널리 점유하고 민호를 많이 숨겨 ... 향리에도 해독이 있고 나라에는 도움이 없으므로 이미 모두 혁파하였으니 그 숨긴 바 토지와 호구는 찾아내어 복구하라.’고 하였다.

(나) 국초에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삼고, 또 그 고향의 일에 고문으로 삼으니 이를 기인(其人)이라 하였다. 문종 31년에 명을 내려 모든 기인은 1000정 이상의 주는 족정(足丁, 고려 때 병역에 입역하는 자를 위하여 문배되는 토지의 단위, 족정은 17결, 반정은 7-8결)으로 하여 나이 40세 이하 30세 이상의 사람을 뽑아 올리는 것을 허락하고, 1000정 이하의 주는 반족정으로 하여 병창정이하 부병창정 이상은 물론 부강정직(富强正直)한 자를 뽑아 을리게 하였다. 족정은 15년을 한정하고 반정은 10년을 한정하여 입역케 하며, 족정이 10년에 이르고 반족정이 7년에 이르면 동려직(현직에 준하여 설정된 퇴직 관료의 직)을 내리고 역이 차면 직을 올려주게 하였다. 고종 40년 6월에 명을 내려 기인에게 향촌의 분직올 추가하였다. 충숙왕 6년에 하교하기를 기인의 역이 노예보다 심하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유망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사심관 및 그 제역소(궁원에 소속된 백성들로 부역을 면제 받은 자)에 이를 대신하게 하고, 전부 도망한 주군은 이에서 제외시켰다.

<고려사>, 선거지, 사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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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시대 교육제도 관련 사료

(가) 서경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다. 왕이 정악에게 서경에 머물러 서학박사(書學博士)가 되게 하고 따로 학원을 세워 서경 육부에서 생도를 모아 가르치게 하였다. 뒤에 성과가 좋다는 말을 듣고 비단을 내려 권장하고, 또 곡식 100석을 내려 學寶를 삼게 하였다.

(나) 12목에 경전에 능통하고 책을 많이 읽은 선비들을 모아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를 각각 한 사람씩 보내 가르치게 하였다.

(다) 무릇 과거에 나아가려는 자는 모두 9제(薺)에 적을 두니, 이를 문헌 공도라 불렀다. 또 유신(儒臣)으로 도(徒)를 세운자가 11명이 있으니, 문헌공 최충과 아울러 세칭 12도라 하였지만, 최충의 도가 가장 성하였다.

(라)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쇄함을 근심하여 “지금 養賢庫가 메말라 선비를 기를 수 없으니 6품 이상은 각각 은 한근을 내고 7품이하는 포를 차등있게 내도록 하여 이를 양현고에 돌려 본전에 두고 이식만을 취하여 섬학전으로 삼자”고하니 兩部가 이를 쫓아 아뢰고 왕도 內庫의 錢穀으로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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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무신집권기 신분해방운동 관련 사료

(가) 명종23년 7월 남적이 봉기하였다. 큰 도적인 김사미는 운문에 웅거하고, 효심은 초전에 웅거하며 주현을 노략질하였다. 국왕이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 김존걸 등을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였다. 24년 2월에 괴수 김사미가 스스로 투항하였고 그 후 참하였다.

(나) 권세가들이 사람을 시켜 조세를 징수하는데 한 토지에서 두세번에 걸쳐 징수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다. 그들의 원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니 화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 이미 우리 마을(공주 명학소)을 현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설치하여 안무하더니, 이제 와서 다시 군대를 발하여 나의 어머니와 처자를 붙잡는 의도가 어디있는가.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반드시 왕경에 이르고 말겠다.

(라) 경계의 난 이래로 공경 대부가 천한 노예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노비만이 어찌 매질 밑에서 고생하라는 법이 있는가. 우리들도 최충헌을 죽인 후 이어 각각 그 주인들을 죽인 후 노비 문서를 불살라 삼한에서 천인을 없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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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최충헌의 봉사 십조

<최충헌의 봉사(封事)십조>

1. 왕은 참위설을 믿어 새로 지은 궁궐에 들지 않고 있는데, 길일을 택하여 들어갈 것.

2. 근래 관제에 어긋나게 많은 관직을 제수하여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으니 원제도에 따라 관리의 수를 줄일 것.

3. 근래 벼슬아치들이 공․사전을 빼앗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이 줄고 군사가 부족하게 되었으니, 토지대장에 따라 원주인에게 돌려줄 것.

4. 세금을 거두는데 향리의 횡포와 권세가의 거듭되는 징수로 백성의 생활이 곤란하니 유능한 수령을 파견하여 금지케할 것.

5. 근래 각 지역의 관리들이 공물 진상을 구실로 약탈 행위를 일삼고 사취하기도 하니 공물 진상을 금할 것.

6. 지금 승려 한 두 사람이 궁중에 무상 출입하고 왕이 내신으로 하여금 불사(佛事)를 관장하여 곡식을 민간에게 고리대를 함으로써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곡식 대여를 금할 것.

7. 근래 여러 고을의 관리들 중에 재물을 탐내는 자가 많으니, 그들의 능력을 가려 유능한 자는 발탁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징벌할 것.

8. 요사이 신하들의 저택과 복식에 사치가 많으니 검소한 생활을 할 것.

9. 함부로 사찰을 건립하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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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의 전시과 관련 자료

(가) 처음으로 그는 역분전을 정하였다. 통합시의 조신(朝臣), 군사들에게 관계(官階)는 논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성행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 지급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나) 고려의 전제는 대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개간된 토지의 넓이를 총괄해서 그 기름 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병(군역을 책임지는 장정), 한인(관리 신분이면서 벼슬을 못하고 있는 자)에게까지 과(땅을 나누어 주는 등급)에 따라 전지를 주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 과에 따라 시지(땔감을 얻는 땅)을 주었는데, 이를 전시과라 한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 나라에 다시 반납해야 한다. 그러나 부병만은 나이 20세가 차면 비로소 땅을 받고 60세가 되면 반환하는데, 자손이나 친척 이 있으면 전정(전지)을 믈려받게 하고, 없으면 감문위(6위의 하나로 궁성 안밖의 모든 문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에 적을 두었다가 70세 이후에는 구분전을 지급하고 그 나머지 땅은 환수 하였으며,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유가족이나 미망인에게는 모두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또한 공음 전시가 있어 과에 따라 땅을 지급하여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였고, 공해 전시가 있어 장택(왕실), 궁원, 백사(여러 관사), 주현, 관역(사신을 유숙시키는 관사와 사신에게 말을 제공하던 역원)에 지급하였는데 모두 차등이 있었으며, 뒤에 또 관리의 녹이 밝혀지자 기현(경기도 안에 있는 현)의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재

(다) 경종 때에 창설된 전시과는 그 후 성종대를 거쳐 목종 원년(998) 12월에 이르러 개정되었다.... 성종대는 내외의 관제가 마련되어 지배 체제가 제자리를 잡아간 시기였다. 그러므로 목종 원년의 개정 전시과는 이러한 지배 질서의 성장과 그에 따르는 관인 체제의 발전에 호응하여 이룩된 토지 제도의 정비라 할 수 있다.... 개정 전시과는 우선 그 규정 내용이 퍽 간편하고 체계화되어 전체 관인을 한 계통 안에 망라하고 있다. 문무 양반을 증심으로 제정된 이 전시과는 종래 전시 지급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공복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품이라는 막연한 요소도 제거 하고 오직 관직과 위계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18과로 나누어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박용운,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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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불교 관련 사료 모음

(가) 가만히 생각하면 성인이 가르침을 편 목적은 행(行)을 일으키려는데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다... 정원 법사는 ‘관(觀)을 배우지 않고 경(經)만 배우면 오주(五周)의 인과를 들었더라도 삼중(三重)의 성덕(性德)은 통하지 못하며, 경은 배우지 않고 관만 배우면 삼중의 성덕을 깨쳐도 오주의 인과는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쓰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의천, 대각국사문집>

(나)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 정은 곧 혜인 까닭에 허공처럼 텅비어 고요하면서도 항상 거울처럼 맑아 영묘하게 알고, 혜는 곧 정이므로 영묘하게 알면서도 허공처럼 고요하다. <보조국사법어>

(다) 한 마음(一心)을 깨닫지 못하고 한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인데, 부처는 이 한 마음을 깨달았다. 깨닫고 아니 깨달음은 오직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를 찾을 곳은 없다. <지눌, 정혜결사문>

(라) 먼저 깨치고 나서 후에 수행한다는 뜻은 못의 얼음이 전부 물 인줄을 알지만 그것이 태양의 열을 받아 녹게 되는 것처럼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았으나 불법의 힘으로 부처의 길을 닦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늘, 수심결>

(마) 연등회

현종 원년 윤 2월에 燃燈會를 회복 하였다. 나라의 풍속에 王宮과 國都로부터 鄕邑에 미치기까지 정월로 부터 두 밤을 연등 하였는데, 성종이 이를 번잡하고 소란하여 온당치 못하다하여 없앴던 것을, 이 때에 회복한 것이였다.

2년 2월에 연등회를 淸州 行宮에 설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2월 15일에 행함을 관례로 하였다.

문종 2년 2월 甲申에 연등 하였는데 15일이 한식이므로 이날에 행하였다.

(바) 팔관회

태조 원년 11월에 有司가 말하기를 “ 前主는 매년 겨울에 八關會를 설하여 福을 기원하였사오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 ” 하니 왕이 허락하여 드디어 구정에 윤등 일좌를 두고 향등을 사방에 나열 하였으며 채붕등에 묶었는데 각각 높이가 오장여였고, 그 곳에서 여러가지 노래와 춤을 추었다. 용,봉,코끼리, 말,차, 배는 모두 新羅에서 행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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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西京全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王師가 반적을 친 지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지역이 낭,불 兩家 대 儒家의 戰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戰이며, 독립당 대 사대파의 戰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戰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을 어찌‘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 조선사상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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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의 수취체제와 부역, 공납 제도 사료

<고려의 수취체제>

진전을 개간해 경작하는 자는, 사전의 경우는 첫해에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는 농지의 주인과 반씩 나누어 가진다. 공전의 경우는 3년까지는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고 4년째부터는 법에 따라 조(지대)를 바친다.

[고려사] 권78식화지1 전제 광종 24년 l2월

공전의 조(租)는 4분의 1로 하되, 논은 상등 1결에 조 3석 11두, 중등 1결에 조 2석 11두, 하등 1결에 조 l석 11두로 하고, 밭은 1결에 조 1석 12두, 중등 1결에 조 1석 l0두이며, 하등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조세, 성종 l1년

처음에 좌창(관리의 녹봉을 맡아 보던 관청)과 우창(왕실의 양곡을 맡아 보던 관청)에서는 곡식의 말을 재는 것을 법대로 하지 않고 쌀 10석을 받을 때 정액 이상으로 더 받는 것이 2되나 되었다. 지방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거듭 수탈하여 오랫동안 패단이 되었다. 요즈음 이를 고치려고 하여 1석에 대하여 모미(운반, 저장 등을 할 때 손실을 입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거두는 쌀)까지 합하여 l7두를 넘지 못하게 하였더니, 군소 관리들이 이에 불만을 가지는 기색을 보였으므로 이에 이르러(l173년) 명령을 내려 옛날대로 하기로 하였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조세, 명종 6년 7월

<역>

(가) 나라의 제도에 백성의 나이 16이면 장정이 되어 비로소 국역을 부담시 키고, 60이면 늙은이가 되어 역을 면제한다. 주군에서는 해마다 호구를 헤아려 호적을 정리하고 이를 호부에 올려 보낸다. 징병과 부역의 동원은 호적에 의거하여 뽑는다.

[고려사] 권79 식화지2 호구

(나) 편성된 호(편호)는 인구와 장정이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그 부역을 정한다. 가장이 자기 식구를 보고에서 누락시키거나 나이를 늘리고 줄여서 장정에 해당하는 연령층인데도 역의 부과를 면제받으면, 면제받은 자가 1명일 경우 징역 1년, 2명일 경우 1년 반에 처한다. 이정 (지방의 동리에서 호적 등으 사무를 맡아 보던 사람, 현재의 이장, 통장과 유사, 5호→1통 5통(이정) 잘 모르고 주민의 인구를 빠뜨리거나 나이를 늘리거나 줄여서 역의 부과에 오차가 생기면 1명에 태형 40이고 4명이면 태형 50에 처한다. 만약 사실을 알고서 이러한 일을 하면 법에 의거하여 가장과 마찬가지로 처벌한다.

[고려사] 권84 형법지1 호혼(戶婚)

(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태봉의 왕이 참서를 믿어 송악(경기 개성)을 버리고 부양(강원 평강)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궁실을 지으니 백성들이 토목공사에 지치 고 봄․여름․가을에 농사를 지을 시기를 놓쳤다. 더구나 굶주림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잇따라 일어나서 집을 버리고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잇따랐으며, 한 필 가는 베의 값이 쌀 6되와 맞먹게 되었다. 평민들은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종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짐은 이를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고려사절요] 권1 태조 원년 8월

(라) 정종은 당초에 도참사상을 믿어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고자 장정을 징발하여 시중(중서문하성의 우두머리) 권직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하니 부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호를 뽑아 서경에 채우니, 여러 사람이 복종하지 않고 원망하였다. 왕이 세상을 떠나니, 부역을 하는 사람들이 기뻐 날뛰었다.

[고려사절요] 권2 정종 4년 3월

(마)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요사이 듣컨대, 궁원(宮院)에 소속된 장호(莊戶)의 요역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살 수 없다고 하니 전중성(왕실에서 거느리는 사람들이나 왕실의 족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 이를 조사하여 구휼하라.

[고려사] 권3 현종 20년 9월

(바) 양반의 노비는 그 주인의 집에서 해야 할 역이 따로 있으므로 옛날부터 역과 잡세를 면제하였다. 이제 양민이 모두 세력 있는 집안에 들어가 관의 역을 부담하지 않아서 도리어 양반의 노비들이 양민의 역을 대시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일체 이를 금하게 하라

[고려사] 권85 형법2 노비, 충렬왕 24년 1월

<공납>

(가) 여러 주현들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공물대장에 기록되어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공물)의 일부인 소가죽, 힘줄, 뿔을 평포(平布)로 환산하여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고려사] 권78 식화지 l, 문종 20년 6월

(나) 왕이 명을 내리기를, ‘경기의 주현들에서는 상공 외에도 요역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이에 고통을 받아 나날이 점점 더 도망하여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계수관에 물어 보고, 그들의 공물과 역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하고 시행하라. 구리, 철, 자기, 종이, 먹 둥 소(所)에서 별공(필요할 때 수시로 거두어 들이는 공물 또는 특별한 종류의 공물)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함부로 징수해 장인들이 살기가 어려워 도망하고 있다. 해당기관에 연락하여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내는 물건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한 다음, 왕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고려사] 권78 식화지1 공부, 예종 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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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의 문벌 귀족 관련 사료

(가) 왕 16년 12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에게 음직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성종>

(나) 양반 6품 이상 관리의 자손 중 한 명을 입사 (처옴 벼슬 자리에 나감)하도륵 하였다. <고려사> 선거지

(다)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널리 앉히고, 관작를 팔고,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바치는 믈컨이 넘치게 모여드니, 썩어저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고려사> 이자겸

(라)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와 함께 아버지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올 비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왕이 김돈중 등에게 말하기를 ‘듣컨데 경들이 과인올 위해 복올 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장차 가저 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또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인근의 백성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등과 그 밖의 진귀한 꽃과 기이한 화초를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만들었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절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 잔치를 떼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이 매우 사치스럽고, 음식이 극히 진기하여 왕이 재상 및 가까운 신하들과 더불어 흡족하 게 즐기고, 김돈증, 김돈시에게 백금과 3정과 비단 각 10필, 거란산 실 70근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김돈증

(마) 이자겸은 풍모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평하고 즐거우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오랑캐) 중에서도 능히 왕실을 도울 줄 아는 자니, 역시 어진 신하라 할 만하 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토지와 제택(살림 집과 정자)을 치장하여 논발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 웠으며, 사방에서 선물이 들어와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바) 태조왕건 및 그 후손들은 오랜 동안 호족 세력때문에 시련을 당해야만 하였고 따라서 왕실은 가능한 한 무력을 가진자를 견제하였으므로 정치는 자연히 과거로 진출한 문신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문신관료들은 지배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문벌귀족화하였는데 이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과전, 공음전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력을 확보하였으며, 이들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에 의해 관직에 나가고 가문을 배경으로 요직으로 승진하였다.

(사) 문공인은 아려하고 유순하였으므로 시중 최사추가 사위로 삼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는데, 가세가 단한하였으나 귀족과 흔인하여 호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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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의 신분 제도

옛적에 우리 태조는 후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무릇 천인의 무리들은 그 종자가 별다르니 이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면, 뒷날 반드시 관직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차차 요직을 차지하여 국가를 흔란스럽게 만들 것이니, 만약 이 훈령을 어기면 사직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은 8대 동안의 호적이 천인의 무리와 관계가 없어야 비로소 벼슬을 할 수 있다. 무릇 천인의 무리에 속한 자는 아비나 어미 한쪽이 천인이면 자기도 천인이 된다. 비록 본주인이 놓아 주어 양민이 되더라도 그가 낳은 자식은 도로 천인이 된다. 또 본주인이 후손이 없이 죽더라도 주인 가문의 노비에 속하게 된다. 이것은 노비를 끝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려사] 권85 형법2노비, 충렬왕 26년 10월

무릇 도망한 노비를 숨겨 주어 자신이 차지하는 자는 1일에 초 3자라는 법률에 의거하여 베 30자를 징수하여 본주인에게 지급하되, 비록 날 수가 많아도 노비의 원래의 몸값을 넘지는 말아야 한다. 남자 노비의 몸값은 나이가 16세에서 60세까지는 베 100필, l5세 이하 및 60세 이상이면 60필이고, 여자 노비는 나이가 15세에서 50세까지는 120필, 16세 이하 50세 이상은 60필이다.

[고려사] 권86 형법2노비, 성종 5년 7월

군현 사람이 진․역․부곡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는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인이 천인과 결흔하여 낳은 자는 절반씩 나누되, 남는 수는 어머니를 따르게 한다.

[고려사] 권84 형법1 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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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태조 26년(943)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가 앉아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친히 훈요를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들으니 순 임금은 역산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요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한의 고제 패택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역지 한갖 외로운 평 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하여 외람스럽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고 몸도 벌써 늙었다 후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 잡혀 나라의 질서를 문란시킬 듯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계를 써서 후손들에게 전하노니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구히 모범으로 삼게 하기를 바란다.

첫째,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 사원들을 창건하고 주지들을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간신이 권력을 잡으면 승려들이 청탁을 받아서 모든 사원들이 서로 쟁탈하게 될 것이니 이런 일을 엄격히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의 말에 의하여 자기가 선정한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을 손상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 왕비, 대관들이 각기 원당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은 사원들을 증축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이 되는 바이다. 신라 말기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손시켰고 결국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셋째, 적자에게 왕위를 계숭시키는 것이 비록 떳떳한 법이라고 하지만 옛날 단주가 착하지 못하여 요가 순에게 나라를 선양한 것은 실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후세에 만일 국왕의 맏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차자에게 줄 것이며 차자 또한 착하지 못하거든 그 형제중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는 자로써 정통을 잇게 할 것이다

넷째,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다섯째, 내가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의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수맥의 근본으로 되어 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계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 것이다.

여섯쌔,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5악, 명산, 대천, 용의 신을 섬 기는 것이다.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지할 것이다. 나도 당초에 이 모임을 국가 기일과 상치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굳게 맹세하여 왔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이다

일곱째, 임금이 신하의 신망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그 신망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간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하는 자를 멀리하여야 하는 바 간하는 말을 따르면 현명하게 된다. 참소하는 말은 꿀처럼 달지만 그것 을 믿지않으면 참소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되 적당한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경하게 하며 조세를 적게 하는 동시에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자연히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미끼 끝에는 반드시 큰 고기가 물리고 중한 상(賞)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겨누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착한 정치를 하면 반드시 착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다. 상과 벌이 적절하면 음양이 맞아 기후까지 순조로워지니 그것을 명심하라.

여덟째, 차현이남 금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에 참여하거나 왕후, 국척들과 혼인을 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역의 잡척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혹은 왕후, 궁중에 아부하여 간교한 말로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떻게 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홉째, 백관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를 따라 일정한 제도를 마련할 것이니 현재의 것을 증감하지 말라. 또 옛 문헌에 이르기를 공로를 보아 녹봉을 규정하고 사사로운 관계로 관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일 공로가 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으로저 헛되이 녹봉을 받게 되면 아래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역시 그 행복을 길이 누릴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엄격하게 이를 경계해야 한다.또 우리는 강하고도 악한 나라(거란)가 가까이 있으니 평화로운 시기에도 위험을 잊어서 안된다. 병졸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며 부역을 면제하고 매년 을에 무예가 특출한 자들을 검열하여 적당히 벼슬을 높척주어야 한다.

열째, 나라를 가진 자나 집을 가진 자는 항상 만일을 경계하며 경전과 타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지금의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 주공은 성인으로서 [무일(無逸)] 한 편을 성왕에게 을려 그를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그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붙여 드나들 때에 항상 보고 자기를 반성하도록 하라.' 이 열 가지 훈계 끝에 매번 ‘중심장지(中心藏之)’라는 네 글자를 써붙여서 후대의 왕들이 전해내려 오면서 보배로 여기게 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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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의 봉사 10조

1. 왕은 참위설을 믿어 새로 지은 궁궐에 들지 않고 있는데, 길일을 택하여 들어갈 것.

2. 근래 관제에 어긋나게 많은 관직을 제수하여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으니 원제도에 따라 관리의 수를 줄일 것.

3. 근래 벼슬아치들이 공․사전을 빼앗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이 줄고 군사가 부족하게 되었으니, 토지대장에 따라 원주인에게 돌려줄 것.

4. 세금을 거두는데 향리의 횡포와 권세가의 거듭되는 징수로 백성의 생활이 곤란하니 유능한 수령을 파견하여 금지케할 것.

5. 근래 각 지역의 관리들이 공물 진상을 구실로 약탈 행위를 일삼고 사취하기도 하니 공물 진상을 금할 것.

6. 지금 승려 한 두 사람이 궁중에 무상 출입하고 왕이 내신으로 하여금 불사(佛事)를 관장하여 곡식을 민간에게 고리대를 함으로써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곡식 대여를 금할 것.

7. 근래 여러 고을의 관리들 중에 재물을 탐내는 자가 많으니, 그들의 능력을 가려 유능한 자는 발탁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징벌할 것.

8. 요사이 신하들의 저택과 복식에 사치가 많으니 검소한 생활을 할 것.

9. 함부로 사찰을 건립하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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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전시과 관련 내용

처음으로 그는 역분전을 정하였다. 통합시의 조신(朝臣), 군사들에게 관계(官階)는 논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성행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 지급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고려사> 식화지, 전제

고려의 전제는 대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개간된 토지의 넓이를 총괄해서 그 기름 지고 메마른 것을 나누어 문무 백관으로부터 부병(군역을 책임지는 장정), 한인(관리 신분이면서 벼슬을 못하고 있는 자)에게까지 과(땅을 나누어 주는 등급)에 따라 전지를 주지 않음이 없었고, 또 그 과에 따라 시지(땔감을 얻는 땅)을 주었는데, 이를 전시과라 한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 나라에 다시 반납해야 한다. 그러나 부병만은 나이 20세가 차면 비로소 땅을 받고 60세가 되면 반환하는데, 자손이나 친척 이 있으면 전정(전지)을 믈려받게 하고, 없으면 감문위(6위의 하나로 궁성 안밖의 모든 문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에 적을 두었다가 70세 이후에는 구분전을 지급하고 그 나머지 땅은 환수 하였으며, 그가 죽은 다음 그의 유가족이나 미망인에게는 모두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또한 공음 전시가 있어 과에 따라 땅을 지급하여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였고, 공해 전시가 있어 장택(왕실), 궁원, 백사(여러 관사), 주현, 관역(사신을 유숙시키는 관사와 사신에게 말을 제공하던 역원)에 지급하였는데 모두 차등이 있었으며, 뒤에 또 관리의 녹이 밝혀지자 기현(경기도 안에 있는 현)의 녹과전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전재

경종 때에 창설된 전시과는 그 후 성종대를 거쳐 목종 원년(998) 12월에 이르러 개정되었다.... 성종대는 내외의 관제가 마련되어 지배 체제가 제자리를 잡아간 시기였다. 그러므로 목종 원년의 개정 전시과는 이러한 지배 질서의 성장과 그에 따르는 관인 체제의 발전에 호응하여 이룩된 토지 제도의 정비라 할 수 있다.... 개정 전시과는 우선 그 규정 내용이 퍽 간편하고 체계화되어 전체 관인을 한 계통 안에 망라하고 있다. 문무 양반을 증심으로 제정된 이 전시과는 종래 전시 지급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공복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품이라는 막연한 요소도 제거 하고 오직 관직과 위계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18과로 나누어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박용운,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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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불교

가만히 생각하면 성인이 가르침을 편 목적은 행(行)을 일으키려는데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이다... 정원 법사는 ‘관(觀)을 배우지 않고 경(經)만 배우면 오주(五周)의 인과를 들었더라도 삼중(三重)의 성덕(性德)은 통하지 못하며, 경은 배우지 않고 관만 배우면 삼중의 성덕을 깨쳐도 오주의 인과는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쓰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의천, 대각국사문집>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 정은 곧 혜인 까닭에 허공처럼 텅비어 고요하면서도 항상 거울처럼 맑아 영묘하게 알고, 혜는 곧 정이므로 영묘하게 알면서도 허공처럼 고요하다.

<보조국사법어>

한 마음(一心)을 깨닫지 못하고 한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인데, 부처는 이 한 마음을 깨달았다. 깨닫고 아니 깨달음은 오직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를 찾을 곳은 없다.

<지눌, 정혜결사문>

먼저 깨치고 나서 후에 수행한다는 뜻은 못의 얼음이 전부 물 인줄을 알지만 그것이 태양의 열을 받아 녹게 되는 것처럼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았으나 불법의 힘으로 부처의 길을 닦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늘, 수심결>  

현종 원년 윤 2월에 燃燈會를 회복 하였다. 나라의 풍속에 王宮과 國都로부터  鄕邑에 미치기까지 정월로 부터 두 밤을 연등 하였는데, 성종이 이를 번잡하고 소란하여 온당치 못하다하여 없앴던 것을, 이 때에 회복한 것이였다.  

2년 2월에 연등회를 淸州 行宮에 설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2월 15일에 행함을 관례로 하였다.

문종 2년 2월 甲申에 연등 하였는데 15일이 한식이므로 이날에 행하였다.

연등회

태조 원년 11월에 有司가 말하기를 “ 前主는 매년 겨울에 八關會를 설하여 福을 기원하였사오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 ” 하니 왕이 허락하여 드디어 구정에 윤등 일좌를 두고 향등을 사방에 나열 하였으며 채붕등에 묶었는데 각각 높이가 오장여였고, 그 곳에서 여러가지 노래와 춤을 추었다. 용,봉,코끼리, 말,차, 배는 모두 新羅에서 행하였던 것이었다.

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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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부역과 공납 제도

나라의 제도에 백성의 나이 16이면 장정이 되어 비로소 국역을 부담시 키고, 60이면 늙은이가 되어 역을 면제한다. 주군에서는 해마다 호구를 헤아려 호적을 정리하고 이를 호부에 올려 보낸다. 징병과 부역의 동원은 호적에 의거하여 뽑는다.

[고려사] 권79 식화지2 호구

편성된 호(편호)는 인구와 장정이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그 부역을 정한다. 가장이 자기 식구를 보고에서 누락시키거나 나이를 늘리고 줄여서 장정에 해당하는 연령층인데도 역의 부과를 면제받으면, 면제받은 자가 1명일 경우 징역 1년, 2명일 경우 1년 반에 처한다. 이정 (지방의 동리에서 호적 등으 사무를 맡아 보던 사람, 현재의 이장, 통장과 유사, 5호→1통 5통(이정) 잘 모르고 주민의 인구를 빠뜨리거나 나이를 늘리거나 줄여서 역의 부과에 오차가 생기면 1명에 태형 40이고 4명이면 태형 50에 처한다. 만약 사실을 알고서 이러한 일을 하면 법에 의거하여 가장과 마찬가지로 처벌한다.

[고려사] 권84 형법지1 호혼(戶婚)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태봉의 왕이 참서를 믿어 송악(경기 개성)을 버리고 부양(강원 평강)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궁실을 지으니 백성들이 토목공사에 지치 고 봄․여름․가을에 농사를 지을 시기를 놓쳤다. 더구나 굶주림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잇따라 일어나서 집을 버리고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잇따랐으며, 한 필 가는 베의 값이 쌀 6되와 맞먹게 되었다. 평민들은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종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짐은 이를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고려사절요] 권1 태조 원년 8월

정종은 당초에 도참사상을 믿어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고자 장정을 징발하여 시중(중서문하성의 우두머리) 권직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하니 부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호를 뽑아 서경에 채우니, 여러 사람이 복종하지 않고 원망하였다. 왕이 세상을 떠나니, 부역을 하는 사람들이 기뻐 날뛰었다.

[고려사절요] 권2 정종 4년 3월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요사이 듣컨대, 궁원(宮院)에 소속된 장호(莊戶)의 요역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살 수 없다고 하니 전중성(왕실에서 거느리는 사람들이나 왕실의 족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 이를 조사하여 구휼하라.

[고려사] 권3 현종 20년 9월

양반의 노비는 그 주인의 집에서 해야 할 역이 따로 있으므로 옛날부터 역과 잡세를 면제하였다.  이제 양민이 모두 세력 있는 집안에 들어가 관의 역을 부담하지 않아서 도리어 양반의 노비들이 양민의 역을 대시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일체 이를 금하게 하라

[고려사] 권85 형법2 노비, 충렬왕 24년 1월

여러 주현들에서 해마다 바치는 상공(공물대장에 기록되어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공물)의 일부인 소가죽, 힘줄, 뿔을 평포(平布)로 환산하여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고려사] 권78 식화지 l, 문종 20년 6월

왕이 명을 내리기를, ‘경기의 주현들에서는 상공 외에도 요역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이에 고통을 받아 나날이 점점 더 도망하여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계수관에 물어 보고, 그들의 공물과 역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하고 시행하라. 구리, 철, 자기, 종이, 먹 둥 소(所)에서 별공(필요할 때 수시로 거두어 들이는 공물 또는 특별한 종류의 공물)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함부로 징수해 장인들이 살기가 어려워 도망하고 있다. 해당기관에 연락하여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내는 물건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한 다음, 왕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고려사] 권78 식화지1 공부, 예종 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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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취제도

진전을 개간해 경작하는 자는, 사전의 경우는 첫해에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는 농지의 주인과 반씩 나누어 가진다. 공전의 경우는 3년까지는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고 4년째부터는 법에 따라 조(지대)를 바친다.

[고려사] 권78식화지1 전제 광종 24년 l2월

공전의 조(租)는 4분의 1로 하되, 논은 상등 1결에 조 3석 11두, 중등 1결에 조 2석 11두, 하등 1결에 조 l석 11두로 하고, 밭은 1결에 조 1석 12두, 중등 1결에 조 1석 l0두이며, 하등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조세, 성종 l1년

처음에 좌창(관리의 녹봉을 맡아 보던 관청)과 우창(왕실의 양곡을 맡아 보던 관청)에서는 곡식의 말을 재는 것을 법대로 하지 않고 쌀 10석을 받을 때 정액 이상으로 더 받는 것이 2되나 되었다. 지방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거듭 수탈하여 오랫동안 패단이 되었다. 요즈음 이를 고치려고 하여 1석에 대하여 모미(운반, 저장 등을 할 때 손실을 입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거두는 쌀)까지 합하여 l7두를 넘지 못하게 하였더니, 군소 관리들이 이에 불만을 가지는 기색을 보였으므로 이에 이르러(l173년) 명령을 내려 옛날대로 하기로 하였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조세, 명종 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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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와 음서제도

왕 16년 12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에게 음직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성종>

양반 6품 이상 관리의 자손 중 한 명을 입사 (처옴 벼슬 자리에 나감)하도륵 하였다.  

<고려사> 선거지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널리 앉히고, 관작를 팔고,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바치는 믈컨이 넘치게 모여드니, 썩어저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고려사> 이자겸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와 함께 아버지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올 비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왕이 김돈중 등에게 말하기를 ‘듣컨데 경들이 과인올 위해 복올 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장차 가저 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또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인근의 백성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등과 그 밖의 진귀한 꽃과 기이한 화초를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만들었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절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 잔치를 떼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이 매우 사치스럽고, 음식이 극히 진기하여 왕이 재상 및 가까운 신하들과 더불어 흡족하 게 즐기고, 김돈증, 김돈시에게 백금과 3정과 비단 각 10필, 거란산 실 70근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김돈증

이자겸은 풍모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평하고 즐거우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오랑캐) 중에서도 능히 왕실을 도울 줄 아는 자니, 역시 어진 신하라 할 만하 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토지와 제택(살림 집과 정자)을 치장하여 논발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 웠으며, 사방에서 선물이 들어와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태조왕건 및 그 후손들은 오랜 동안 호족 세력때문에 시련을 당해야만 하였고 따라서 왕실은 가능한 한 무력을 가진자를 견제하였으므로 정치는 자연히 과거로 진출한 문신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문신관료들은 지배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문벌귀족화하였는데 이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과전, 공음전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력을 확보하였으며, 이들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에 의해 관직에 나가고 가문을 배경으로 요직으로 승진하였다.

문공인은 아려하고 유순하였으므로 시중 최사추가 사위로 삼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는데, 가세가 단한하였으나 귀족과 흔인하여 호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비록 이름이 있는 고관이라 할 지라도 반드시 과목(科目:과거)을 거쳐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이외에도 천거(薦擧:추천제)와 문음(門蔭), 성중애마(成衆愛馬:왕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 잡로(雜職:궁중의 실무를 담당 )를 통한 길이 있어 관리로 진출하는 길  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양반 5품이상의 자손 중 한명을 입사(入仕: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것)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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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신분 제도

옛적에 우리 태조는 후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무릇 천인의 무리들은 그 종자가 별다르니 이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면, 뒷날 반드시 관직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차차 요직을 차지하여 국가를 흔란스럽게 만들 것이니, 만약 이 훈령을 어기면 사직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은 8대 동안의 호적이 천인의 무리와 관계가 없어야 비로소 벼슬을 할 수 있다. 무릇 천인의 무리에 속한 자는 아비나 어미 한쪽이 천인이면 자기도 천인이 된다. 비록 본주인이 놓아 주어 양민이 되더라도 그가 낳은 자식은 도로 천인이 된다. 또 본주인이 후손이 없이 죽더라도 주인 가문의 노비에 속하게 된다. 이것은 노비를 끝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려사] 권85 형법2노비, 충렬왕 26년 10월

무릇 도망한 노비를 숨겨 주어 자신이 차지하는 자는 1일에 초 3자라는 법률에 의거하여 베 30자를 징수하여 본주인에게 지급하되, 비록 날 수가 많아도 노비의 원래의 몸값을 넘지는 말아야 한다. 남자 노비의 몸값은 나이가 16세에서 60세까지는 베 100필,  l5세 이하 및 60세 이상이면 60필이고, 여자 노비는 나이가 15세에서 50세까지는 120필, 16세 이하 50세 이상은 60필이다.

[고려사] 권86 형법2노비, 성종 5년 7월

군현 사람이 진․역․부곡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는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인이 천인과 결흔하여 낳은 자는 절반씩 나누되, 남는 수는 어머니를 따르게 한다. 

[고려사] 권84 형법1 호적

 

  기 준

 가 정

 재 산

 

외거

노비

 주인과  별도생활

 가능

 가능

노비공

(奴婢貢) 바침

솔거

노비

 주인과 함께생활

불가능

불가능

 

 <노비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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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태조 26년(943)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가 앉아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친히 훈요를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들으니 순 임금은 역산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마침내 요임금의 왕위를 받았으며 한의 고제 패택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업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나도 역지 한갖 외로운 평 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삼한을 통일하여 외람스럽게 왕위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고 몸도 벌써 늙었다 후손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 잡혀 나라의 질서를 문란시킬 듯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계를 써서 후손들에게 전하노니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구히 모범으로 삼게 하기를 바란다.

첫째, 우리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 사원들을 창건하고 주지들을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간신이 권력을 잡으면 승려들이 청탁을 받아서 모든 사원들이 서로 쟁탈하게 될 것이니 이런 일을 엄격히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의 의견에 의하여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의 말에 의하여 자기가 선정한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을 손상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 왕비, 대관들이 각기 원당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은 사원들을 증축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근심이 되는 바이다. 신라 말기에 사원들을 야단스럽게 세워서 지덕을 훼손시켰고 결국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셋째, 적자에게 왕위를 계숭시키는 것이 비록 떳떳한 법이라고 하지만 옛날 단주가 착하지 못하여 요가 순에게 나라를 선양한 것은 실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후세에 만일 국왕의 맏아들이 착하지 못하거든 차자에게 줄 것이며 차자 또한 착하지 못하거든 그 형제중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는 자로써 정통을 잇게 할 것이다

넷째,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다섯째, 내가 삼한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의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수맥의 근본으로 되어 있으니 만대 왕업의 기지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사계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거기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게 할 것이다.

여섯쌔,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5악, 명산, 대천, 용의 신을 섬 기는 것이다.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지할 것이다. 나도 당초에 이 모임을 국가 기일과 상치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굳게 맹세하여 왔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이다

일곱째, 임금이 신하의 신망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그 신망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간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하는 자를 멀리하여야 하는 바 간하는 말을 따르면 현명하게 된다. 참소하는 말은 꿀처럼 달지만 그것 을 믿지않으면 참소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되 적당한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경하게 하며 조세를 적게 하는 동시에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자연히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미끼 끝에는 반드시 큰 고기가 물리고 중한 상(賞)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겨누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착한 정치를 하면 반드시 착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다. 상과 벌이 적절하면 음양이 맞아 기후까지 순조로워지니 그것을 명심하라.

여덟째, 차현이남 금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에 참여하거나 왕후, 국척들과 혼인을 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역의 잡척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혹은 왕후, 궁중에 아부하여 간교한 말로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떻게 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민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홉째, 백관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를 따라 일정한 제도를 마련할 것이니 현재의 것을 증감하지 말라. 또 옛 문헌에 이르기를 공로를 보아 녹봉을 규정하고 사사로운 관계로 관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일 공로가 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으로저 헛되이 녹봉을 받게 되면 아래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역시 그 행복을 길이 누릴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엄격하게 이를 경계해야 한다.또 우리는 강하고도 악한 나라(거란)가 가까이 있으니 평화로운 시기에도 위험을 잊어서 안된다. 병졸들을 보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며 부역을 면제하고 매년 을에 무예가 특출한 자들을 검열하여 적당히 벼슬을 높척주어야 한다.

열째, 나라를 가진 자나 집을 가진 자는 항상 만일을 경계하며 경전과 타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지금의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 주공은 성인으로서 [무일(無逸)] 한 편을 성왕에게 을려 그를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그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붙여 드나들 때에 항상 보고 자기를 반성하도록 하라.' 이 열 가지 훈계 끝에 매번 ‘중심장지(中心藏之)’라는 네 글자를 써붙여서 후대의 왕들이 전해내려 오면서 보배로 여기게 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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