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야기'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4건

  1. 2007.12.22 (일본사 이야기 23장) 일본의 개항 과정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내용 (10)
  2. 2007.12.08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3)
  3. 2007.10.24 일본사 이야기 21 - 역사의 흐름은 유통경제의 발달이었다.
  4. 2007.10.21 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5. 2007.10.18 일본사 이야기 19 - 에도막부의 등장과 문물 정비 (2)
  6. 2007.10.17 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에 이른 다이묘들의 시기 (1)
  7. 2007.10.13 일본사 이야기 17 - 무로마치 막부의 경제정책과 막부외 붕괴
  8. 2007.10.13 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9. 2007.10.13 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막부타도운동과 겐무신정) (3)
  10. 2007.10.12 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3)
  11. 2007.05.06 일본고대사에 대한 총체적 분석(일본고대사를 마치며 요약 정리) (16)
  12.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13 -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 핵심 알기 (10)
  13.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12 - 가마쿠라 막부의 사회 구조와 법, 종교 분석 (4)
  14.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11 - (중세입문)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과 봉건제도의 성격 개관 (5)
  15.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10 - 나라시대와 헤이안 시대, 그리고 일본 중세의 시작! (7)
  16.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9 - 고사기, 일본서기의 분석(편찬 내용과 줄거리, 역사왜곡부분을 중심으로...) (3)
  17.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8- 다이카 개신기 이래의 토지제도 <반전수수법>등을 중심으로...
  18.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7 - 다이카 개신과 율령반포 (3)
  19.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와 다이카 개신 (2)
  20.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5 - 불교이야기 하나면 일본 고대사가 정리된다! (5)
  21.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4 - 야마토 정권의 성립 (4)
  22.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3 - 일본 고대사를 한 눈에 개관해보기!! (2)
  23. 2007.03.09 일본사 이야기 2 - 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국에 대한 논쟁 (5)
  24. 2007.03.09 일본사이야기1- 죠몬시대, 야요이 시대 (13)

(일본사 이야기 23장) 일본의 개항 과정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내용

오늘 이야기할 부분은 일본사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 중의 하나인 일본의 개항과정입니다. 일본 근대사의 핵심인 메이지 유신을 다루기 위해 그 배경을 살펴보는 시간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다양한 서양선박들이 나타나다...

일본의 근대화기인 19세기 전반에 수많은 서양의 배들이 일본에게 장사를 요구합니다. 이 때 서양 선박들은 일본만 간 것은 아니였죠. 세도정치기인 조선과 기울고 있던 대륙의 청나라에도 서양배들은 끊임없이 장사를 요구하는 시기였거든요. 당시 인도라던가, 동남아시아 등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들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서양이 아시아에 통상(장사) 요구를 하게 된 것은, 서양의 산업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유럽의 산업혁명은 사람의 노동 대신, 기계를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엄청난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산업혁명의 출발지인 영국은 <양모산업>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진행된 인클로저 운동 기억하시나요? 인클로저(En_closer)란, 말 그대로 양을 기르기 위해 안에다가(in), 울타리를 치는(close) 사업이었죠. 원래 인클로저는 17세기쯤에 시작되었는데, 19세기 인클로저는 양 뿐만 아니라 각종 공장 기계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 소유권을 주장하고, 원주민과 농업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형태로 까지 전개됩니다.

결국, 산업혁명을 통해 공장에서 찍어낸 가장 큰 수출품이 바로 면직물로 대표되는 <옷>이었죠. 그러나, 각종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서양은 자체 수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원료은 옷감을 가져올 식민지가 필요했고, 더불어 제품을 팔아먹을 시장도 필요하게 되었죠. 19세기 유럽의 각 국가들은 산업혁명의 단계에 따라 시차를 두고 아시아에 각각 진출하게 됩니다.

조선과 에도막부에 가장 먼저 접근한 세력은 에제 에카테리나 2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러시아였습니다. 지리적으로 러시아가 가장 가까운 국가였으니까요.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보다 훨씬 산업혁명 단계가 늦었던 관계로, 동북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무역을 하지 못한 채 영토 확장만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 피바람을 불러온 나폴레옹 전쟁 때, 대륙봉쇄령을 어기면서까지 전쟁에 직접 관여했기 때문에 일본에 진출하지 못하였죠.

실제로 일본에 통상을 요구한 국가는 오랫동안 일본과 교류하던 네덜란드였습니다. 이미 일본은 네덜란드의 <난학>을 받아들이는 등 네덜란드와는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여기에 도전장을 낸 국가가 산업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에도막부에게 상업협정을 맺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세계와의 교류를 단절해 온 에도막부는 밀려오는 외국 선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였습니다. 기껏 처리한다고 내놓은 법이 <무휼령>이란 법이었죠.

무휼령이란, 외국세력이 어떤 의도이고, 어느 정도 힘인지 모르기 때문에, 외국 선박이 오면 조용히 사바사바~(?)해서 돌려보낸다는 정책입니다. 외국에게 납작 업드려 배에 연료도 넣어주고,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준 다음에 바아바이~~ 환영해주고 보내는 정책이죠.

그러나, 이 무휼령이 영국에게는 먹히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먹을 것 얻으러 먼 아시아까지 온 것이 아니였거든요. 그들이 원한 건 <통상조약>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페리 대령의 페튼호는 강경하였습니다. 영국 선박은 라이벌인 프랑스가 일본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을 인질로 잡기 까지 하면서 일본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무휼령>을 버리고, 서양 선박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것을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외세는 힘으로 제압하다고 하여 <타불령>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첫 진출한 영국을 몰아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중국 청과의 아편전쟁을 통해 대륙부터 장악하느라 더 이상 일본에 신경쓰지 못하였거든요.

영국이 대륙에 신경쓰는 동안, 일본에 진출한 국가는 태평양을 건너 온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막 산업혁명을 진행하고 있던 국가였죠. 일본은 그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미국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2-3차례 미국과의 통상요구를 거부하다가 결국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세계사의 일원으로 편입됩니다.

2.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내용들....

이제 일본은 미국이란 나라와 조약(수교)을 맺습니다. 아시아의 근대화에서 각국이 서양과 맺은 조약들은 공통적인 속성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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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를 주장한 서양의 국가가 원한 것은 무역을 위한 <항구개항>입니다. 항구를 개항해서 자신들의 물품을 아시아에 팔고, 필요한 원료를 자국에 가져가려는 것이죠. 그리고, 개항한 항구를 지키기 위해 항구 근처에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원활한 장사를 위해 각종 법과 관세률을 적용하는 것이죠.

수교를 허락한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서양식 근대화 체계를 갖추는 것을 원하지만 실제 그렇게 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서양 세력이 1차적으로 원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마련된 잉여자본을 투자할 대상국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일본의 첫 수교 역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1854년 미국과 최초로 맺은 조약은 <미일화친조약>의 핵심 내용은 <항구개항>입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 내내 네덜란드만을 무역 대상국으로 지정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 1군데에서만 무역을 해왔죠. 나가사키는 일본 서북쪽 끝으로 일본 수도와는 동떨어진 곳이어진 항구도시였습니다.

미국은 조약을 맺으면서 <하코다테와 시모다> 2개의 항구 개항을 요구합니다. 일본이 항구를 개항하면서 미국의 물품이 일본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1858년 추가 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국가에 강요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을 조약에 추가시켰습니다. 그 내용은, 치외법권(영사재판권), 관세권,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죠. 한국사할 때, 하나 하나를 자세히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이 내용들을 이야기해 볼께요.

치외법권은 불평등 조약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역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지요. 만약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일본은 그 외국인을 재판할 수 없습니다. 그 죄가 살인이라고 해도 말이죠. 미국인은 미국에 송환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치외법권은 한 국가의 자주성마저 침해하는 조항입니다.

관세권은 무역에 대한 일방적인 독점 조약입니다. 미국이 일본에 물품을 판매한다고 했을 때, 일본은 미국물건에 대해서 자유롭게 관세(세금)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세금 장벽이 낮아질수록 미국은 자유롭게 물품을 팔 수 있고, 일본으로서는 외국 물품을 막을 수 없을뿐더러 국가 재정에도 타격을 입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최혜국 대우는 조약 당사자인 <미국>이 일본에서 누릴 수 있는 대우를 다른 국가 이상으로 설정한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영국이나 프랑스가 더 좋은 조건에서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는 다면, 미국은 그들 국가만큼의 대우를 자동으로 받는 다는 내용이죠. 따라서 다른 국가와의 불평등한 조약 내용이 이전에 맺은 미국과의 조약에도 영향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훗날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 조약> 및 다른 각종 조약을 맺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고스란히 써 먹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근현대사에서 아시아 국가가 서양과 조약을 맺을 때, 첫 조약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면, 언급한 <최혜국 대우>라는 것을 모든 서양국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와 맺은 조약의 내용은 다른 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때 거의 자동으로 포함되기 때문이죠.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서양의 국가들은 일본과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 거의 전부를 똑같이 요구하고, 몇 가지를 더 추가 요구하게 됩니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은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논리로 <균점의 논리>라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균점의 원리란, 영국보다 늦게 식민지 시장에 뛰어든 미국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강한 나라들은 거대한 식민지 시장이 눈앞에 있을 경우에 서로 전쟁을 통해 영역을 넓히는 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각종 조약을 균등하게 맺음으로서 시장을 나눠먹는다는 원리입니다.

이 균점의 원리는 아직 어떤 나라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중국, 조선, 일본 등 동북 아시아에서 적용되었습니다. 서양 각국은 이곳에서 철도든 항만이든, 광산이든 하나의 권리라도 더 갖기 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조약을 청, 조선, 에도막부와 체결하려고 난리였죠.

결국 일본은 미국부터 시작해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는 동안 서양 각국이 원하는 항구를 모두 개방하게 됩니다. 이 때 서양과 무역을 하기 위해 개방한 대표적인 무역항은 <요코하마>였습니다. 미국과의 무역 중심지였죠. 그러나 미국과 무역에서 5개 항구를 개항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일본 대부분의 항구들이 개방됩니다.

자, 그럼 개항이 일본 에도막부와 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 어떤 현상이 일어났기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개혁이 시작되었을까요? 다음 장에서는 통상 조약 이후에 벌어진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막부 타도로 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1. 에도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하다.

오늘부터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메이지 유신>이겠죠? 그럼, 오늘부터는 <메이지 유신>을 키워드로 삼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배경과 내용,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본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네요. 그럼 한번 출발해 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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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장까지 에도 막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에도 막부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막부의 경제정책>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17-18세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는 새로운 농법이 계속 개발되면서 상업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죠. 당시 동아시아 각 국가에는 부유한 농민, 부유한 상인, 상품경제 발달과 화폐유통의 증가라는 수식어가 공통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경제를 우선시하였고, 당시 3국은 공통적으로 <성리학이 관학화>된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을 제 1의 근본산업으로, 상업은 농업을 보조하는 보조산업으로 인식하였죠. 성리학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도와 차별적인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니까요.

일본 역시 그랬습니다.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막는 입장이었고,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농촌 자본으로 돌리던가, 막부의 재정으로 돌리려는 극단적인 방책을 사용하여 <사회제도와 신분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막부는 이 상품 화폐 경제로 인한 이득을 <세금>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상업자본은 성장하면서도, 그 이윤의 전부를 재투자할 수 없었고, 자본이 없으면서 세금이 늘어난 하층 무사들은 빈곤함으로 힘겨워하였습니다.

일본은 18세기가 지나가면서 사회분화가 심해져갑니다. 부자농민들(호농, 부농)은 상품작물을 재배하면서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있었고, 남은 자본으로 수공업에 뛰어들어 대기업을 이루게 됩니다.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부유상인들은 전국적인 상업망을 이용하여 장시를 활성화하였고, 도시 중심의 상업문화(죠닌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없는 자들은 한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18세기 몰락한 양반들이 상민들에게 천대받는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몰락한 무사들은 부유한 상민보다 못한 처지가 됩니다. 하층 무사들과 가난한 농민들은 점차 에도 막부에 질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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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늘어날수록 막부는 더욱 더 많은 세금을 걷어내면서 막부를 유지해나가는 상책도, 중책도 아닌 최하책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세금은 토지에 집중되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청, 조선, 일본은 모두 세금을 <토지>로 집중시켜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일조편법과 지정은제>, 조선의 <도결제와 삼정의 문란> 등은 세금을 가장 걷기 편한 <토지>에 때려 버린 제도였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세금은 영지세(연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세금이 증가할수록 시중의 물가는 뛰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펐죠. 물가가 오르면 새로 성장하는 도시상인이나, 부유한 농민들은 시세차를 이용해 더욱 재산을 불렸고, 능력없는 하층민들은 더욱 빈곤해집니다.

더 문제점은, 그나마 성장하는 새로운 농민, 상인들마저 국가가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세금만을 걷어 막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지 이들을 이용하여 <근대화된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막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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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인가, <죠닌 문화>인가의 논쟁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논쟁은 각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근대화가 되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근대화라면 중국의 근현대사는 유럽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명, 청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조선에서 근대화의 시작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학자들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흥선대원군기에 이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실학자들로부터 근대화의 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 근대화의 법령이 반포된 갑오개혁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개화파의 등장이나 갑신정변이 근대화의 계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개혁군주인 정조 때부터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근대화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근대화라는 것은 최소한 3가지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일단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도입된 시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사상>이 도입된 시기를 근대화의 기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사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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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근대화 논쟁은 크게 두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입니다. 두 시기란, 에도 막부 후기와 메이지 유신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에서 찾곤 합니다.(일본 교과서 견해)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상을 직접 받아들여 실천한 시기가 메이지 유신기였고, 그것을 법으로 반포한 것도 메이지 유신기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 근대화의 공신은 메이지 유신기의 뛰어난 <몇몇 인물>들의 업적에서 찾곤 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은 1854년 미일화친 조약으로 <미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므로, 1854년이 일본 근대화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죠.

그러나,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에도막부기 지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일본 근대화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근대화가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선에서도 정조 때부터 이어진 연암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 김옥균(갑신정변) - 갑오개혁기 개화파 등의 인맥을 따라가면, 근대화의 인맥적, 사상적 발원지를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18세기 상품 화폐 발달과 상인층이 성장하면서 <죠닌 문화>를 이끌어간 중신층들이 그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동업조합과 도시문화를 이끌어 가면서 학교를 세웠고, 사상과 인맥을 계속 유지해 나갔습니다. 대상인들은 서구식 독점 자본주의와 비슷한 상행위를 하였고, 미쓰이 등 재벌이라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쇄국정책 속에서도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여 학문(난학)을 유입하였고, 이 학문을 일본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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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로 보는 이들은 이 주장의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합니다.

첫째, 상인들이 돈을 벌었지만 에도막부는 과도한 세금을 걷어가 상업자본이 균등하게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당시 상인들이나 부유한 농민에게 법적으로 사유재산권이 인정된 적도 없고, 그 권리를 유지할 방안도 없었다는 점.(막부가 무력으로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기는 시대에 자본주의라 말하기 어렵다는 거죠...)

셋째, 에도 막부의 국가 정책이 상업을 억압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의 중농주의였다는 점 등입니다.

어떤 관점이 맞는 지는 일본 학자들이 알아서 싸우고 결론내리겠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죠. 다음 장의 이야기는 일본의 <통상조약 체결 과정>과 <막부타도운동의 전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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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사 이야기 21 - 역사의 흐름은 유통경제의 발달이었다.

1. 막부의 중농정책과 떠오르는 상인들

 

에도막부는 다른 막부들 보다 훨씬 더 철저한 중농정책을 실시한 막부였습니다.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국내외 무역을 통한 재정 확보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에도막부는 사회 분위기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어느 정도 잉여생산물이 축척된 농업 자본을 막부의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직업의 근간은 농업이었고, 성리학적 분위기에 의해 상공업은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발전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막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중국, 조선에서 선진 농법이 계속들어오면서 농경지의 면적은 계속 증가하고, 개간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광작(넓은 영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것)이 성행하고, 농촌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확보한 부농과 토지가 없는 빈농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가죠? 에도 막부 역시 같은 시기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정부가 농업을 강조하면서 농업 생산력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그 결과 농업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창출한 부유한 농민(부농)과 토지를 잃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 빈곤한 농민(빈농)이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농업경제 발달이 양반층에도 부유한 양반과 몰락한 양반을 초래했듯이, 일본에서도 무사층의 분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부유한 무사들은 영주가 되어 엄청난 재력을 축척하지만, 빈곤해진 무사들은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또 빈곤해진 무사들은 조금밖에 없는 토지에서 최대한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농민들에게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게 되어, 사회가 동요하고 농민반란이 많아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임술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세요.

반면, 농업경제의 발달로 남는 생산물을 시장에 유통하려는 세력이 등장하면서 5일장이 확대되고, 재산을 축척한 상인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대상인 집단은 농촌경제를 이끌어간 부농출신도 있었고, 처음부터 상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시작하여 유통경제의 신화를 이룬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농업을 중시하는 막부의 경제정책이 점차 무너지고, 도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에도 막부의 전통적인 카스트적 신분질서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2. 대상인이 출현하였으나, 정부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조선, 명, 에도막부 후기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은 이렇게 축척된 상업자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의 당시 관학은 모두 성리학이었습니다. 3국가 모두 후기에 좀더 실용적인 양명학이 성행하고 실학과 국학이 등장했지만,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거나, 지배집단에서 소외된 이들이 받아들인 학문이였습니다. 전통적인 농업주의의 유교이념에서는 <중농주의>를 근간으로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이 경제의 원칙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역시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미쓰이 등 재벌가가 등장하였고, 이 재벌가들은 금융업을 통해 막부, 번보다 더 큰 경제적 위세를 떨치게 되었죠.

대상인들은 동업자 조합을 만들고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 상품 가격을 통제하였습니다. 서양식 길드 체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상공업자들은 도시의 대상인들과 결탁하여 서로간 상업규칙을 마련하고 동업조합의 운영절차를 작성하였습니다. 서로간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의 운영방식을 정하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도시내 상공업을 완전 독점 장악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중농정책을 고집하면서도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국가 경제권은 상업자본이 가지고 있었고, 쇼군과 다이묘도 금융업자들에게 많은 부채를 지고, 상업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막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업이 근본산업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전통 농업경제이념인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계속 주입하는 정도였습니다. 또, 지나친 상공업에 의한 <사치>는 위험하다는 입장에서 <검약령>을 내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소상인들을 농업으로 복귀시키는 <귀농령>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에서 등장한 상업자본 역시 명,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로의 경제적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명, 조선과 달리 일본의 자본주의는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그 자본이 사회전체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자본에 의한 새로운 신분질서와 경제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비록, 에도막부에서 이전과 다른 상업자본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본은 도시내 동업조합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자본으로 근대적 독점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자본인 듯 합니다.

또, 축척된 상업자본은 막부의 군사력에 의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실제 막부는 상업자본이 막부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언제든지 상업자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즉, 에도 막부의 상업자본은 막부와 결탁하거나, 막부 재정에 협조하는 형태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에도 막부기 일본의 근대화론은 아직 시기 상조의 이론같습니다. (에도 막부가 일본에서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신해통공이 이루어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된 조선 정조 때도 근대화 기점으로 생각해 볼만 하네요.)

 

3. 도시 중산층의 문화가 등장하다.

에도 막부 후기, 급격하게 발달한 상공업은 무사계급과 다른 <중산계급>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산계급이란, 도시 상인계급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도시 상인들은 기존 무사 계급의 문화와 차별되는 좀더 서민적인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보통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도시 중산 문화를 <죠닌 문화>라고 부르죠.

죠닌 문화의 핵심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전국적으로 등장하여 <교육의 기회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산층들은 더 높은 문화와 신분 상승을 위해 장남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고, 차남 이하는 상인교육을 시켜 가문을 유지하였죠.

이 죠닌 문화는 서민적인 통속소설, 가부키 등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로 발전합니다. 18세기 이후 일본의 겐로쿠 문화, 가세이 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면서 무사 중심의 상층 문화가 점차 상인 계급의 문화로 이동하였습니다. 특히, 돈 있는 상인들은 일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이 문화의 척도라 생각해서, 풍속화(우키요에), 목판화(니시키에) 등의 회화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또, 중국 당나라 시기 견당사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차를 마시는 예법(다도)이 지배층을 넘어 죠닌층에게 확대되어, 다도 예법은 일본인 모두에게 교양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4. 성리학보다는 실학이 필요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이념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탈피하여 새롭운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보고, 백성과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자는 경향을 역사학계에서는 <실학>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실학은 <토지 경작자에게 토지를 맡긴다>는 이념의 중농학파, <상공업을 통한 부국강병을 실현한다>는 중상학파, <우리 것을 알아 실사구시로 활용한다>는 국학론 등이 있었죠.

일본 역시 새로운 경향의 사회이념이 유사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일본 에도 막부의 국가 유학은 조선에서 건너간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군신상하의 대의명분과 사무라이 윤리에 활용하기 좋은 <주자학>이었죠. 막부 지배층은 막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의 충성, 의리, 대의명분, 국가 윤리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 후기가 되면서 양명학자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는 성리학의 <격물치지>보다, 실천과 수양이 먼저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사회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화하면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죠. 그러나, 막부는 사회 동요를 막기 위해 양명학을 금지하고, 국가 관학은 오로지 성리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양명학은 책을 읽는 깨달음보다 실천이 우선이라는 간명한 논리로 지배계층에서 소외당한 하층 무사나 도시 상공업자에게 환영받습니다. 또 성리학이 강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논리와 다르게, 지역의 자율성이나 도시의 상공업 활동에 관대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양명학을 <반체제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였답니다.

명대의 양명학이 조선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면, 청대의 고증학도 일본에 수입되었습니다. 고증학은 중국 청조 시기에 사물의 참 뜻을 깨닫고, 원전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신유학이었습니다. 중국 청나라가 이민족인 만주족 왕조이기 때문에 유학 활동이 철학적이지 못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학문이지요. 일본에서도 이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공자, 맹자 등 중국 선진 유학자들의 원전을 연구하는 파가 등장하는 데, 이러한 파를 <고학파>라고 합니다.

또 하나, 에도 막부기 유행한 사상 중의 하나는 <난학>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친 까닭에 교류했던 서양 국가는 네덜란드 뿐이었습니다. 난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양 의학서 등을 일본식으로 해석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 후기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국학>입니다. 국학은 조선으로 말하면 <실학>이라고 볼 수 있는 학문이죠.

에도 막부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서민 문화가 널리 보급된 반면, 쇄국 정책으로 외래 문화와 사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양명학이나 고학, 난학 등이 들어왔지만 지배층 일부의 학문이었고, 서민들 개개인이 인식할 만한 학문은 아니였죠.

국학은 서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면서 이 일련의 사상들을 묶어 <일본 고유의 학문>이라며 부르는 말입니다.

일단 번학, 향학 등 서민교육기관이 증가하면서 서민적인 유학 교육으로 <도덕과 윤리 교육>이 등장하였고, 서민적인 오락이자 문학인 일본 고유의 가부키 양식이 완성됩니다. 또 풍자소설(센류)와 돌림노래(연가), 쿄카 등이 유행하였죠. 안도 쇼에키는 무가사 농민들을 수탈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민적인 학문 전통 속에서 일본 고전과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서 독자적인 일본사를 완성하고 서민들에게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들을 흔히 <국학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식 이념인 유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일본 자체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사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고대부터 내려온 고유 사상이란,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존왕왕이 사상>입니다.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강림>을 이념적으로 정리하여, 왕권의 강화가 일본 역사의 발전방향임을 강조합니다. 또 일본 고유의 사상인 <신도>를 복고해서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이 국학사상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였습니다. 일본 근대기 왕을 중심으로 모이자는 <근왕운동>, 조선을 쳐들어가 일본의 우월함을 증명하자는 <정한론> 등의 기초 이념이 국학 사상에서 이미 보여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동요하면서 막부타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성공한 그 다음 이야기는 메이지 유신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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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막부 공통의 관심사 : 재정문제

일반적으로, 일본의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막부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막부시대의 막부는 국왕이 아니라 막부의 군사지도자 쇼군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이미 군사정권으로 역사를 쭈욱~ 이어오네요. 어쩌면 근대 일본사에서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열망이 왜곡되고 군국주의로 나간 것도 천황 이데올로기와 막부정권의 전통이 일본인들 머릿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나라의 역사라는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투영된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중세에서 막부의 영양분은 <재정>이었습니다. 막부는 직접 국왕가로 불릴 수 없었고, 천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정통성>보다는 힘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재정이 필수였습니다.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것도 재정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써 싸운 무사들이 전쟁 이후 재정난에 허덕이며 보상을 해주지 못한 막부에 대하여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았거든요.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의 공무역을 재개하고, 조선과의 교린 무역, 류쿠 및 동남아시아와의 활발한 무역로를 개통함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초기 막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명, 조선의 등장 등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상황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시대 흐름을 무역로 확보로만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즉, 성장하는 농민층의 힘을 끌어안을 능력이 없었죠. 농민층의 잉여생산은 막부가 아닌 지방 다이묘들에게 넘어갔고, 성장한 다이묘들이 독립국을 세우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막부의 존립 근거인 재정을 원활히 통제하지 못한 것이죠.

2. 에도 막부 : 확실한 농민 통제로 조세를 확보하다.

반면,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들과 달리 가장 확실한 농민통제를 실시합니다.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실시했던 <변법>과 같은 부국강병책을 도용한 것이죠. 에도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가 확실한 조세 증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국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단, 농민층을 엄격한 신분으로 묶어버립니다. 에도 막부의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 이라는 신분 공식은 아주 엄격해서 농민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농민은 국가에 부역, 조세 등을 납부해야만 했죠.

농민들은 연대책임제인 <고닌구미>에 묶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한 <오가작통법>과 같은 것이었죠. 누군가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 이웃이나 친척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특히 사치하는 자들은 주변인들을 같이 처벌함으로서 서로 서로 엄격하게 감시하도록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 성리학의 토지 이념을 강조하여 토지는 하늘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고, 농민이라는 직업이 다른 2, 3차 산업의 직업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토지를 중요시하는 사회의 특징인 <가부장권>을 중요시하여 가장에 대한 항명은 쇼군에 대한 가신의 항명과 동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보다 높은 계급의 무사들은 농민들보다 우월하는 이념으로 <무사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일명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불리는 무사도는 무사가 해야할 일들을 규제하면서, <무사는 힘써 일하는 농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이념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제도적으로 막부는 <토지영대적 매매의 금지령>과 <분지제한령>을 법적으로 반포하여 농민을 보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가진 토지는 헐값에 매내할 수 없고, 상속도 법에 의한 것으로 제한한 것이죠. 이것은 소농민을 보호하면서, 국가에 내는 세금 공급자들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정책이었습니다.

3.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가 달라지다.

무로마치 막부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막부 재정을 확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보다 대외 무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쇄국이란, <서양에 대한 쇄국> 및 <농업상품에 대한 쇄국>입니다.

에도 막부는 중국,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무역은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서양과의 무역은 단절하고, 단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에도 막부의 정통성 문제와 막부 유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활발하게 일본에 진출한 것은 신항로 개척기인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상으로 크리스트교를 적극 수용하고,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에서 대포 등의 문물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설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을 막부 재정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무사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카톨릭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카톨릭 국가들과는 성격이 다른 네덜란드라는 신교 국가가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자 일본은 카톨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유롭고 활발한 무역 분위기는 엄격한 카톨릭과는 사뭇 달랐죠. 네덜란드를 이용하여 이전 카톨릭을 막아볼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에도 막부와 멀리 있는 규수 지방의 다이묘들과 무역을 계속하였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서양과의 무역을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는 카톨릭 국가들을 누르고 일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카톨릭 세력을 모략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세력들을 모두 배척하는 <쇄국정책>이 탄생한 것이죠.

이제 에도막부는 막부 재정의 근간을 무역에서 찾으려는 이전 막부의 재정책을 버리게 됩니다. 일본은 나가사키 항구 하나만을 열고, 네덜란드 및 중국하고만 무역을 했습니다.

조선과는 전통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던 대마도(쓰시마섬)에서 무역을 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대마도주가 거의 독자적으로 주도했고, 대마도주의 태도에 따라 무역의 어감이 달라지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의 존재를 거의 막부 실력자의 존재와 대등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막부가 다른 막부와 달리 오래 지속된 것은 이 쇄국정책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막부의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와 달리, 에도 막부는 일본 국내 상품을 타지방, 또는 해외에 유통시키는 것 자체까지 제한하였죠.

즉, 에도 막부의 사회는 농업기반의 자연경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막부체제는 동요없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쌓이고 쌓인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터져나오면서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새로운 부자와 상인들에 의해 도시에 <죠닌 문화>라는 중산층 문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쇄국정책으로 에도막부는 오랜 기간동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초, 중반은 일본의 평화시대이면서 일본 고유의 국학이 발전한 시대입니다. 외국 사상은 네덜란드의 <난학> 정도였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쇄국정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전 막부에서와 같이 활발한 문물 교류가 줄었고, 서구와의 교류도 원할하지 못하였죠. 미국과의 교류도 서구인들을 통해 몇 번 왕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재정이 부족하다~ - 막부의 재정확보 노력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초기 쇄국정책과 농업 안정책으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4대 쇼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정착시키면서 막부의 성격과 재정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리학의 탄생한 중국 송나라의 문치주의, 조선의 문반 우월주의가 무신정권인 막부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에도 막부에서 성리학이 국가 관학으로 정착된 것은 4대 쇼군기부터입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정권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문이죠. 충효윤리와 국가 윤리가 지배층의 이념과 절묘하게 일치하니까요. 특히 이황이 주장한 이기론과 군신관계론은 막부 지도자들의 입맞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막부 지도자들은 서양에서 넘어온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일본 전통 지배층인 불교세력을 다시 옹호하였습니다. 특히, 무가 정권에 딱 맞는 선종 계열을 중시했죠. 일본의 선종은 가마쿠라 막부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문제는 이렇게 막부 정권이 무신적인 기풍을 잃어가고 <문치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서 국가 재정이 약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초기 정책인 자영농 육성, 강력한 중앙집권, 무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제가 흔들리고, 막부가 원하지 않았던 <상인계급>이 점차 뜨게 된 것이지요. 특히 지방에서 돈좀 벌었다 싶은 자들이 장사에 나서고, 무사들마저 고리대의 맛을 알게 되면서 막부의 튼튼한 재정줄이 흔들리게 됩니다.

도쿠가와 8대 쇼군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코호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개혁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18세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인층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막부의 쇼군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검약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검약령의 중요 내용은 <식산흥업>이라는 구호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이 많이 외쳤던 그 구호네요. 식산흥업이란, 농업 생산량을 늘려 국가 기반을 단단하게 하자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식산흥업의 핵심은 토지개발과 농업장려, 품종개량, 비료개발 등이었죠.

그런데,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상품작물들은 많은 세금으로 인해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고, 국가는 세금을 미곡(쌀, 콩)으로 받아가면서 성장하던 농민층의 생산력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농민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한 만큼의 생산물을 국가가 가져간 것이죠. 이러한 정책은 짧게는 막부 재정에 도움이 되나, 장기적으로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막부 후기로 넘어가고 19세기가 되면서 막부는 더욱 더 재정 부족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19세기에 막부는 막부 존속을 위한 결단으로 <간세이 개혁>과 <톈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성장하는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같이 커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잉여생산물을 수탈하여 막부의 창고를 채우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단,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인정하여 상업자본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동업자 조직인 자를 인정하면서, 이들이 남기는 이윤은 철저하게 세금으로 걷어갑니다. 일본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일본학자들이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업자본의 수탈로 일본 자본주의가 에도막부기에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19세기 개혁의 내용은 <귀농령>입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이 살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채무를 모두 없애줍니다.(채무파기령) 그리고, 어중간한 상인들은 모두 농촌으로 돌아가라며 협박을 합니다.(구리귀명령)

이것이 에도 막부 후기의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겪은 후였고, 아시아에서도 각 국의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상업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찍어누르거나 수탈하면서 상인들을 농촌으로 돌려 보내려 한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이었죠.

실제, 막부의 재정이 몇 년간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상인과 농민을 쥐어짜고 탄압하는 정책은 무사, 농민, 상인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최하급 정책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재정 정책 실패로 가난해진 무사와 농민들은 결국 막부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사에서 막부의 패망은 모두 재정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배층인 무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막부 불만 세력들은 막부가 아닌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전통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의 이념 중 하나였던 <존왕양이론>으로 연결됩니다. 해석하면, 왕을 받들어 서양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막부가 아닌 왕이라는 개념이 일본인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 <상공업의 발달과 자본주의 논쟁>을 다루고, 일본 상업발달로 등장한 <죠닌 문화>와 막부의 대응을 살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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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사 이야기 19 - 에도막부의 등장과 문물 정비

1. 에도 막부의 철저한 신분제도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자손들은 막부를 창립하고 바로 영주(다이묘)들에 대한 통제정책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막부 자체를 에도라는 수도에 세움으로서 중앙에서 막부가 지방을 총괄하는 식으로 통제하고, 반발하는 자들을 찍어눌러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죠. 1,2,3대 막부의 쇼군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일단 에도막부는 일본판 카스트 제도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신분과 계급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막부의 계급은 4계급으로 최고 계급은 무사, 다음으로 생산자인 농민, 그 밑으로 수공업자, 상인층이 존재하는 계급구조였죠.

무사는 지배층, 농민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생산자였지만, 수공업자와 상인은 농업생산물을 부수적으로 이용하는 계급이라고 인식하여 천대하였습니다. 실제 막부 재정의 핵심이 농민들이 내는 세금이었거든요.

2. 막번체제 : 명목상 중앙통제와 실제적인 지방 분할의 조화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가문은 막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을 추구했지만, 전국시대 이후 성장한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모두 찍어누를 수 없었습니다.

실제, 막부 집권 초기에 다이묘들을 모두 막부에 굴복시키려는 의도로 다이묘들을 탄압하였다가 엄청난 반란인 <유이 쇼세츠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거든요. 초창기 쇼군들은 다이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는 <산킨고타이 제도>라던가, 다이묘들의 토지세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지만 반발만 사고 맙니다.

막부의 4대 쇼군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권한을 인정합니다. 다이묘에 대한 산킨고타이 제도를 완화하고, 다이묘(영주)들의 영지를 인정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쇼군이 전국토의 1/4 정도만 지배하고, 나머지 영지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각각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 체제라고 합니다.

막은 중앙집권을 하는 쇼군의 <막부>, 번은 지방 다이묘들의 <영지>를 말하는데, 합하여 <막번>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한없이 지방 세력에게 권한을 주면 막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대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가장 유명한 제도는 참근교대제도라고 한자로 읽는 <산킨코타이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에도 막부기 실시된 가장 강력한 다이묘 통제책이었죠.

그 내용은, 다이묘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본국 : 번)과 수도(에도 : 막)를 1년씩 교대로 왕복하면서 머물게 하는 제도입니다. 다이묘는 식구들을 중앙에 머물게 하면서 지방과 중앙의 물자 유통을 원할하도록 책임지게 됩니다.

이 제도는 구두 계약이 아니라 에도와 번 사이를 오가며 군역을 한다는 조항을 성문법으로 만든 제도입니다. 신라시대에 본인이 수도에 머문 상수리 제도, 고려시대에 호족의 아들을 중앙에 머물게 한 기인제도와 비교가 되네요.

다음으로 막부의 지방 통제책은 <공역부담제도>입니다. 원어로는 <후신야쿠제도>라고 하죠. 이것은 국가가 원하는 공공 시설을 지방에서 돈을 부담하여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댐이나 치수공사, 군사거점의 구축 등을 지방 다이묘가 책임지고, 그 성과를 판단함으로서 중앙의 재정 부담을 덜고 지방은 중앙의 위세를 확인하게 되죠.

또 <일국일성령>제도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방 다이묘가 자신의 본성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성벽을 지을 수 없다는 제도로, 성벽을 지어 중앙에 위협을 주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제도입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지방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고, 중앙에 대한 반란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가신고소의 관례>도 있었습니다. 원래 막부의 위계질서와 사무라의 정신에서는 절대 가신이 주군을 고발하거나, 부하가 장군을 모함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백성이나 향리가 수령을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법>이 있었죠.

그러나, 조선에서의 부민고소법은 성리학 윤리를 어긴 강상죄와 국가반역죄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부모건, 수령이건 고발할 수 있었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막부에서 관학화된 성리학 윤리에 의해 다이묘를 고발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에 반역을 꾀하는 다이묘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조치한 것입니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많은 정적들을 죽이는 행위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3. 건국 초기 : 행정 조직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은 건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역사처럼 신라 건국, 고려 건국, 조선 건국이라는 용어는 낯선 말이죠.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왕조가 바뀐 적이 없고, 천황가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뀐 것은 지배층으로 권력을 가진 쇼군의 가문이 계속 바뀐 것이지요. 무사 가문인 막부가 바뀐 것일 뿐, 왕조의 변화라는 우리 식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에도 막부는 아예 천황이 있는 수도인 에도에 살림을 차리고, 이전 막부와는 다르게 강력한 중앙, 지방 통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단,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쇼군입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 밑의 호죠씨 가문이 다 해먹었고, 무로마치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쉽게 망했습니다. 즉, 가마쿠라 막부는 중앙체제가 부실했고, 무로미치 막부는 지방 통제가 부실했죠.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도 막부는 <산킨고티이 제도>등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럼, 중앙은 어떻게 통제했는지 볼까요?

일단, 쇼군은 있으나 쇼군이 모든 정무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쇼군은 행정 전문가인 <로츄>를 등용하여 그가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고 쇼군의 허락을 받게 하였죠. 조선으로 보면 재상, 현대 개념으로는 대통령 밑에 총리같은 거죠. 로츄는 쇼군의 두뇌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 쇼군의 일을 돕는 와카도리요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개념으로 공무원, 일선 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국가 행정의 일선에서 뛰는 장관직이나 차관, 공무원 같은 다양한 직함들을 말하죠.

또 쇼군에게는 쇼군을 지키면서 행정관들을 감시하는 <하타모토>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역할을 했죠. 하타모토는 행정관 뿐 아니라 유력 영주인 <고케닌>들의 동향을 쇼군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지방 영주 무사인 <다이묘>들의 근황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쇼군에 충성하는 부하들이 한 직책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집착하게 될 쯤에서 자리를 옮기게 했다는 점입니다. 중앙 고위직들은 모든 직위를 서로 돌아가면서 담당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은 같이 모여 <합의>로 결정하였습니다.

즉, 이전 막부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쇼군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중앙 정치를 통제하는 효율적인 제도였죠.

다음장에서는 에도막부의 쇄국 정책과 농업정책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이야기로 에도 막부기 상공업 정책을 다뤄보기로 하죠. 일본사는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고, 핵심적인 것들만 간단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볍게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조선역사와 깊이 있게 관련된 부분들이 있어서 그 부분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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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슈고>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지토>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슈고>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하죠.

슈고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영주(다이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 슈고다이묘들이 점차 쇼군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기도 하였죠.

그 결과 1467년 발생한 슈고들의 반란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무너집니다. 이 난을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실력자들과 토지를 가진 세력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각각 자신의 지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죠.

오닌의 난으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새롭게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다이묘들을 <신흥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 신흥 다이묘들과 군사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스스로 영토를 지키려는 자치 마을 등 일본 내 많은 세력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다.

전국시대를 이끌어 간 각 지방의 대표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주변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부국강병책과 제가백가들이 등장하죠? 신라말 고려초에 골품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죠?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었죠?

마찬가지의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세력들은 분열된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한 주역으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전국시대의 각각 영주(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가신단을 통제하며 영지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데 이 법을 <분국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내 땅에서는 내 법으로 통치할테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있는 법이지요.

또 다이묘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략으로 중국에서 왕권강화에 기여한 이념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훗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 유학의 장점을 찾아 국가 권력과 군신관계 이념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일본 전국시대는 혼란기 같지만, 유학이 널리 보급되고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획기적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3.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 문물 수입에 불을 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었죠. 보통 유럽말로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멀고 먼 유럽인들이 일본에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아시아의 최강국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혀 동방무역이 원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은 인도의 문물과 특산물을 유럽에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를 뺑돌아 항로를 개척하였죠. 아메리카도 발견했구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강국들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하나님의 나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끌었던 전설의 나라 <아틸란티스>를 찾는다던가, 이슬람을 물리칠 구원자인 <존 왕>이 사는 지구 반대편 기독교 국가를 찾기를 원했죠. 그래서 유럽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새로운 문명을 가진 동쪽 끝의 국가(해가 뜨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팡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1부는 아주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 2부는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나오고 3부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옵니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3부에 나오는 나라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지팡구>였고, 일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걸리버 여행기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세기 동해바다를 일본과 서양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만하죠?

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화약과 화포술을 바탕으로 만든 대포를 일본에 전래하였죠. 당시 중국 대포의 제조법은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최무선이 염초(화약원료)만드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생난리를 치다가 기술을 배워 일본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죠. 일본은 대포와 총포의 주력 화술을 유럽에서 역수입한 것입니다.

신항로 개척기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교(개신교) 국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방 선교에 주력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장들은 크리스트교와 카톨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give and take였던 것이죠.

4.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하면 중국의 삼국지 만큼 유명한 인물 3명이 등장하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다른 인물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가 아닌 만큼 이 3명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나면 정리해 보죠.

이 중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하면 <천하포무 : 천하통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오와리의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와 공격할 상대를 잘 찾아 행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 주변국인 미노와 친선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미노를 공략하는 등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죠.

노부나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류를 잘 볼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식 총포를 도입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철포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 소규모 전투가 아닌 화포를 이용한 전술은 노부나가의 든든한 성공 전략이었죠.

또 새로운 종교인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도입합니다. 카톨릭의 도입은 포르투갈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서, 일본 고유의 기득권층인 불교세력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죠.

노부나가는 서양식 화포로 토지 영주였던 승려 세력을 억압하였고, 혼란기를 틈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죠. 노부나가의 전략은 통일을 위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신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것이여서 그 파장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를 앞세워 노부나가의 세력을 모두 끌어안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식 계승자로서 전국시대의 <통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집권은 많은 골수 노부나가 추종자들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정책이었던 카톨릭 보호 정책을 폐기하고 카톨릭과 연관된 세력들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쟁을 통하여 막부 세력의 결속을 단단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을 놓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쇼군이 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인내한 자였습니다. 그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훨씬 넘긴 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는 이전과 달리 수도명을 막부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막부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쇼군의 자격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비교해, 에도 막부는 수도에서 직접 중앙집권정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부 자체가 수도에서 전국을 통괄하는 체제로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지고 안정적인 막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에도막부는 일본 막부사상 가장 긴 시기를 지속한 막부입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어떻게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장의 키워드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과 사회통제정책>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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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7 - 무로마치 막부의 경제정책과 막부외 붕괴

1. 경제가 발달하고 서민이 성장하다.

무로마치 막부기는 일본 역사상 경제적인 성장기였습니다. 슈고 다이묘들이 지방 장원에서 경제력을 발전시켰고, 그들이 조선과 명을 공격하는 왜구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농민들이 왜구가 되어 조선을 약탈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왜구는 생활이 궁핍하여 조선을 약탈하는 자들이었지만, 왜구가 빈번해지면서 밀무역과 전문 해적질을 주로 하는 왜구도 등장하였고, 왜구인 척 하면서 자국을 약탈하는 중국밀매상들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왜구의 등장으로 조선과 명은 모두 무로마치 막부의 왜구 대응에 관심을 보였고, 왜구 진압의 대가로 무역로를 열어주었습니다. 막부는 류쿠왕국과 동남아시아까지 무역을 진행하면서 막부 재정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명과의 감합무역으로 명일무역을 독점하는 항구도시가 발달하였습니다. 사카이 항구는 명과의 무역을 책임지는 곳으로 성장하였고, 도시의 위세는 지방 세력가인 슈고다이묘와 견줄만 하였습니다. 일본사에서는 이 자유도시의 등장을 중세 길드체제 속에서 성장한 서구식 자치도시와 견줄만 하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일본에도 다이묘의 개입을 차단한 치외법권적 도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자치를 주장하는 마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2가지라고 생각되네요.(이 부분... 좀 주관적입니다....)

첫 번째는 슈고가 다이묘가 되면서 전통 마을들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행정관인 슈고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다이묘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었죠? 슈고들이 세금을 강요하고 멋대로 행정처리를 하자 마을들이 스스로 단합하면서 마을내부의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서 말했던 사회 경제력의 발전입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해양 무역을 통해 많은 선진기술들이 보급되었습니다. 또 우경이 확대되고, 면화가 재배되었죠. 고려에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당시 일본도 새로운 기술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농업 기술의 발달은 자치도시의 성장과 부농층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또 농업과 무역의 발달로 전문 직인과 동업조합의 발달하고 상업과 수공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일본에서 5일장이라 불리는 정기시장이 등장하는 시기도 이 시기이며, 화폐제도와 어음제도가 크게 발전한 시기도 무로마치 막부기입니다. 무로마치 막부기는 경제적으로는 큰 의의가 있었던 시기네요.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과물이 고스란히 농민들 손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슈고와 지토들은 장원 소유자가 되어 자치마을과 농촌 경제의 잉여생산물을 착취하려고 했고, 농민들은 영주건, 무사건, 불교승려건 간에 자신을 약탈하려는 자들과 싸워야 했죠.

그 결과 무로마치 막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는 시기입니다. 발전하는 사회경제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 그리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의 투쟁은 끝이 없었고 이것이 곧 무로마치 막부가 채 150년도 안되어 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죠.

2. 민중은 성장하는데, 막부는 붕괴되었다.

14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발전으로 서민층이 성장하면서 서민 문화는 더욱 발달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기에 서민적인 6불교가 등장했다고 이야기했었죠?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정토종과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간단명료한 선종은 서민들 사이에 더욱 유행하였습니다.

서민들은 이 불교 문화에 스스로의 문화를 더해 무로마치 문화를 이끌어 갔습니다. 예로 서민들을 위한 막간 연극(쿄켄) 공연이 성행하였고, 여러 사람이 노래를 이어부르며 감정을 공유하는 <연가>도 유행하였죠.

당시 차 예법이라 불리는 <다도>의 격식이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였는데, 서민들 역시 차를 마시는 여유와 경제력을 가지고 다도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15세기로 넘어가면서 서민들의 성장과 달리 막부의 상황은 위태로웠습니다.

막부의 재정은 명과의 무역 및 성장하는 경제력이었는데, 이것을 막부가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죠. 특히 지방 행정관인 슈고들이 남북조 시대 이후 대토지를 소유하여 슈고다이묘가 된 이후, 막부는 이들의 이권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슈고들이 서로 토지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고, 돈과 군대를 보유한 슈고다이묘들이 막부에 덤비기까지 했죠.

슈고다이묘들의 성장은 결국 실력자가 막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로 넘어갔고, 1467년부터 10년간 <오닌의 난>이라고 불리는 슈고들의 하극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3.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과 전국시대의 시작

무로마치 막부 말기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하극상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이 당시 하극상이나 혼란을 틈타 경제력을 보유하게된 자들이 있었고, 부농층 중에 기회를 잡아 다이묘(영주)가 된 자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슈고다이묘와 다른 경제로 새롭게 등장한 다이묘(영주)를 <센코코 다이묘>라고 합니다.

센코코 다이묘는 막부를 의식하지 않고 대토지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영토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관료제, 상비군을 운영하면서 독자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작은 <독립국>을 선언한 것이지요. 바야흐로 전국시대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작은 독립국은 <오아리의 작은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의 영토, 그리고 라이벌 관계로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영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막부는 이들 독립영토들을 통제하지 못하였고, 겨우 이들간의 전쟁을 막거나 불똥이 막부로 튀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소극적인 중립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죠.

15세기의 무로마치 막부는 동네 독립국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1573년 15대 쇼군을 마지막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함으로서 무로마치 막부는 망하고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오다 나부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전국시대를 이야기 한 뒤 와 에도막부시대를 개관하겠습니다. 한국사에서도 조선시대 이후와 근현대사의 기록이 많고 다룰 부분도 많듯이 일본사에서도 에도막부 이후의 시기가 다룰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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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1.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있었다. (1336-1392)

지난 장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로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막부 타도 운동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천황가가 다시 천황중심의 강력한 독재 체제를 마련한 것이 겐무 신정이었죠.

그러나, 천황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가를 도왔던 무사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특히 대장군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천황이 무사들을 무시하면서 천황권만 강화하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고, 그가 곧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가문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카가가 살았던 시기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의 벗이자, 최대의 라이벌 닛타 요시사다와 같은 명장이 같이 존재하였습니다. 아시카가는 요시사다와 천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죠. 또 아시카가를 피해 남으로 내려간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으세 아시카가에게 저항을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약 50년간 아시카가의 북쪽 왕조와 전통적 천황가문의 남쪽 왕조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에 큰 전쟁은 없었지만, 계속된 긴장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지만 휴전선 너머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국면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 것이죠. 북조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남조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2. 슈고 다이묘가 등장하다.

남북조 시대는 역사상 큰 특징적인 측면은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가마쿠라 막부에서 시작된 일본식 봉건질서가 약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즉 초기 가마쿠라 막부의 봉건제와 후기 에도 막부기의 봉건제의 과도기적 단계가 나타나는 것이죠.

원래 가마쿠라 막부의 봉건제는 쇼군, 슈고, 지토라는 개념이 확고하였습니다.

일단 쇼군은 수도가 아닌 거점, 즉 출신지나 군사주둔지에서 전국의 무사를 지배하는 식의 통치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는 쇼군이라는 직함이 이전보다 강력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각 지방의 영주들이 각각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지방 영주들이 쇼군 밑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정치 형태였죠. 우리식으로 말하면 호족 연합 정권 정도의 성격이랄까요?

그러나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로 넘어가면서 쇼군의 지방 통제가 전환됩니다. 즉, 쇼군은 지방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전국의 무사들을 통솔하고, 말을 듣지 않는 무사들은 그 식솔들을 인질로 잡아두게 되었죠.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에도막부기의 <산킨고타이 제도>입니다. 한자로 해석해서 <참근교대제도>라고도 하죠. 이 제도는 고려의 기인제도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제도가 등장하고, 쇼군이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통치하는 체제로 바뀐다는 점은 막부의 국가 장악력이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이 남북조 시대는 쇼군이 강해진 후대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었습니다. 남북조 시대의 슈고는 그 권한이 너무 막강했습니다. 쇼군(막부최고 통치자)은 지방 행정관으로 보낸 슈고를 통제할 수 없었고, 슈고에게 군사권, 경찰권을 넘어 소작세와 연공의 절반을 걷어갈 수 있는 권리마저 주었습니다.

남조에서 먼저 슈고를 다스리기 위해 슈고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북조도 차츰 이에 따라 슈고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슈고는 이제 가마쿠라 막부시기의 슈고가 아니였습니다. 단순히 막부를 위해 세금을 걷고, 감찰하는 관리가 아니라 슈고 자체가 거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된 것입니다. 슈고는 행정권을 넘어 지토가 가진 토지경제권마저 장악할 수 있었죠.

이렇게 슈고이면서 엄청난 토지마저 소유할 수 있게되어 지방 영주(다이묘)가 된 그들을 <슈고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슈고 다이묘의 개념은 남북조 시대 뿐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 전반에 걸쳐 중요한 개념입니다. 막부의 전성기를 이끈 자들도 이들이고,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과 관련된 자들도 이들이기 때문이죠. 이들이 지방의 실세가 되면서 무로마치 막부기 슈고들은 지방 <호족>처럼 되어 갑니다.

실제 남북조 시대는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정권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슈고들의 영향력이 지대하였습니다.

3.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과 전성기 :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지속되던 시기, 남조와 북조는 오랜 대립을 끝내고 통일을 합의하게 됩니다. 노무현과 김정일이 한반도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하자고 만난 것처럼, 남북조의 대립은 전쟁 위협속에서 합의로 끝났습니다.

일단 천황의 자리는 무로마치 막부가 있는 북조에게 양보한 뒤, 남조의 천황가의 후예를 황태자로 삼아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어가자는 것이었죠. 따라서 천황가는 계속 명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을 통일한 막부로서 실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정권은 무로마치 막부가 탄생하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초기에는 지방 세력이었던 슈고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려 했습니다. 특히 3대 쇼군인 아시카가 가문의 요시미츠는 동양사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요시미츠는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시기에 동아시아 상황이 급변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원인을 제공한 원나라(몽골)이 망해가면서 새로 명나라가 등장하고 있었고, 고려 역시 공민왕 이후 고려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조선왕조로의 변화를 겪고 있었죠.

이렇게 동아시아의 질서가 어지럽자, 일본 해안의 해적들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넘어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동양사에서는 이들을 <왜구>라고 부르죠. 왜구는 명, 조선에게는 너무나 골치아픈 일이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일단 조선과의 관계는 <교린정책>으로 정리됩니다. 조선은 일본 막부와는 적대하지 않되, 왜구는 철저히 토벌하였죠. 따라서 무로마치 막부는 조선과 공식적으로 공무역을 한다는 입장이었고, 조선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와 별도로 지방 권력을 가진 다이묘들과 해안 난민들은 왜구짓을 계속하였고, 조선에서는 삼포개항과 쇄국책을 적절히 써가며 이들을 막아야 했죠. 혹은 조선과의 무역에 불만이 있을 경우, 막부가 왜구의 약탈을 방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포왜란>과 같은 왜구의 약탈 사건이었죠.

요시미츠는 명과의 관계를 <감합 무역>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명나라 역시 왜구 문제가 골치거리였기 때문에, 막부가 명과의 공식 무역을 하는 대신, 왜구를 근절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지요. 따라서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공식적으로 <막부가 일본 무역을 대표하는> 형태의 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명나라는 무로마치 막부에 <무역허가증>을 주고 왜구의 약탈이 아닌 공무역을 보호하였습니다.

전성기 때의 무로마치 막부는 중국, 조선 뿐 아니라 남쪽의 오키나와 해상 세력, 당시 독립국가인 류쿠 왕국까지 무역을 전개하였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와도 무역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활발한 무역정책은 지방 슈고다이묘에 의해 약화된 막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여 막부 창건이후 수십년간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하였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다음 장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사회상과 붕괴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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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지난 장까지 대부분 이야기 했네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문이 막부를 세웠지만, 요리토모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 실권은 가장 유력한 호족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갔고, 호죠씨가 막부를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실제 가마쿠라 막부의 중요한 알짜배기 시절은 모두 호죠씨의 시대였죠. 차라지 호죠 정권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호죠 가문은 막강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 구조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형식적인 최고 권력자 천황 - 실제 권력을 가진 쇼군(미나모토노 막부) - 쇼군을 좌지우지하는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 - 호죠씨와 함께 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유력 가문들....

그러나, 호죠씨의 독재 시절은 천황의 입장에서 무척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막부가 실세도 아니고 막부 뒤에서 일개 신하 가문이 권력을 좌지우지 했으니까요. 거기에 몽골(원나라)의 1,2차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몽골 전쟁에 참여한 유력 가문들이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는 호죠씨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호죠씨가 독재하는 가마쿠라 막부... 호죠씨와 막부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죠. 한번 볼까요?

2. 13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221년 죠쿠 전쟁

첫 번째 막부 타도 운동은 <1221년 죠쿠의 반란>입니다. 이 반란은 미나모토노 쇼군이 약해지고 호죠씨가 실권을 장악하자, 대의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천왕의 아버지(상왕)이 주도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정 정치 기억하시나요? 일본에서는 천왕의 나이가 어리면 아버지가 대신 섭정하는 정치 형태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고종이 나이가 어리자 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0년간 정치했던 적이 있죠? 이런 정치 형태를 일본사에서는 <원정>이라고 하고, 상왕이 정치하는 고문기관을 <원청>이라고 합니다.

원정 상왕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실과 공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유력 신하들(고케닌)들을 설득하면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막부 타도 운동은 오히려 막부의 결속력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의 여인으로 일본 사극에 자주 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 호죠 마사코는 호죠 가문이 막부에 도움이 되었으며, 막부 타도가 얼마나 큰 실수인지를 연설하면서 눈물로 막부 타도를 외치는 무사들을 달래어 돌려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천황가는 막부 타도에 실패하고, 천황가가 몰락해버립니다. 덕분에 아직 미약했던 초기 막부는 전국적인 세력을 규합하게 되었고, 막부정권은 그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또 무가의 기본 성문 법전인 <조에시키모쿠>가 제정되어 무가 정권은 법치를 바탕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전국 정권으로 도약합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막부의 기반을 다지게 된 사건이라니, 아이러니 하죠?

3. 14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324년 악당이 등장하다.

14세기 가마쿠라 막부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전에 설명했던 막부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인 <몽골 침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교과서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를 <원과 고려 연합군의 침략>에 의한 무사층의 동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근본 원인은 <무사층의 동요>였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막부 타도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몽골(원구)의 침입으로 유력 신하(고케닌)들은 막부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수비전이었던 몽골전을 막은 대가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침략전쟁이라면 뭔가 노획물이라도 있을 텐데, 몽골 침입을 막은 수비전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고, 민심의 불안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 가문은 불만이 가득찬 무사들과 신하집단에게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었습니다.

천황가는 이 때를 막부타도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적인 막부 타도를 외치며,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칠 자들을 모았습니다. 호죠씨는 이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천황을 유배 보냅니다. 천황은 탈출해서 또 막부 타도운동을 하고.... 막부는 또 천황을 유배보내고... 숨바꼭질 전이 계속되지요.

천황을 죽이면 되지 않냐구요? 절대 안됩니다. 고대사 편에서 다루었지만, 일본 천황은 천손강림 이라는 형태로 정당성을 확보한 하늘의 자손입니다. 천황을 죽일 거였으면 막부를 세운 자들이 이미 죽였겠지요. 천황은 죽일 수 없는 존재니, 막부 타도 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는 천황을 계속 유배보내고... ㅋㅋ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타도운동은 계속 실패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뜻에 동참하는 자들이 점점 불어났죠. 이 당시 사회불만세력으로 등장한 신흥무사집단을 악당이라고 하는데, 이 악당들이 막부 타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게 됩니다.

악당은 나쁜 넘들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만화방에 가보면 일본 만화중에 <악당>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좀 특이한 무사들의 이야기지요. 악당은 중국으로 보면 수호전의 영웅들, 한국으로 보면 홍길동 + 일지매 정도의 인물로 보면 됩니다. 대의를 품고 우국충정(?)에 들뜬 무사들을 말하죠. 당시대 개념으로는 사무라이와 좀 구분되는 개념 같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다시 천황가가 권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너무나 짧은 기간뿐이여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4. 1333-1334 겐무 신정기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은 1333년 강력한 천황중심의 독재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본다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쯤 되는 보수적이면서도 나름대로는 대의가 있는 개혁정치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 개혁정치는 2년뿐이었습니다. 천황가와 공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무너지고 말죠. 그 이유는 천황의 생각이 악당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천황은 천황중심의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를 박살내는데 일조한 무사집단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의 명장들은 천황이라도 자신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실제 이들 명장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명장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천황파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토사구팽 아시죠? 토끼사냥이 끝났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중국 고사죠. 한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한신을 죽였던 일화죠. 천황파 무사들은 위기를 느끼고, 천황과 등지게 됩니다.

천황의 신정치는 핵심 무사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또 다시 주인만 바뀐 막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아시카가 가문의 막부가 바로 <무로마치 막부>입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에서는 하늘의 후예인 천황을 모신다>는 이념을 버릴 수가 없는 막부였습니다. 일본 모든 막부가 형식적으로는 천황을 모실 수밖에 없었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가 아니라면 정당성 확보를 위해 천황이 필요했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의 친척이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 천황가를 소흘히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는 바로 성립되지 못하고, 북쪽에서만 권위를 유지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에서 무로마치 막부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였죠. 이 시기를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는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몇십년간이었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간단한 특징을 본 후 무로마치 막부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관련 포스트와 참고 포스트 모음 :
2007/10/11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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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3 - [히스토리아앨범/일본사앨범] -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인들의 복장
2007/05/27 - [가져온역사자료/연보연대기및기타] - 일본의 성씨 연원과 성씨의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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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답변자료실)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과 일본 불교의 수용 과정
2007/04/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요청자료) 일본 토지제도 변화과정과 무가정권의 출현 배경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3 -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 핵심 알기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2 - 가마쿠라 막부의 사회 구조와 법, 종교 분석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1 - (중세입문)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과 봉건제도의 성격 개관
2007/01/28 - [기타사정리/주요지명] - 일본역사 편 들어가기 전 일본지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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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1. 사무라이의 등장과 봉건제도

일본에서 봉건제도가 등장한 것은 중세 이전의 헤이안 시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양사에서도 중세 봉건제도의 기원을 고대 로마의 콜로누스 제도와 로마식 주종관계에서 찾듯이 말이죠. 일본인들 역시 일본식 봉건제도의 기원을 일본 고대 말기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고대 말기 부유층의 장원 개발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일본 고대 말기에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동양사에서는 이러한 계급을 공통적으로 호족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일본 고대 말기의 토지 소유자들은 호족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중국사에서 비롯된 개념인 호족은 일정한 무력과 일정한 토지 소유,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문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말기의 부유층은 빈농에서부터 출발하여 무사집단간의 전쟁 등을 통하여 등장한 계층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양 고대사인 그리스, 로마 등에서 보듯 정복 사업으로 평민층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지위향상을 했던 쪽과 더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로마에서도 노빌리스나 에퀴테스 등의 신귀족 계급이 보수화 되었듯, 일본 고대의 평민들도 무사집단에서 출발하였지만, 그들의 지도자는 결국 국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고대 후기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천황 후보가 될 수 있는 천왕가의 후예들이 평민들을 체제 속으로 흡수하여 무사단을 조직하고 주도적인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이지요.

예로,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무력을 소유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대기하는 자>라는 뜻의 일본어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고대를 부수고 중세를 연 막부의 지도자들은 모두 하층민 사무라이가 아니라 천황가와 일정한 관련을 가진 천황가의 후손이었고, 그들이 이끈 무사단이 막부 시대를 연 것이지요. 일본사에서도 평민계급에 의한 정권수립은 없었습니다.

2. 고대 말기부터 등장한 봉건적 토지 질서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 말기부터 이미 중세적인 특징을 가진 토지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봉건제적 토지질서는 고대 <반전수수법>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 고대 천황은 중국 당나라의 율령을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적인 토지 공유제>를 주장합니다. 즉, 중국식 정전제를 모방한 균전제를 일본에 도입하여 모든 토지를 국가가 관리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각 지방의 독자적 힘이 강하였던 일본의 호족정권들은 천황가의 이 제도를 반발하였고, 일본 고대의 토지제도는 <반전수수법>에 대한 반발로 점차 토지 사유화가 진행됩니다.

천황은 각 세력들의 반발로 결국 토지 공유제를 완전 포기하고 맙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 말기에는 귀족, 부농층, 불교세력 등이 각자 토지를 가지고 백성들을 부역하면서 장원을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토지사유자 중 부농층의 토지 운영 방식입니다. 귀족과 사원세력 외에 부농층들은 경제권은 있으나, 정치적 실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하층민인 빈농층과 농노(?)층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영하면서 실세인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즉, 부농층들은 자신의 장원이 약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유력 귀족>에게 토지를 형식적으로 바쳐버립니다. 유력 귀족은 부농층이 토지를 바치면, 그 대가로 세금을 걷어가고 부농층의 토지를 무력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력 귀족>은 더욱 높은 귀족이나 천황가에 세금을 일부 바치고, 부농층의 권리를 국가권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해줍니다. 즉, 토지경작자와 토지를 받은 소유자, 그들보다도 높은 권력자라는 연줄이 생기게 되죠. 이것이 바로 일본식 봉건제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일본식 봉건제도는 서양식으로 계약에 의해 맺어진다기 보다는 토지소유자와 귀족간 대대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에 의해 맺어집니다. 소위말하는 의리라는 것으로 맺어진 관계이지요.

부농층은 귀족들에게 토지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안정된 경작권을 얻음으로서 스스로 무장하고 힘을 갖추게 됩니다. 이 부농층이 재산을 모아 무사단을 만들고, 돈으로 자신을 지킬 자(대기하는 자 : 사무라이)를 마련하면 불합리한 세금이나 억압에 대해 항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 새로운 부농 계급과 무사집단이 성장하면서 일본 고대는 몰락하였고, 거대 장원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진 일본 중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 부농층, 유력귀족, 중앙의 실력자와 황족은 중세시대 무사, 슈고, 지토 등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3. 미나모토노 가문의 봉건질서

일본 봉건제도는 최초의 막부인 미나모토노 가문에서 기틀이 잡힙니다. 미노모토노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슈고, 지토의 임명권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 12세기의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봉건제도의 여러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시기입니다.

일단 슈고의 개념부터 볼까요? 슈고란 지방(고쿠 : 국)의 군사권과 경찰권을 위임받은 직책으로 쉽게 말하면 지방 행정관입니다. 이들은 미나모토노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보내져 지방 장관들에게 보수를 받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토란? 쉽게 말하면 토지관리관입니다. 중세시대 각지마다 거대한 장원이 있어서 이들 장원에서의 세금은 곧 막부의 운영 자금과 연결되었습니다. 막부는 각 지방의 장원을 관리하면서 세금을 걷고, 장원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시급했죠. 지토는 이 장원을 감시하는 자로서 경제와 치안업무의 핵심이었습니다.

슈고와 지토들은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에 의해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대신,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수도인 교토와 막부 가문을 교대로 지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전쟁을 할 때는 당연히 나가야 했습니다. 즉, 권리와 의무가 있었던 것이지요. 단, 서양식 계약관계가 아닌 쇼군에 대한 의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봉사관계였습니다.

그럼 누가 슈고, 지토로 임명될까요? 당연히 중앙의 유력 신하 가문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유력 가문을 일본사에서는 <고케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단어입니다. 일본사 책을 보면 계속 나오는 단어죠. 고케닌들이 슈고, 지토로 임명되면 군역과 조세를 거두어 중앙에 납부하는 형식으로 은혜에 보답하게 됩니다.

4. 막부시대의 문화적 특징하면? - 선종 불교가 키워드

자 그럼 이번에는 막부시대(중세시대)의 문화 키워드로 불교를 한번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일본 중세시대는 에도막부 후반 성리학이 유행하기 전까지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그 불교는 교종 계열이 아닌 <선종계열>이었습니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기나 고려시대의 무신정권기 등 무가정권의 영향력이 센 시기에 선종이 유행하죠? 같은 원리입니다.

무사들이 득세하는 시기에는 항상 서민들이 염원하는 게 있죠. 현세의 안정과 복을 비는 것.... 즉, 서민불교가 유행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무사들 역시 딱딱한 교리나 원칙을 따지는 교종보다는 쉽고 간결한 구결을 표방하는 선종이 입맞에 딱 맞을 수밖에 없죠.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는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하는 6개의 종파불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6종교는 모두 공통적으로 엄격한 수행보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선종적인 불교입니다.

일본 중세가 되면서 일본 역시 종교 본연의 모습의 찾는 종파불교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의 종파불교가 <불법의 논리와 이론적 완성>을 추구하는 교종적인 성격의 종파불교를 주로 한다면, 일본의 종파불교는 어려운 불법은 따지지 않는 선종적인 종파불교입니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정토종, 선종의 2가지로 요약됩니다.

정토종은 통일신라기 원효가 주장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우면 무식한 서민들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경문사상의 종교입니다. 일본 정토종은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3개의 파가 있지만, 우리가 다 알 필요는 없고 그 핵심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될 듯 합니다.

정토종의 특징이 염불을 통한 구원이라면 선종은 좌선(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핵심으로 하는 종파입니다. 일본의 선종은 일련종, 조동종, 임제종의 3파가 있는데 이들 모두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이 곧 해탈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한국사로 보면 지눌의 <간화경절문>에 해당하는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정토종이든 선종이든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는 대체로 경전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중요시되는 종교였습니다. 일본 선종계열의 종교는 가마쿠라 6불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도쿠가와 에도 막부기에 서민불교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통적인 <토속신 신앙>과 융합하여 독창적인 일본 불교로 나아갑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 양식은 일본 중세 문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양식이라 불리는 초기 막부시대의 문화 양식은 중국 송나라 및 한반도의 고려 양식과 융합한 일본 양식을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의 문화 양식이 천황과 호족 중심이었다면 중세부터는 문화의 주체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일단 막부 출현으로 무가적인 양식이 출현하였는데, 이 양식은 불교의 선종계열의 특징과 부합하여 무가적인 선종 불교 양식이 출현합니다. 즉, 좀더 서민적이고, 대중불교적인 양식을 말하죠. 특히 왕즉불 사상을 기반으로하는 고대 천황가의 양식과는 다르게 불사 조각이나 세밀한 목탑 등이 등장합니다. 중국은 전탑, 한국하면 석탑, 일본하면 목탑.... 아시죠?

다음장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장으로 막부 멸망과 남북조 시대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이 글과 관련된 사이트내 글 모음 :

2007/08/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답변자료실)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과 일본 불교의 수용 과정
2007/04/24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요청자료) 일본 토지제도 변화과정과 무가정권의 출현 배경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3 -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 핵심 알기
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2 - 가마쿠라 막부의 사회 구조와 법, 종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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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0 - 나라시대와 헤이안 시대, 그리고 일본 중세의 시작!
2007/01/29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8- 다이카 개신기 이래의 토지제도 <반전수수법>등을 중심으로...

2007/01/28 - [기타사정리/주요지명] - 일본역사 편 들어가기 전 일본지도부터....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일본고대사에 대한 총체적 분석



   이 요약본은 히스토리아(http://historia.tistory.com/)에서 포스팅한 일본사 1-14번까지의 내용을 요약식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이 요약본은 이미 블로그에 포스팅 된 내용들을 가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약본은 학습 이외의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이 서문을 포함하여 변형 및 가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공부할 때 참고자료로만 사용하세요. 가능한 한 일본사에서 다루는 모든 논쟁점과 핵심내용을 다 다루려했으나,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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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이나 의문점은 블로그 방명록이나, 아래 댓글로 문의하세요.

(이 포스팅에 대한 메일문의는 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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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만년전 : 죠몬시대(석기시대)

1.  특징

1)  죠몬시대는 신석기 사회(일본의 주장) : 평등사회, 수렵과 사냥 등의 무리사회

2)  주거 : 수혈식 주거 → 땅에 구멍을 판 형태의 지하식 집에 거주

3)  초기 농경 : 본격적인 농경은 아니고, 2-3호(1호당 10명 이내)가 하나의 집락을 이루어 거주 및 농경

4) 조몬시대 말기 청동기, 철기의 사용 → 농경의 발전, 쌀농사 시작, 전쟁의 증가 → 급격한 사회 변화 초래

2.  일본인의 형성

1)  구석기 시대 : 35만년전에 일본열도에 인류 등장(일본인 50만년전으로 간주중)

2)  실제 일본인의 조상

1.  일본측 주장 : 약 3-4만년전(일본에서는 크로마뇽인의 시대 정도로 끌어올려놓음)

2.  일반적 주장 : 1만년전 쯤 빙하기 이후 충적세기에 일본열도가 분리되면서 한반도, 기타 지역에서 이주한 인종들(고몽골인종)로 구성

3) 인종 : 고몽골인종 → 죠몬인을 구성 → 야요이 시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인종과 합쳐져서 일본인 주류 구성

1.  일본측 주장 : 일본인의 조상은 에스키모계, 남미계와도 유사함을 주장 → 다원론적 구성을 주장

2.  일반적 주장 : 한반도에서 건너온 인종이 절반 이상을 이룬다는 다수설

4)  죠몬시대 토우(흙인형) : 임산부 여성을 상징 → 주술적인 면 등이 부각됨

 기원전 5세기 - 기원후 3세기 : 야요이 문화

1.  기원전 3세기 이후 청동기, 철기 보급

1)  농경 발전 : 청동기, 철기를 이용하여 농경 발전 → <쌀농사 시작>, 인구 증가

2)  청동기, 철제 무기 사용 → 통일 국가로의 발전 기틀 마련 : 국가활동의 시작

2.  야요이 문화의 중심부 논쟁

1)  북부 규수(기타규슈를 포함하는 9주) 중심설과 나라현(나라지방) 중심설의 대립

2)  일반설은 규슈설 : 나가사키 - 후쿠오카 - 키타규수 지방 → 이후 동진하여 나라현으로 발전

3)  동진 :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에 걸쳐 청동기, 철기, 벼농사, 야요이 토기가 일본 열도에 전파

3.  야요이 문화의 성립

1)  기원전 5세기 키타규수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기원(야요이 문화는 발견 동네의 지명을 딴 것임)

2)  기원후 1세기 이후에는 철제기구가 본격적으로 보급 → 생산력 증가, 빈부차의 심화

4.  외부 문화의 영향

1)  한반도 남부인들의 이동으로 이루어졌음의 증거

1.  갑작스런 일본인들의 인구 증가와 체형의 변화 → 평균신장의 증가와 얼굴이 길어짐

2. 야요이 문화의 청동기, 돌칼, 묘제 등이 한반도와 유사함 → 야요이식 토기는 죠몬과 다른 한반도식임

2)  일본의 자생론 증거(일본 일부학자 주장)

1.  벼농사는 대륙에서 도래한 것이나 그것은 꼭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러시아, 태평양 등 다양한 경로가 있음

2.  벼농사가 바로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 자체가 이미 일본인들이 벼농사에 익숙하였다는 증거

3.  벼농사는 중국 강남에서 규수로 전파되었고, 중국농법은 이미 일본인이 알고 있었다는 주장

 일본의 건국 신화와 야마타이국 논쟁

신화 내용은 요약본으로 일일이 포스팅하기 어렵네요.

건국신화 및 야마타이국 논쟁 : http://historia.tistory.com/637 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역사전문 블로그 히스토리아>

 3세기 - : 야마토 정권

1.  성립

1)  성립 증거 : 3세기 말 - 4세기 초 전방후원군 고분의 등장

2)  성립 시기 : 3세기 야마타이국의 여왕 등장(히미코 :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한 여인)

3)  일본 고대 최초의 통일적 국가 : 불교와 율령 수용 후 전성기(6세기 백제 성왕에게 전수받음)

2.  특징

1)  구성 : 야마토(나라현)의 유력 호족들의 연합정권 → 지방 유력 호족을 현주로 임명하는 형식

2)  확장 : 4세기 후반 이후 서부 일본을 통일 → 히미코 이후 야마토 지방 호족들이 연합한 형태

1.  광개토대왕릉비의 왜왕 칭호     

2.  백제와의 교섭 : 칠지도, 한자, 유교, 불교 등 문화 수용

3.  가야 문화와의 접촉 : 스에키 토기

3.  논쟁

1)  야마타이국이 과연 나라현에 있었는가? → 일본에서는 다수설로 인정 / 일부는 규수설 주장

2)  야마타이국이 나라현에서 발전한 이유 : 한반도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라지방을 중심으로 연합하였다는 설이 다수설

4.  야마토 정권의 고분(야마토 정권의 성격을 증명하는 유물)

1)  3-4c 초기 : 매장자가 신관의 성격 - 부장품에 구리거울과 옥(제정일치 사회의 군장 무덤)

2)  5c 중기 : 매장자가 군사적 통솔자 성격 - 부장품에 마구와 무기(정치적 군장의 성격 강화)

3) 7c 후기 : 매장자가 평민적 성격 - 유력농민(장원주)의 고분 건설 : 고분수가 아주 많음 → 사회변화 상징

4)  7c 이후 : 고분이 거의 없음 - 불교가 전파되면서 화장 풍습 → 불교가 사회를 지배해감을 상징함

 불교와 율령을 키워드로 정리하는 일본고대사

※ 일본 고대사의 키워드 : 불교, 율령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한국사와 마찬가지로 일본 고대사도 불교, 율령을 항상 염두에 두면 이해가 편합니다.

2) 불교는 일본 고대가 중앙집권을 이루기 위한 기본 키워드이고, 율령은 중앙집권을 이루기 위한 필수 항목입니다. 동아시아사는 공통적인 문화권이기 때문에 항상 고대에서 율령, 불교가 중요합니다

3)  실제 일본 고대가 망하는 것도 불교의 신성함이 사라지고, 율령이 문란해지는 시기입니다. 꼭 이것을 생각하면서 고대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일본 자체가 신성성을 더욱 강조하는 국가입니다. 특히 천황가의 신성성은 이 2가지가 좌우합니다.)

1.  5-6세기 야마토 정권 초기 불교

1)  불교 전파 : 6c 백제 성왕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전파 → 쇼토쿠 태자의 수용

2)  6c 아스카 문화 성립

1.  쇼토쿠 태자의 아직기, 왕인 등 백제인 등용 → 한반도와 삼국문화의 수용

2.  호류사 금당벽화, 석가삼존상 등 초기 불교 문화의 완성

3.  중국문화의 직접 수입도 시도 : 견수사, 견당사 등을 파견

2.  7c 다이카 개신과 율령

1)  배경

1.  7c 신라의 삼국통일 및 백제의 멸망 이후 일본은 신라와 교류 → 하쿠호 문화 성립

2.  삼국통일 후 당과의 직접 교류를 통하여 문화 수용 → 불교, 율령체제를 중국에서 직접 수용

2)  다이카 개신

1.  국왕 중심의 유교적 중앙집권국가 체제의 성립 시도 →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한반도와는 다름)

2.  천황 : 고대 신화를 통한 선민의식을 가진 존재이자 유교적 덕목을 갖춘 자로서 신성화 → 율령을 일본식으로 수용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에 편입함

3.  8c 나라 시대

1)  성립 : 50년간 나라 헤이죠코로 천도 → 중국 문화를 적극 수용, 신라, 발해와 교류

2)  특징

1.  불교와 승려세력의 극강화 → 사원세력이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함

2.  불교세력을 등에 업은 천황이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 → 고사기, 일본서기 등을 제작하여 천황가의 선민의식을 이데올로기화함

4.  9-12c 헤이안 시대

1) 배경 : 한반도,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시기(독자적인 코쿠후 문화 성립)

1.  가나문자의 제작 : 귀족 계급은 자신의 감정을 가나로 표현 → 독자적 문화의 발전

2.  와카 : 귀족 계급의 국풍적 시가

2)  특징

1.  중국식 율령체제가 동요 : 천황의 신성함이 훼손

2.  지방 호족들의 성장 : 장원이 확대 → 호족이 귀족화되면서 왕권이 약화

3.  외척 세력의 간섭 : 황제권이 외척권에 제약됨 → 왕즉불 사상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됌

4. 이러한 천황권의 몰락은 곧 일본에서 무사들이 막부를 여는 무가정권시대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을 보임

 6c 소가씨의 등장

1.  6c 천황권 강화의 노력

1)  배경 : 야마토 호족 연합정권 하에서의 천황권 약화 → 율령, 불교 수용을 통한 천황권 강화를 추구

2)  내용

1.  모노노베씨 가문의 천황권 도전 → 소가씨가 천황가의 도움으로 모노노베씨 주살

2.  소가씨 가문의 조정 실권 장악 → 일본 불교의 공인, 중앙집권화 성공

2.  쇼토쿠 태자

1)  배경 : 소가씨(소가노 우마코)의 정권 장악 → 스이코 여제를 등용하고, 쇼토쿠 태자의 섭정 실시

2)  내용

1.  쇼토쿠 태자는 소가씨에 반발 : 고구려, 백제인 스승 등용(아직기, 왕인 등)

2.  소가씨 위주의 중앙집권화보다 천황권 위주의 중앙집권체제 시작

      → 고구려, 백제의 관등제(12관등제), 율령(헌법 17조) 제작

3.  견수사를 파견, 역사서 편찬

3)  아스카 문화 수용

1.  백제 기술 수용 : 소가씨의 아스카테라, 쇼토쿠 태자의 호류지 건립

2.  종이, 먹, 그림도구의 제조법 전파(담징)

4)  결과 : 소가씨와 쇼토쿠 태자의 대립 → 쇼토쿠 태자가 제거됨(자살설도 있음)

 7c 다이카 개신

1.  배경

1)  소가노 집단의 독주 → 타 귀족(호족)들의 반발

2)  소가노 집단의 몰락 : 나카토미노 가문이 소가씨들을 차례로 암살(닌자 등용)

3)  다이카 개신의 시작 : 나카노 오오에 황자가 소가씨 정권을 타도하고 중앙집권적 개혁 실시

2.  나카노 오에(덴지 천황)의 <개신의 조> 발표

1) 내용 : 토지공전제 → 호족은 토지를 가질 수 없고, 모든 토지와 백성은 천황의 것임을 천명(공지공민제)

2)  결과 : 천황권의 강화 → 호족들은 엄청난 반발 :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다수설

3.  진신(임신)의 난

1)  배경 : 덴지천황의 후계자 관례 무시

1.  관례상 유력호족출신 황후의 황자가 계승

     → 천황은 호족출신인 오아마 황자를 무시하고, 오토모 황제를 천황으로 추천

2)  오토모가 천황이 된 후 문제점

1.  한반도 삼국통일에 간섭 : 백제에 지원한 군대가 참패(백촌강 전투의 참패)

2.  호족을 억압하여 호족세력이 불만이 많음

3)  내용 : 오아마 황자의 반란(진신의 난)으로 천황 탈취

1.  반란을 위해 모은 군대가 엄청나게 강함 → 다른 호족들이 감히 대들지 못함

2.  진신의 난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얻는 오아마는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추구 → 다이카 개신의 완성

4.  다이카 개신의 핵심 : 율령체제의 성립

1)  배경 : 당에 파견된 견당사를 통해 도입

2)  개념(동아시아 공통)

1.  율 : 형법, 국가의 통치체제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형법

2.  령 : 행정법,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법의 통칭

3.  격 : 시대가 변하여 율령이 맞지 않을 때 임시로 쓰는 법 → 율령이 폐기될 경우 격이 율령을 대신하여 활용됨

4.  식 : 율령에서 제시한 법의 큰 틀에 포함되지 않는 세부적인 시행규칙

5.  다이카 개신의 제도

1)  개요 :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관료제와 행정제도를 정비한 천황제 국가

2)  중앙제도 : 천황 및에 2관 8성을 구성

3)  지방제도 : 기내와 7도의 행정구를 나누고 관리를 파견

4)  신분제도 : 양천제도의 신분사회

5)  토지제도 : 남녀 모두 구분전을 지급받는 대신 조세를 부담 → 남자는 요역, 군역이 추가됨

6.  하쿠호 문화의 성립

1) 8세기 초반 : 삼국통일 후 백제, 고구려 유민의 일본 유입 → 백제, 고구려 문화로 인해 하쿠호 문화 성립

 다이카 개신 이래 일본 고대의 토지 제도 정리

1.  7c 다이카 개신 : 개신의 조

1) 배경 : 야마토 정권의 호족 연합적 성격을 천황권으로 돌리기 위함 → 왕토사상에 입각한 토지제도 주장

2)  내용 : 공지공민제도를 포함한 4개조

1.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이며, 모든 사람은 천황에 속한 사람이다.

2.  이와 동시에 <반전수수법>을 발표함

2.  개신의 조와 연관된 <반전수수법 >

1)  배경 : 견당사 등 도당 유학생들이 당의 선진 토지제도를 수용하여 일본에서 실시

2)  개요 : 당나라 균전제의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공유, 균분, 환수 제도를 실시함

1.  백성에게 땅을 공평히 주고, 대가로 세금을 받으며, 사후 토지를 반납하게 하는 제도

2.  균전법의 조, 용, 조를 그대로 실시

3)  내용

1.  6세 이상의 남자에게 토지(반전)을 하사한다.

2.  양민에게는 2단(107평)을, 천민에게는 2/3단을 주고 토지를 준 대가로 세금을 걷는다.

반전 = 토지 / 수수 = 주고받다(수수료) 라는 뜻

4)  결과

1.  농민의 반발 : 가혹한 세금이 싫어서 유망함

2.  호족의 반발 : 토지 공전제에 대한 불신과 부정

3.  7c말 삼세일신의 법(3대에 제한된 사유법)

1)  배경 : 반전수수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천황권에 반발함 → 새로운 법의 제정

2)  내용

1.  황폐해진 반전을 개간한 자는 평생 그 땅을 개간자에게 준다

2.  황무지를 개간한 자는 3대에 걸쳐 토지 사유를 인정한다.

3)  결과

1.  천황가는 균전의 이념(왕토사상)을 버리고, 일정기간이나마 백성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

2.  그러나, 백성들은 3대가 지나면 땅을 버리고 다시 황무지로 만든 뒤 떠나버림

    → 결국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신의 조>의 원칙을 버림

4.  8c 간전영년사재법(토지 영구 사유법)

1)  배경 : 반전수수, 삼세일신이 지켜지지 않음

2)  내용 : 국가가 토지공유원칙을 포기 → 토지를 개인이 가질 수 있음을 공식 인정

3)  결과 : 토지사유화를 초래 → 대토지 소유자의 성장을 방관함

5.  10c 이후 새로운 토지 사유 계층의 등장

1)  배경 : 토지 사유의 인정으로 인한 토지소유자의 성장 → <봉건제도의 기원 등장>

2)  내용

1.  귀족과 불교사원의 유력자들의 대토지 소유 : 간전영년사제법을 활용

2.  부농층도 성장 : 개간을 통하여 영주화 → 가난한 농민과 농노를 부려 토지 개척(개발영주의 등장)

6.  10c 개발영주를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의 탄생

1)  새로운 질서

1.  개발영주(부농)이 장원을 가지고 농노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돈을 벌게 됨

2.  개발영주(농민지주)는 유력 귀족에게 형식적으로 토지를 바치고 세금을 냄 → 유력 귀족은 세금을 받으며 개발영주의 땅을 지켜줌

3. 유력 귀족은 개발영주에게 받은 돈이나 일부의 땅을 황족이나 중앙 실력자에게 바치고 관직, 권력을 얻음

2)  내용

1.  개발 영주는 유력귀족에게 봉사함으로서 국가의 조세압박을 피하게 되고, 귀족은 재력이 생김

2.  개발영주는 차츰 돈을 모아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의 토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함

3. 중세에는 개발영주, 유력귀족, 중앙실력자의 구도가 무사, 슈고, 지토 등으로 발전 → 중세 봉건제의 기원

 8c 나라시대

1.  개요

1)  시기 : 710년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죠코가 건설 → 80년간 나라현 헤이죠코를 수도로 정함

2)  배경 : 천황이 강력한 세력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중앙집권을 위해 불교세력과 손잡음

2.  내용

1)  천황가인 후지와라씨 가문은 강력한 율령국가를 추진 → 천연두가 돌아 모두 사망함

2)  이후 정권이 빈번히 교체되다 다시 후지와리씨가 집권하였으나, 끊임없이 혼란기가 오게 된 시대

3) 류큐, 간토 등 섬 지역을 통일하려 하였으나 정권 불안정으로 실패 → 류큐는 이후 천년간 독립국으로 남음

4)  토지 사유의 인정 : 심세일신의 법, 간전영년사제법 등의 마련 → 장원의 확대 초래

3.  특징

1)  당문화 모방 : 견당사 파견, 유학생들이 당의 선진문물 수입

2)  신라와의 관계 재개 : 사신 파견 → 9세기 이후에는 사무역 중심의 교역

3)  발해에 사신 파견

4.  문화

1)  나라중심의 귀족문화 발전 : 진호국가불교(호국불교)의 발달 → 텐표문화

2)  국가의 강력함을 보여줄 문집 완성 :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등

 일본 천황가의 역사서 편찬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1) 목적 : 8c 강력한 천황권이 완성되면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이데올로기 마련 → 전성기인 덴무천황 때 시작

2)  내용 : 천황가의 신성함과 황실 계보의 정리

2.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

   위낙 방대하여 요약이 안되네요.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http://historia.tistory.com/665 에 자세히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 칠지도 문제 관련 이슈는 꼭 보세요. 8차 교육과정에서는 동아시아사로 별도 교과서가 편제되어 이 부분이 뜨고 있답니다. 교양 서적으로도 이 부분이 많이 나올 것 같네요.)

 헤이안 시대

1.  8c 말 - 11c 셋칸정치(셋쇼)

1) 정의 : 천황이 어리거나 여성일 때 천황의 외조부, 외가 친척, 또는 간파쿠(유력신하)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

          (조선 후기 안동김씨 등의 세도정치와 비슷한 정치)

2)  내용

1.  나라시대 이후 후지와라씨 가문에서 천황가의 황후배출 가문이 되어 셋쇼를 시행

2.  지방호족과 개발영주는 후지와리씨와 강력한 불교사원의 후원속에서 봉건적 질서 유지

3.  이후 황후에게서 황태자가 태어나지 못하면서 천황의 부친이 직접 정치하는 형태(원정)으로 넘어감

2.  11c 원정정치(인세이)

1)  정의 : 셋쇼를 누르고 천황의 부친이 상왕이 되어 직접 정치하는 형태

         (조선 후기 안동김씨 가문을 누르고 직접 정치에 참여한 흥선대원군 정치와 비슷함)

2)  내용

1.  강력한 사병집단(사무라이 집단)인 원청을 가지고, 상왕이 직접 정치

2.  사무라이 집단은 부랑자 집단으로 신성한 불교 승병마저 무참히 죽일 정도로 충성심이 강함

3.  후지와리씨의 셋칸이 무너지면서 마나모토씨 등의 대토지 호족, 개발영주들은 독자적 사병을 양성함

3.  헤이안 시대의 몰락(고대의 몰락)

1) 천황과 상왕의 대립 : 무사들이 천황가 내분을 이용하여 성장 → 타이라씨 가문이 천황인척으로 20년 집권

2)  무사들은 첨차 천손(천황가)보다 무력을 가진 자신들이 강함을 인식함

3)  타이라씨 : 일본 절반의 장원 소유, 송나라와의 국제 무역으로 성장 → 중앙 고관으로 진출

4) 미나모토씨 : 강력한 무력을 가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씨를 격파하고 전국을 평정함 → 중세 시작

 이후의 중세 사회

1.  고대 사회

1)  천황권과 호족권의 대립 : 야마토 정권 이래 호족권과 천황권의 대립이 키워드였습니다.

2.  중세 사회

1)  천황권과 무가 막부와의 관계 설정 문제가 가장 큰 키워드

2)  귀족이 아닌 서민층이 점차 대두하는 사회 → 가마쿠라 막부부터 전개 .....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사

1. 가마쿠라 막부의 창립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의 창립에는 이견이 많습니다. 이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이라는 최고 직위에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통 전해집니다만, 과연 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막부 창립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었죠. 최근에는 요리토모가 천황으로부터 슈고, 지토의 임면권을 얻어 봉건제도가 시작된 시기를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으로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일본에서 막부(바쿠후)란 말은 원래 전쟁중인 대장의 근거지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라는 일반명사로 사용할 때 막부는 군사정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의 신하인 <고케닌>들에게 차례로 은혜를 배풀어 지방 관리로 선임합니다. 이 지방관리를 슈고, 지토라 칭하는데, 슈고는 보통 지방 소국의 군사, 경찰권을 위임받은 관리를 칭하며, 지토는 장원에서 토리관리, 치안유지, 세금징수 등을 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땅을 받은 <고케닌>들은 요리토모에게 군사, 경제적 원조를 하는 <give and take>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의 봉건제도이죠.

2. 싯켄 정치의 시작

그러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낙마(?, 암살설도 있음)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순식간에 최고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갑니다. 요리토모의 아들은 즉위 3개월만에 그 정치실권을 잃었고, 실권은 유력 고케닌 가문의 13인 합의제 정치가 되었습니다. 이 유력 신하가문(고케닌)의 유력자가 호죠씨 가문이였죠. 호죠씨 가문은 약 130년간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로 존재합니다. 호조씨는 장관직과 시소직(총리직)을 겸하면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러한 겸직된 지위를 <싯켄>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싯켄은 보좌역까지 두면서 유력 신하가문(고케닌)을 모아 합의 정치를 하였고, 이것을 역사에서는 <싯켄정치>라고 부릅니다. 즉, 천황은 이미 무사들에 의해 실력을 잃었고, 무사집단으로 막부를 세운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씨는 쇼군으로서 실권이 없습니다.

13세기를 넘어가면서 막부의 중요관직과 지방관리 대부분을 호죠씨가 독점하였습니다. 이것은 호죠씨 독재체제에 대한 다른 유력 가문(고케닌)의 반발을 불러와 막부에 대한 지지도가 하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천황가는 막부 타도 운동을 시작합니다. 1219년 미나모토씨 쇼군이 암살되어 3대에서 쇼군이 단절되자, 천황가는 쇼군과 호죠씨를 말살하기 위해 군을 모집하고 죠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막부군에게 토벌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오히려 천황가와 귀족가문이 몰락하고 더욱 무가정권과 호쇼씨가 득세하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가정권의 독재는 더욱 더 다른 유력 가문(고케닌)의 반발을 사게 되어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3. 호죠씨의 독재와 천황의 반격

가마쿠라 막부가 약해진 결정적인 원인은 몽골(일본말로는 원구)의 침입입니다. 호죠씨는 몽골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며 몽골과의 항쟁에 들어갔는데, 하늘이 일본을 돕기 시작합니다. 몽골의 1차 침입 대 몽골 함선은 야간 해상 공격을 감행하려다가 폭풍우가 몰아서 전멸하고 맙니다. 몽골의 2차 침입 때에는 몽골 쿠빌라이의 14만 대군이 또 다시 해상의 태풍에 의해 모두 전멸하게 되어 몽골군이 물러갑니다. 일본은 일본특유의 날씨로 인하여 몽골군을 물리쳤고, 이 사건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나라가 신의 나라(神國)이라 여기게 됩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신풍(神風, 가미가제)이 불어 일본을 구원해준다고 믿어 <가미가제 불패신앙>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 신앙은 일본이 훗날 미국이랑 세계대전을 벌일 때, 승리할 것이라는 이론적 근거로도 작용한다네요.

문제는 이러한 몽골과의 전쟁은 수비전이였기 때문에 일본 영토가 황폐해졌다는 점입니다. 또, 전쟁에 참여한 고케닌 들에게 호죠씨는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수비전에서는 전리품이 없으니까요. 이것은 막부에 대한 고케닌의 불만을 초래하여 이들이 막부 타도운동을 벌이는 천황가쪽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입니다. 그는 이 운동이 여러번 실패하여 유배, 또 유배를 당하면서도 계속적으로 막부타도운동을 합니다.(천황은 신의 아들이기에 죽이지는 않습니다.)

이 때 마침 악당(막부를 반대하는 신흥무사를 악당이라고 부릅니다.)인 구스노기 마사시게가 막부를 괴롭히는 운동을 벌였고, 그 틈에 천황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막부를 붕괴시킵니다. 이 때 천황을 도와 막부 타도 운동을 벌였던 자들은 막부의 핵심 무사였던 다카우지와 요시다다입니다. 이들은 호죠씨를 타도하고 천황을 도와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새로운 막부를 세워 천하를 다시 얻는 것이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렇게 몽골과의 항쟁을 기점으로 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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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의 시대

1.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개관(12-14c)

일본 막부시기 700년들 통털어볼 때, 가라쿠라 막부는 12-14세기에 걸쳐 존재한 최초의 막부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가마쿠라 막부를 잘 보면, 이 당시가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외침을 많이 받던 시기이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등에게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혼란기와 상관없는 일본열도였지만, 이 막부가 성장하게 되는 경제적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혼란기를 이용한 무역의 호황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고, 나중에 망하게 되는 것도 북방에서 내려온 원나라의 침입때문이니 국제 정세와 무관한 막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무신들이 장악한 최초의 사회입니다. 우리나라 고려와 약간 비교되기에, 한번 이 막부체제를 우리 고려사회랑 비교해보았습니다.(어떤 책에도 나와있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이러한 비교가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시도해봅니다.)

비교학습

가마쿠라 막부

고려의 무신정권

배경

귀족중심의 율령체제의 동요에 따른 호족의 성장

무신차별과 귀족체제 동요에 따른 무신들의 사회불만

무신관계

의리에 기반을 둔 봉건적 질서

무신간 귄력다툼을 통한 최충헌 독재체제의 등장

특징

쇼군은 수도가 아닌 거점에서 전국의 무사들을 지배하는 형식

수도(개경)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독자적 관료기구를 만들어 권력 장악

표를 보면 이해가 가시겠지만, 일반 이들 무신이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은, 모두 당시 귀족사회의 지배체제의 동요와 관계가 깊습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와 귀족가의 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무사세력이 성장하였고,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등 당시 문벌귀족들이 동요하면서 무신정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도가 쇼군과 지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질서를 확립하면서 700여년을 이끌어간다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무신간의 다툼 속에서 최충헌 정권의 독재로 이어지고 이 독재는 약 60여년 동안 그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물론, 고려의 무신정권도 세계제국인 몽골과의 처절한 항쟁이 아니였다면 오래갔을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출연한 두 세력을 비교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네요.

가마쿠라 막부의 가장 큰 특징은 봉건제도의 확립입니다.

봉건제도는 앞 장에 자세히 설명했으니, 요점만 짚어봅시다. 봉건제도에서 국왕(천황가)은 존속합니다. 그러나 실권이 없고,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천황은 단지 신성한 하늘의 자손이라는 형식적 신성성만 가진 존재로 전락하지요. 즉, 실권은 쇼군(주군)이 가지고, 무사계급과 주종관계를 형성하는 봉건제도를 확립합니다. 일본식 봉건제도의 특징은 자세히 설명했었죠?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치안유지와 장원 관리를 위해 쇼군이 부하 무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제도입니다. 쇼군은 슈고와 지토에게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권리와 토지를 분배하고, 이들은 쇼군에게 충성과 봉사를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제도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호죠씨로 대표되는 <싯켄>이 실제 권력 행사를 하는 시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미나모토씨의 막부는 쇼군이 3대로 끝나면서, 실제 쇼군의 역할이 초기 요모토모 시기에 비해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따라서 3대 이후 막부의 실권은 쇼군 아래에서 정치를 담당하였던 <싯켄>이 장악하였고, 이 싯켄 정치는 호죠씨 집단이 계속 세습하면서 영원할 것만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무사생활이 빈곤해지고, 막부의 재정이 바닥나서 몰락하고, 다시 귀족가문(공가)가 정권을 잡는 시기로 돌아섭니다.

2. 가마쿠라 막부 시기의 가마쿠라 6불교

가마쿠라 시기의 종교적 특징을 찾으라면 <서민적 종교>의 출현입니다. 원래 고대에서의 불교는 귀족적인 불교이거나, 천황의 신성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의 성격이 강한 불교였습니다. 서민들을 위한 구원의 불교가 유행하지 않아서, 불교는 본래의 의미보다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성격이 강하였지요. 보통 우리 신라에서 말하는 호국불교, 왕주교종 등이 일본고대 종교에서도 통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고 귀족사회가 몰락하자 불교는 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서민적 불교를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합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징은 귀족적 특징을 가진 교종 불교가 아니라, 서민적 특징을 가진 선종불교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교종불교는 귀족적 성격으로서 심오한 불교교리를 이해하거나, 강론, 강회 등에 참석함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살 돈도, 공부할 시간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적합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선종불교는 아주 간결한 깨달음으로 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불교종파들을 말합니다. 예로 불교 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되새기며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의 말씀도 선종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도 이러한 선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막부시대 불교 종파는 <나무아미타불>염불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민들에게 쉽고 간단한 불교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또 임제종, 조동종이라는 선종 종파는 좌선(앉아서 계속 생각하면서 깨달음)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불교가 융성한 이유는 2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일본사회가 귀족사회가 몰락함으로서 새로운 계층의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당시 국제적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성리학, 선종불교가 유행하였고, 고려의 무신정권기에도 선종이 유행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려 무신정권과 비슷한 상황의 일본 막부는 이들 선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본식 선종은 막부 시대 내내 유행하였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시의 에도 막부 시대에 서민 불교로서 융성하게 됩니다.

3. 가마쿠라 막부의 법

원래 무사들은 율령격식 같은 율령을 지키지 않습니다. 무사들은 법보다는 자기들만의 양심이나 <도리>, <선례>에 따라 재산을 합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법이며, 그들이 옳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무사의 실천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가마쿠라 막부는 이러한 중구난방의 <정의>를 정리하여 성문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법이 곧 <고세바이시키모쿠>라는 법이며, 이 법이 무가시대의 근본 법전이 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전국시대에 다시 수정되게 됩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가신단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을 새로 제정하는데 이것이 <분국법>입니다. 이 법은 고세바이시키모쿠를 반영하면서도, 가신 통제라는 중요한 목적을 반영하는 법입니다.

나머지 세세한 법, 제도, 문화, 예술 등은 별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 다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이 쯤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피냄새 진한 정치얘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죠.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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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세사란 어떤 사회를 말하는 것인가?

1. 개관 - 무사가 주도하는 시대가 오다.

지금까지는 일본의 고대사를 보았고, 이제 일본의 중세사를 들어가보겠습니다. 일본의 중세와 고대를 나누는 기준은 지배집단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네요. 고대에서의 일본사회는 수많은 귀족가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은 천황가가 되거나, 천황가를 보좌하면서 권력을 유지해갔고, 귀족간이 수많은 암투와 전쟁이 고대사회를 이끌어갔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천황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고, 유력 귀족가문은 천황을 돕거나, 천황가에 반기를 들면서 역사를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역사의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중세시대는 천황과 귀족이 주도하는 사회가 아니라, 천황을 능가하는 무사 세력이 주도하는 사회입니다. 지금까지는 천황이나 귀족들이 기르는 개 취급을 받고 살던 무사들이, 자신들이 오히려 기존 사회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12c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중세사가 시작됩니다. 일본 중세사는 곧 무사들이 주도하는 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는 유력한 귀족가문(공가) 출신의 정권인 겐무 정권이 잠깐 부활하기도 하지만, 곧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타도되어 또 다시 무사 시대가 시작됩니다. 막부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군사정권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이후, 수많은 무사들이 등장하는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막부 등 군사정권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1868년 메이지 유신기에 접어들면서 무사계급이 사라지게 됩니다.

막부 시대에 또하나의 재미있는 점은 막부가 귀족가문(공가)를 누르고 권력을 잡게 되면서, 서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다는 점입니다. 서민들은 단결하여 귀족 세력을 도시에서 몰아내기도 하고, 무사집단의 횡포에 맞서 도시를 자치화하기도 합니다. 또 가혹한 탄압에 맞서 잇키(봉기, 반란, 저항을 뜻하는 말)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사카이같은 자유도시를 만들기도 하고, 중국 명나라와 무역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장사로 돈을 번 상인들은 용병을 모아 무사집단과 대등하게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민세력의 성장은 강력한 다이묘들의 출현으로 근대사회까지 나가지는 못합니다. 즉, 서민들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어 가면서도, 당시 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무사들에 눌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까지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민이 주도하는 일본사회는 메이지 유신 이후가 되는 것이며, 일본 중세사회는 무사가 주도하고, 서민계급이 성장해가는 사회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2.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

일본중세사회의 등장 배경은 일본 고대 사회 특유의 <율령체제>가 동요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 끝장에서 저는 일본 고대 사회의 멸망을 천황가와 귀족가의 대립 및 무사집단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당시 <법질서가 동요>하고, 신분질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즉, 당시 사회체제인 <율령체제>를 새롭게 등장한 무사 집단이 굳이 지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체제가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을 <율령체제>를 대신할 뭔가 중세적인 요소가 등장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새로운 변화를 한번 요약하면 3가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정말 일본사를 전공하신 분이 본다면 이거보다는 훨씬 많겠죠? 지식이 짧아서 3가지로 요약합니다.)

1. 과거나 유학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무사집단의 자의에 의한 사회질서 유지

2. 무사윤리에 기초한 일본식 주종관계와 봉건제도의 성립

3. 중국 송, 원에서 전래된 선종불교가 확산되면서 무사 윤리와 서민 윤리의 확립입니다.

3. 일본식 봉건제도의 성립

고대 일본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불교라고 했죠? 일본 중세를 한 눈에 파악하는 키워드는 봉건제도입니다. 이 봉건제도란 명칭은 물론, <서양식> 개념이지만, 일본사를 전공하시는 분들은 이 개념을 거의 수용하는 듯 합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서양의 <기사계급>과 마찬가지로, <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토지>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제도입니다.

봉건제도가 등장한 배경부터 볼까요? 헤이안 시대에 지방에서 장원을 개발한 호족(귀족)이나 자영농(개발영주)들은 자신의 토지를 다른 유력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인 무장이 필요하였고, 유력한 국왕가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무사단을 조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처음에 무사단은 주인의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가서 싸우라면 싸우고, 몸빵하라면 몸빵하고, 할복하라면 할복하는 불쌍한 존재들이였지요.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국왕가와 유력귀족가문들이 서로 다투는 시대 상황 속에서 그들은 점차 세력이 성장하였고, 일부 세력은 교토로 진출까지 합니다. 사실 일본 막부정권을 연 사람들은 모두 성씨를 가진 국왕가의 후손들이였지만, 그들 휘하의 주력 부대는 그동안 개 취급 받았던 무사들이였습니다. 무사들은 12세기 혼란 속에서 국왕가와 귀족가문을 위해 죽으라고 싸우던 도중에 자신들의 힘이 오히려 공가(귀족가, 천황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이 중 무사단의 우두머리로 정권을 잡은 집단이 전에 이야기한 타이라씨, 미나모토씨 등입니다. 이 중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다른 집단을 모두 정발하고 정이대장군 호칭을 받아 가마쿠라 막부를 건설하여 일본 중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봉건제도의 특징을 한 번 볼까요?

봉건제도는 미나모토노씨 집단이 국왕에게 자기 집단의 특권을 얻어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는 자신의 부하 무사들은 슈고나 지토로 임명하는 권한을 국왕으로부터 얻어냅니다. 그리고 슈고와 지토들은 땅을 준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교토, 가마쿠라 등 주요지역을 교대로 지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게 됩니다.

용어정리

쇼군 : 막부를 다스리는 실제적 지배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슈고 : 쇼군이 임명 → 지방 치안을 유지하는 댓가로 지방장관에게 보수를 받는 직책

지토 : 쇼균이 임명 → 지방에서 장원을 관리하는 댓가로 장원지주에게서 보수를 받는 직책

봉공 : 슈고, 지토들이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쇼군의 직할지를 교대로 지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것

이러한 일본식 봉건제도는 서양 봉건제도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봉건제도는 (서양식의) 쌍무적 계약관계가 아니라, 의리를 통한 봉사관계라는 점입니다. 즉, 쇼군은 계약을 맺어 슈고, 지토를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쇼군은 전공 등에 따라 슈고와 지토를 임명하고, 슈교와 지토는 임명에 대한 의리로서 주군(쇼군)에게 봉사하는 것이지요. 이 의리의 매개체는 여성입니다. 중세시대 일본 지배층의 여성은 쇼군, 슈고, 지토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서로 유력가문의 딸들을 주고받아 혈족관계를 과시하곤 하였습니다. 당시 여성은 영주의 세력확대나 지방 세력간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의 도구였답니다.

자, 그러면 이 쯤 하고 일본 중세시대를 하나, 하나 파헤쳐 보겠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 한번 가볼까요? 일본 중세사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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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의 정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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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나라시대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중앙집권을 위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을 지금까지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천황이 강력한 세력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불교세력과 손 잡고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 수도를 옮긴 시대를 나라시대라고 합니다. 헤이죠쿄는 지금의 일본 나라현 부근을 말합니다.

710년 일본 천황은 나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 시기인 80년간 지배자가 빈번하게 교체되고, 왕권보다 불교세력이 더 융성하게 됩니다. 천도를 추진한 것은 당시 천황가인 후지와라노 가문이었는데, 이 가문은 강력한 율령국가를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가문의 4명의 형제와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천연두에 걸려 전멸했다고 하네요.(신기한 것은 일본 역사의 전환점에 있었던 인물들이 어이없게 죽은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중요한 민란의 지도자들은 정부군에 체포되어 죽은 명예로운 것보다, 지나가던 화살에 맞아죽거나, 밥먹다 체하여 죽거나, 물먹다 죽거나... 한 일이 많은데, 그 이유도 참 가지가지네요.)

이렇게 정부가 공백상태에 빠지자 권력자가 번번이 교체되었지만, 다시 후지와라씨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세는 어지러워서 후지와라씨는 또 다시 죽고, 집권자가 계속 바뀌는 시대가 옵니다. 이 시대는 천황보다 부처의 가호가 오히려 중요하다고 할 정도로 어지러웠고, 결국 나라시대는 80년만에 끝나고 다시 교토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이 때부터를 헤이안 시대 초기라고 하죠. 나라시대는 그 중요도에 비해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내용이 너무 짧네요.

이 당시 시대에 또 하나 중요한 일본의 지역은 간토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일본정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독립투쟁을 합니다. 특히 당시 형상되기 시작한 개발영주의 무사집단들은 국가에 저항해가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기타 일본의 섬들은 독립국이나, 소국이거나, 문명의 혜택이 없던 지역이었습니다. 거론할 거리가 없죠. 특히 류큐는 일본에서 1000년 이상 독립왕국을 유지한 지역입니다.

2. 헤이안시대의 셋쇼 정치와 원정 정치

헤이안 시대에는 이름이 어려운 2개의 정치체제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셋칸정치와 원정정치라고 하는 정치인데, 일단 일본사를 재미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용어에 질려버립니다. 뭔 말이 이렇게 어렵지? 왜 일본애들은 이름이 이렇게 길고 복잡해? 누가 누구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요.

용어 정리를 하면서 헤이안 시대를 정리해 봅시다.

셋칸정치란 천왕이 어리거나 여성일 때 천황의 외조부나 외가 친척, 또는 간파쿠(유력 신하)가 정치를 대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왕이 어릴 때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가문의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한 후에 이들이 왕 대신 정치하곤 했죠? 바로 그겁니다.

나라시대부터 유명했던 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은 계속 가문의 여자를 천황과 결혼시키며, 정권을 잡은 유명한 셋쇼(셋칸정치) 가문입니다.그 셋칸 정치는 후지와라노 가문에서 4명의 여자를 동시에 천황가에 시집보내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셋칸 정치의 단점은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면 그 다음대에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셋칸 정치는 헤이안 초기 후지와라 가문에서 성행했지만, 결국 황태자가 태어나지 못하면서, 천황의 부친이 직접 정치하는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원정>이라고 합니다. 원정을 쉽게 말하면, 조선 후기에 안동김씨 외척 가문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한 흥선대원군 기억나죠? 그 분을 생각하면 됩니다.

원정정치는 어린 천황을 대신해 강력한 상황제(천황의 아버지)가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헤이안 시대에는 중기 이후에는 <원정>정치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 이유는 상황제에게 <원청>이라는 강적한 사적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죠. 원청은 소위 우리가 만화에서 보는 <닌자 + 사무라지> 정도의 무사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무서운 것이 없는 강력한 무사 집단이었고, 사람 목숨을 쉽게 여기는 부랑자 집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불교가 유행하여 감히 <승병>들에게 덤비는 자가 없었는데, 이 <원청>은 상황제의 한마디면 승병들조차 가리지 않고 다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원청>과 같은 무사 집단은, 귀족 불교 사회인 헤이안 시대를 몰락시키는 집단이기도 합니다. 천황가는 왕실의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무사 집단들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무사 집단들은 점차 하늘의 자손이라 우기는 천황집단보다 실제 무력을 가진 <무사집단>인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무사집단의 시대인 <막부>가 탄생한 것은 어떻게 보면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하려던 황실가가 내분에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12c 후반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무사집단이 일본 열도를 호령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 첫 번째가, 당시 가장 강력한 무장 집단인 <타이라씨>였습니다. 타이라씨는 높은 고관 자리에서 500개 이상의 장원(일본 전체의 절반이상)를 소유하였고, 중국 송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얻은 무사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타이라씨는 조정에서의 성공을 더 중시한 나머지 무사적 성격이 약해지고 귀족화하면서 다른 무사계급에게 밀리고 맙니다. 당시 신흥 무장 세력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다른 무장세력과 타이라씨를 격파하고 전국을 평정하였습니다.

이 시대부터가 일본의 중세시대로 무사들이 주도하고 서민층이 대두하는 시기입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일본 중세를 연 첫 번째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장부터는 일본의 중세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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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지도(위)
  
   훗가이도 지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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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지도(위)
오키나와 지도(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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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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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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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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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 - 토지개혁을 시도하다.

1. 6-7c 토지제도를 개혁하다.

일본 다이카 개신의 최대 핵심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의 율령체제를 도입하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당의 균전제도를 모방하여 토지를 개혁한 반전수수법의 시행입니다.

이 파트에서는 2번째 개혁 내용인 반전수수법과 토지제도를 이야기해 봅니다. 토지제도를 통해서도 일본 고대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 먼저 야마토 정권부터 한번 봅시다. 야마토 정권은 지금까지 이야기 했듯이 호족들이 연합하게 만든 정권입니다. 각자 땅을 가진 호족들이 유력자를 천황으로 모셔 통일국가를 이루는 구조였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천황은 세력을 키워 중앙집권화를 추구하고 싶었고, 그래서 도입한 국가이념으로서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리고, 국가통치제도로서 수용한 것이 당의 율령제도였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했었습니다.

다이카 개신으로 천황권이 강해진 일본 천황은 이제 모든 일본의 토지를 국왕의 토지로 하겠다라는 왕토사상의 이념까지 주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7c에 발표된 <개신의 조>입니다. 개신의 조는 4개조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바로 <공지공민제도>입니다. 공지공민이란,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이며, 모든 사람의 천황에 소속된 사람이란 뜻이지요.

이와 동시에 발표된 토지법이 바로 그 유명한 <반전수수법>입니다. 이 법은 당의 균전제도를 모방한 제도입니다. 당의 사신으로 갔다온 견당사 일행이나, 당나라에 유학다녀온 도당유학생들이 당의 선진 제도를 가져와 일본에 시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나라 균전제는 모든 국토가 황제의 국토라는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해주고, 이 대가로 세금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세금과 노역이 바로 조.용.조입니다.(당나라 제도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일본은 이것을 모방하여 비슷한 제도인 반전수수법을 만듭니다. 이 제도는

1. 6살 이상의 남자에게 반전이라고 해서 토지를 줍니다.

2. 양민에게는 2단(107평)을, 천민에게는 2/3단을 주고, 토지를 준 대가로 세금을 받습니다.

즉, 반전수수법은 반전=토지, 수수=주고받다(수수료할 때 수수입니다) 라는 용어로 해석하면 됩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가혹하게 많이 걷어가는 세금이 싫어서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지방 호족들은 당연히 반발했구요.

2. 7-8c 후속 조치들을 계속 시행하다.

반전수수법이 가혹한 세금 때문에 지켜지지 않자, 천황가는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법을 정했는데 그것이 <삼세일신의 법>입니다. 이 법의 내용은

1. 황폐해진 반전을 개간한 자는 평생 그 땅을 개간한 자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2. 황무지를 개간한 자는 3대에 걸쳐 토지사유를 인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모든 땅은 국가땅이라는 균전의 이념(왕토사상)을 버리고, 일정한 기간동안 백성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다가도 3대가 되어 국가에 반납할 때쯤 되면 다시 땅을 버려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국가는 또 고민합니다. 고민과 고민 끝에 <국가는 결국 토지는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버립니다.

토지를 개인이 가질 수 있다는 새로운 법을 8c의 <간전영년사재법>이라고 합니다.

3. 10c 이후 토지 사유를 통한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다.

자, 이제 일본의 천황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토지국유제도를 포기했습니다. 토지는 이제 천황의 것이 아닌 개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법이 일본 고대사에 끼친 영향은 무지 큽니다. 토지를 각각 가진 자들이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회.... 딱 생각나는 것이 유럽이나 중국의 봉건제도 아니겠어요? 점점 일본이 봉건제 사회인 중세사회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간년영년사 제법>으로 토지를 사유화한 계층은 귀족과 불교사원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돈 많은 농민들도 토지를 사거나 개간해서 영주가 되기 시작합니다. 돈많은 농민영주들은 가난한 농민과 농노를 부려 토지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토지를 형식적으로 귀족과 사원에 기부합니다. 진짜 주는 것은 아니고 세금을 바치겠으니, 내 땅을 지켜달라는 액션이죠. 이렇게 형식적으로 귀족에게 바친 땅을 기진지라고 하니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생깁니다. 이 새로운 장원 질서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돈 많은 농민은 개발영주가 되어 커다란 장원(토지)를 갖고 농노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돈을 번다.

2. 이 개발영주(농민지주)는 유력한 귀족에게 토지를 기진지를 바친다고 말하며 세금을 낸다. 유력한 귀족은 이 개발영주의 땅을 지켜준다.

3. 유력한 귀족들은 개발영주에게 받은 돈이나 일부 땅을 황족이나 중앙의 실력자에게 바치고, 관직이나 높은 권력을 얻는다.

자,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번 개발영주(농민지주)들은 점차 무장하여 돈을 벌게 되고, 차츰 자신의 토지를 자신이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즉, 돈이 많아진 개발영주(농민지주)들은 나중에 무사계급이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장원질서는 계속되어 땅을 가진 자들은 자기 윗선에 계속 토지를 형식적으로 기증하고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게 됩니다. 이것이 11c 이후 중세사회에서는 봉건제도라고 불리는 제도로 정착됩니다. 이 개발영주, 유력한 귀족, 중앙의 실력자라는 구도는 중세시대로 말하자면 무사, 슈고, 지토 등등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중세시대에서 자세히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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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카 개신 - 당의 제도의 수용

1. 율령체제를 도입하다.

일본 다이카 개신의 최대 핵심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의 율령체제를 도입하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당의 균전제도를 모방하여 토지를 개혁한 반전수수법의 시행입니다.

이 파트에서는 율령체제 부분만 이야기해 봅니다.

율령의 수용은 다이카 개신으로 천황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당에 파견된 견당사에 의해서 도입되었습니다. 여기서 율령격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알아볼까요? 율령격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사이트의 중국사편의 당나라(현종), 통일신라편의 무열왕조를 보면 자세합니다. 어짜피 일본은 당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니 여기서는 간략한 개념만 설명할께요.

율 - 형법, 국가의 통체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형법을 말한다.

령 - 행정법, 국가가 효율적으로 국가운영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법들을 통칭한다.

격 - 이것은 시대가 변하여 율령이 백성들의 생활과 맞지 않을 때, 임시로 정하여 쓰는 법을 말한다. 또, 율령이 폐기되었을 때에는 격이 율령을 대신하는 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식 - 율령에서 제시한 법의 큰 틀에 포함되지 않은 세부적인 시행규칙들을 정한 것이다.

이 네가지를 율령격식이라 하며, 실제 우리 삼국시대에서도 국왕권 강화를 위해 각종 율령을 반포한 경우가 많습니다.

2. 진신의 난과 율령체제

율령 체제와 관련된 재미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 다이카 개신을 성공한 나카노 오에 황자(덴지천황)은 당시 후계자 관례를 무시하였습니다. 원래 관례상으로 천황의 후계자는 유력호족출신 황후의 황자가 계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관례상으로는 오아마 황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나카노는 똑똑한 아들인 오토모를 후계자로 임명한 것입니다. 관례보다 자신의 뜻이 중요하다 생각하고는 천황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지요. 다이카 개신을 성공하고 강력한 천황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덴지천황은 오아마는 너무 약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오아마는 천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혹시 천황에게 밑보여 죽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소심한 오아마는 머리를 깍고, 황위를 포기하겠다고 하면서 시골로 은거해 버렸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똑똑하다 믿었던 오토모가 천황이 되었지만, 정책상으로 계속 실패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토모는 백제에 지원군을 보냈다가 고구려군에게 크께 전쟁에서 패했고, 천황권 강화를 위해 호족을 억압하여 지방호족들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기회를 노린 소시한 오아마 황자는 컴백해서 <진신의 난>이라 불리는 반란으로 오토모를 제거하고 천황에 오릅니다.

반란을 위해 각지의 군대를 모으고, 무력으로 천황에 오른 오아마 황자의 군대는 다른 어떤 호족보다 강했습니다. 호족들은 새로 정권을 잡은 오아마 황자가 너무나도 군사적으로 강하자 모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오아마는 정권을 잡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권을 잡은 뒤 호족세력들을 꼼짝못하게 묶어놓는 것도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아마 황자는 가장 강력한 천황으로서 군림하게 되었고, 일본은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이카 개신을 성공한 천황이 가장 약해보여서 절대 후계자로 삼지 않으려고 했던 오아마가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가장 강력한 천황이 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네요. 영웅의 진가는 숨을 때는 몸을 잘 숨기고, 기회를 잘 이용하며, 위기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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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씨 이야기

1. 불교 수용과 소가씨의 주장

일본 고대 초기인 6-7C를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는 소가씨입니다. 일본 고대 초기의 야마토 정권은 유력 호족들이 연합한 상태에서 서로간의 합의에 의해 천황을 가장 신성한 권력자로서 모시는 구조였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이러한 유력 호족들에 의한 정권을 탈피해서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지요.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 불교 수용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했으므로, 천황은 백제 성왕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를 통한 국가통합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도 카스트 제도를 초월한 만민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리가 국민 통합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의 절대적인 구원의 신인 미륵불, 전륜성왕을 왕에게 대입하여 왕 자체가 부처가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는 사상을 백성에게 주입하여 왕권을 신성시 하였죠. 즉, 불교의 수용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절대 안된다며 반대한 유력 귀족이 모노노베씨 가문 이였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정책을 찬성하며 선진불교문화를 수용하자는 유력귀족은 소가씨 집단이었습니다. 소가씨 집단은 천황의 후원을 받아 모노노베씨 집단을 압도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일본 조정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소가씨의 노력으로 일본에서는 불교가 공인되고, 국가가 중앙집권화되었습니다.

2. 소가씨 집단과 쇼토쿠 태자 사이의 비극

실권을 잡은 소가씨 집단은 여자를 천황으로 임명한 뒤 그 가문이 모든 정치를 독재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소가씨의 실력자는 소가노 우마코였습니다. 소가노 우마코가 천황으로 임명한 여자가 소가노 집단 출신의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입니다. 그리고 소가씨는 자신들의 친척 중에서 유력자인 쇼토쿠 태자를 황태자로 삼아 소가씨의 영원한 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소가씨와 다른 사상을 배워갑니다. 고구려, 백제가 강해진 이유는 중앙집권화를 빨리 이루어 국왕권이 강했다는 생각에, 쇼토쿠는 소가씨 집단보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고구려, 백제를 모방한 관등제(12관등제)와 율령(헌법17조)를 만들었습니다. 또, 견수사를 수나라에 파견하면서도 수와 왜가 대등한 관계임을 주장하는 등 자주적인 국왕권을 추구한 인물입니다. 또, 쇼토쿠 태자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라는 전설도 전해져 오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과 천황가의 신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입하려는 후세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쇼토쿠 태자의 정책은 소가노 가문의 영광을 추구하는 가문 이념과 맞지 않았고, 태자는 결국 소가씨와 대립 끝에 정권에서 밀려나 불교 공부를 하면서 살다가 자살했다라고 합니다. 기록에는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건 신빙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다이카 개신과 소가씨 가문의 몰락

소가노 가문은 점점 견제할 세력도 없이 독자적으로 너무나 성장했습니다.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천황마저 그들의 가문에서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독재는 다른 귀족 가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결국 소가노 가문은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쟁이나 다른 공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 아니라 암살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가노 가문의 유력자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나카토미노 가문에 의해 하나하나 암살로 제거된 뒤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다시 일본의 정권은 천황에게 돌아왔으며, 천황인 나카노 오예 황태자는 <개신의 조>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토지공전제를 표방하는 법인데, 그 내용이 당시 호족 가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즉, 호족은 모든 토지를 가질 수 없으며, 토지와 모든 백성은 천황의 것이라는 법입니다.(공지공민제) 과연 당시 그것이 잘 시행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법이 천황권 강화에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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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통해 총체적으로 보는 일본 고대사

1. 일본 고대 불교를 정리해보자.

일본 고대사는 불교로 정리하면 편합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사에서 중요한 불교부터 일단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2. 5-6C 야마토 정권 초기 불교

초기에는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C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그 유명한 일본의 쇼토쿠 태자이죠. 쇼토쿠 태자는 실제, 아직기와 왕인 등 백제인들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6C 무렵 초기의 일본 불교는 한반도의 삼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아스카 문화>라고 하는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를 수립하였습니다. 담징 들어보셨죠?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나 석가삼존상 등이 이 때 일본 초기의 불교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삼국문화를 넘어 중국문화를 직접 수입하기 위해 견수사(수나라에 파견), 견당사(당나라에 파견)와 같은 사신들을 중국에 보내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항해술이 별로라 가다 죽는 경우가 절반이상이라고 하네요. 그래도 일본인들은 목숨걸고 갔답니다.

3. 7C 다이카 개신과 율령

7C가 되면서 이제 일본은 한반도에서 문화를 받아들일 통로가 막히게 됩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백제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이제 일본인은 통일신라와 교류하면서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하쿠호 문화>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문화를 당나라 초기 문화라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보면 통일신라의 문화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건 한일양국의 주장이 달라서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제 백제가 사라지자 적극적으로 중국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불교를 넘어서서 당나라의 율령체제 자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이라고 합니다. 다이카 개신의 특징은 국왕 중심의 유교적 중앙집권체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중앙집권화를 일본은 이제서야 하는 것이지요. 이 일본식 중앙집권화의 특징은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라는 점입니다. 천황이 고대 신화와 선민사상을 가진 특수한 존재로 나서면서, 유교를 통해 중앙집권을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령의 수용과 불교 사상의 심화로 일본은 이 때부터 동아시아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는 국가가 되었지요. 다이카 개신은 곧, <동아시아 문화권>으로의 편입을 뜻합니다.

4. 8C 나라시대

나라시대는 약 50년정도 되는 짧은 시기입니다. 자세한 것은 뒤에 다루겠지만, 이 시대의 특징은 신라, 발해, 당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헤이죠코로 천도한 시기입니다. 이 때 일본은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불교와 승려세력이 너무 강해졌고, 불교와 승려세력이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강한 시대라고 파악하시면 됩니다. 또, 불교세력을 등에 업은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고사기, 일본서기 등 역사책을 제작하는 등 변혁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5. 9C- 12C 초기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의 특징은 이제 점차 한반도,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 일본은 가나 문자가 제정되었고, 귀족 계급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나로 표현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도 만들어 갑니다. 이 귀족들의 시가를 <와카>라고 합니다. 또 중국에 보내던 견당사의 파견을 완전히 중단합니다. 그리고, 일본 자연과 풍속을 아름답게 그리는 풍속화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 시대의 분위기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율령체제를 동요시키면서, 천황의 신성함을 크게 훼손시키는 시기입니다.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장원(호족들의 대토지)이 확대되고, 이들이 귀족사회를 이끌면서 왕권을 약화시킵니다. 또, 외척들이 천황권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황제권이 많이 약화되지요. 즉, 불교에서의 부처라고 주장하던 왕권을 더 이상 귀족들과 무사들은 인정하지 않게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천황권이 몰락하게 되고, 일본은 무사들이 막부를 열어 다스리는 무가정권시대로 넘어갑니다. 이게 일본의 중세시대지요.

불교를 위주로 보니, 일본 고대사의 흐름이 환히 보이지요? 자 그럼 다른 파트에서 일본 고대사를 한번 바라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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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시대의 시작

1. 야마토 시대의 시작

야마토 시대는 그 기원이 약 3C부터인데, 이 무렵은 바로 야마타이국에서 여왕이 등장하는 시기부터라고 보면 됩니다. 청동기 야요이 시대에서의 소국(족장이 다스리는 작은 국가, 저는 보통 동네국가라고 합니다)을 강력한 여왕인 야마타이의 여왕 히미코(신공황후)가 통일한 이후 야마토 지방(나라현)의 호족들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국가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때 부터를 일본에서는 고대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죠.

야마토 정권이 일본을 통일했다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아 논란이 많습니다. 특히, 야마타이국의 여왕이 과연 야마토 지방(나라현)에 있었냐는 것 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일본에서는 다수설로 야마타이국의 강력함을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야마타이국의 위치논쟁은 일본선사시대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나라현의 위치만 파악하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에서의 정설은 초기 야마토 정권인 나라지방의 야마타이국이 있었다는 가정하에, 이 국가는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일본 열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 역시 이 주장은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로부터 선진 기술과 물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안전한 교통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야마토라는 연합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2. 고분으로보는 일본 고대사 - 우리나라 고인돌과 비교하면 좋을 듯하네요...

특히 야마토 정권이 3-4C 무렵 일본을 통일했다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고분>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4C 이후 일본에서는 전국적으로 공통된 모습의 고분(무덤)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일본이 강력한 나라의 지배를 동시에 받았다는 증거가 되죠.

그런데, 이 야마토 시대의 고분 특징은, 시대가 바뀌면서 고분에 묻힌 자들의 성격도 변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고인돌과 비교해서 쉽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초기 3-4C : 매장자가 신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부장품에 구리거울, 옥이 많았다. 제정일치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초기 우리나라 고인돌처럼 유력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 무덤으로 볼 수 있다.

2 중기 5C : 매장자가 군사적 통솔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부장품에 마구, 무기 등이 보인다. 실제 정치를 하는 유력자가 묻혀있다. 전형적으로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보이는 무덤과 같다.

3. 후기 7C : 매장자가 평민으로 확대되었다. 유력농민(장원주)까지 고분을 만들어 고분수가 무지 많다. 우리나라 고인돌도 후기에 6000개 이상으로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고인돌이 점차 지배층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7C 이후 : 고분이 거의 없다.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화장의 풍습이 생겼다는 뜻인 듯 싶다. 따라서 불교가 그 사회를 점차 지배해감을 볼 수 있다.

야마토 정권에 대한 성립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야마토 정권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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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사를 총체적으로 개관하고 시작힙니다.

1. 일본 고대사를 바라보는 키워드는?

일본 고대사를 정리할 때 이것으로 시작되어, 이것으로 정리된다고 한마디로 요약해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답은 불교와 율령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정리할 때도 불교수용, 율령반포를 고대사의 키워드로 활용하는 것처럼 일본사 역시 불교, 율령이 일본 고대사를 정리하는데에는 최고의 키워드라고 보면 됩니다. 이 두가지는 왕권강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진흥왕이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고 우기면서, 부처는 곧 왕이라는 왕즉불 사상과 신라 진골귀족은 부처의 일족인 크사트리아족이라는 이념으로 백성들을 통합하고, 국가 이념을 정비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은 더 심합니다.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곧 중앙집권을 위한 기본 포석이었고, 이 불교를 통해 중앙집권이 되면서부터 <율령>이라는 법령을 통한 통치를 시작하니까요. 그리고, 일본 고대국가들이 망하는 것도 이 불교라는 종교의 신성함이 사라지고, 율령이 문란해지면서입니다. 즉, 일본 고대는 불교, 율령의 역사로 정리하면 쉽지요.

2. 일본 고대사는 어떤 정권이라고 보면 되는가?

일본 고대사는 흔히 <야먀토 정권>이라는 통일적인 성격의 국가가 일본에 등장한 뒤, 불교와 율령을 수용하여 전성기를 맞이하다가 망해간 시대라고 칭하면 됩니다. 야마토 정권은 6C 백제 성왕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는데, 이 불교가 일본에 융성할수록 왕권이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왕즉불 사상을 통해 왕이 곧 부처라는 이념은, 지방 호족들이 감히 왕에게 덤빌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니까요. 야마토 정권에서 특히 불교를 숭상하여 진호국가(부처를 국가적으로 숭상하는 국가)가 된 시기가 7C 나라 시대인데, 이 시대 가장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8C 이후 승려들이 정치가와 유착하고, 불교가 부패하게 되면서 794년 간무천황은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 시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불교가 부패하고, 율령체제가 흔들리면서 왕권이 약해진다는 점입니다. 왕권이 약해지자 호족들은 불교를 대신하여 밀교, 아미타 신앙 등을 도입하면서 혼란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천황은 이러한 지방 호족들을 막기 위해 독실한 불교 승려를 <승병>으로 만들어 부처의 힘으로 호족들을 탄압하려 했습니다. 호족들은 부처의 천벌을 무서워해 감히 천황과 맞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족들은 부처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병들을 등용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무사)들입니다. 이들은 돈만 주면 승려과 부처고 없이 무조건적인 학살로 끝을 보는 무시무시한 자들이었죠. 이들은 부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는 주인에게 의리로서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무사들이 정권을 잡게 되는 시대를 일본사에서 중세라고 부릅니다. 그럼 이제 일본 고대사 이야기를 세세하게 하나 하나 짚어 나가며 내용을 전개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이야기 위치 : 죠몬시대(석기시대) - 야요이 시대(금속시대) - 야마토시대(일본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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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 국

1. 일본의 신화

일본의 신화는 일본서기에 쓰여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니혼쇼키라고 일본식으로 많이 부르는데, 이 일본서기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고, 중국측 기록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며, 특히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 부분에서는 당시 한반도 정세와 너무 안 맞아서 위작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사료의 신빙성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본의 정사인 만큼 이 책을 인용하여 신화를 서술해볼까 합니다. 어짜피 신화란 있었던 사실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key의 역할을 하는 편이니까요.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아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일본 고대의 야마타이국 논쟁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여왕 신공황후가 나옵니다. 원래 일본에 히미코라는 여군장이 있었는데, 일본역사책은 이 히미코를 일본의 절대군주인 신공황후로 상정한 것이지요. 이 신공황후는 야마타이국을 이끌고 있었고 야마타이 국은 곧 일본의 야마토 조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야마타이국은 곧 야마토 지방(일본 나라현)에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전편에서 지도로 보았지요? 나라의 위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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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고대 강국 야마타이국이라는 여왕의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이며,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일본인들도 알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요동인지, 평양인지, 아니면 수도가 이동하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일본정사인 일본서기로 따지면 당연히 야마타이국은 야마토 정권과 연결되는 나라지방입니다. 그러나 중국책인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일본의 위치와 방향을 따라가보면 방향이 일치하는 곳은 규슈지방(위 지도의 기타규수-나가사키 근처)입니다.

이것은 일본 고대사에 큰 숙제를 던져줍니다. 만약 야마토 지방이 일본 고대 강국인 야마타이국이라면 일본은 초기부터 여왕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과도기의 연맹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변방인 규슈가 야마타이국의 중심지라면 고대 일본은 그냥 작은 소국국가들이 있었던 수준이 되는 것이고, 야마타이국도 수많은 일본 소국 중 변방에 위치한 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고대의 여왕인 히미코(신공황후)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일본서기에서는 이 신공황후가 가야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뒤 가야-백제남부-신라남부에 걸치는 영역을 200년간 지배했다고 나오거든요. 물론 허황되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기록을 꽤 많이 믿고 있습니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를 일본이 위조한 목적도 이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앙이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하며, 일본을 격파했다는 기사는 일본측에 의해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격파하였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양국이 풀어야할 문제중 하나죠. 신묘년조 기사가 포함된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은 한국사 사료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고구려사를 풀어 쓸 때 자세히 설명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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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명의 탄생

1. 1만년전의 일본 - 죠몬 시대

일본의 역사는 죠몬시대부터 시작합니다. 조묜시대를 우리말로 하자면 석기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죠몬시대는 약 1만년전도 계속되었는데, 보통 석기시대가 그러하듯 평등사회였습니다. 수렵과 사냥을 통해 점차 무리사회가 발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판 형태의 집인 수혈식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일본땅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35만년 전인데, 일본측은 50만년 전까지 그 연대를 끌어올리려고 시도중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재 일본인의 조상이 나타난 것은 3-4만년전의 일입니다.(일본의 현생인류의 조상을 유럽의 크로마뇽인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죠)

일본인은 고몽골인종에 속하는데, 약 1만년전 지구에 빙하기가 끝나고 홍적세가 왔을 때, 한반도와 기타 지역에서 이동한 민족을 일본인의 조상인 죠몬인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국가활동을 시작하게 된 야오이 시대(우리로 따지면 청동기 문명기)에도 한반도, 특히 마한지방에서 많은 이주자가 있었고 그들이 지금 일본인의 주류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 일본인의 주류는 죠몬인과 야요이인이라는 점이죠.

일본은 유전자 연구 등을 통해 일본인의 선조가 누구인가를 집요하게 밝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는 <일본인의 기원이 오직 한반도에서 왔다는 문제>를 과학의 힘을 빌려 부정하려는 시도가 깔려있는 듯 합니다. 연구 결과로 보면 일본인의 선조는 남미의 원주민 유전자와 같다고 합니다. 또다른 연구에서는 일본인의 절반이상이 한반도를 거쳐 대륙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일본인이 에스키모계라고도 주장합니다.

이 죠몬시대는 토기의 형태에 따라 6개의 시대로 나뉘는데, 우리는 그냥 이 시대가 구석기 시대구나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국사에서도 구석기 시대가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는 것을 심도있게 배우진 않잖아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이 시대인들은 수혈식 집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석기를 사용했다 정도면 될 듯 하네요.(우리 구석기랑 흡사하지만, 시기적으로 우리 구석기보다 너무 늦기 때문에 구석기, 신석기 생활이 섞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석기시대의 죠몬시대 말기에 청동기, 철기를 사용하면서 농경생활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쌀농사가 시작되며, 전쟁이 많아지는 사회변화를 겪는 시기가 오는데 이 시기가 바로 일본의 <야요이> 시대입니다. 이것도 그냥 청동기, 철기가 한번에 혼재된 청동기 위주의 사회라고 보면 되겠네요.

사실 일본고대사는 우리 국사시간에 배운 것과 같은 자세한 국가구분이나 시대구분이 미약합니다. 일본 역사가 상당히 늦고, 외부전래가 많으며, 강력한 국가 출현도 3c이후에나 나타나며, 정확한 기록의 사서가 없기 때문이죠. 일본고대사도 우리 고대사처럼 거의 대부분을 중국측 동이열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죠몬시대에는 토우가 많습니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인데, 거의 대부분 임산부 여성의 모습니다. 이 토우는 우리나라에 고인돌이 수천점이 있듯이 토우자체가 1만점 넘게 일본 곳곳에 있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것이다, 숭배를 위한 것이다, 여성에 대한 저주이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등등 설이 많습니다.

2. BC 5- 3C의 일본 - 야요이 시대

야요이 시대란,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청동기, 철기 시대입니다. 이 때는 철기를 이용해 농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쌀농사가 시작되었고, 강력한 철제 무기를 활용하여 일본의 소국들이 동네국가 수준을 벗어나 통일된 국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야요이 시대의 특징은 국가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라는 점입니다. 이 시기는 일본 규수지방에서 소국으로 시작된 일본의 문명은 점차 일본 중앙부로 진출하게 됩니다.(야요이 시대의 중심부가 규슈라는 설과 나라현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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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도부터 한번 눈에 익혀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일본고대사의 출발점은 규수지방입니다. 지도의 나가사키-후쿠오카-키타규슈를 잇는 지역이 일본초기 문화가 탄생한 지역이지요. 이후 일본문화는 점차 동진해서 나라현으로 발전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동쪽으로 쭈욱~~~ 문화가 진출해 갑니다.

보통 야요이 시대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5세기 규수 북부인 키타규슈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을 기원으로 합니다. 이 때에는 이미 청동기, 철기, 돌칼문화 등이 발전하였죠. 이것이 기원전 3세기 야요이 문화를 완성하여, 이 시대를 야요이 시대라고 정의하는 것이지요.

한국사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와 철기를 가진 이주민이 내려와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하였다고 배우지만, 일본사에는 그런 내용보다는 일본인 스스로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한국사에서는 벼농사 전파의 증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1. 갑작스럽게 일본인들의 인구가 증가하고 체형이 변화하였다. 일본인의 평균신장이 커지고, 얼굴이 길어졌다.

2. 야요이 문화의 청동기, 돌칼은 한반도의 것과 유사하다.

일본사에서는 그 반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1. 벼농사는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의 것이나 그것이 꼭 한반도일 수는 없으며, 중국, 러시아, 태평양 등 경로는 다양하다.

2. 벼농사 전파 직후 일본에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이미 일본인들이 벼농사에 대해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3. 벼농사는 중국 강남지방에서도 직접 규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중국농법을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양쪽의 고대사는 너무나 대립적인 부분이 많아서 어떻게 한쪽으로만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일본 고대사의 왜곡문제는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문제이므로 서술하기가 좀 민감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치열한 대립부분은 양쪽의 견해를 모두 제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아서 판단하되, 일본의 주장이 틀린 부분은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당시 토기가 죠몬시기와는 다른 야요이식 토기라는 점인데, 이 토기는 이전 일본인의 토기와 다른 한반도식 토기라는 점입니다. 북부 규수의 귀족들은 이 때 이미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온 청동거울을 통해 세력을 과시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반도식 물건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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