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인도 정통철학과 대승불교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선근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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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영혼과 윤회관(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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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형근 (대승,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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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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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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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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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변천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사사키 시즈카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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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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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강남 (현암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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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권오민 (민족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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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칼루파하나 (천지,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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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진섭 (지경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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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시간 구조대. 4: 붓다의 발자국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류가미 (삼성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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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 석가모니:그 생애와 가르침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와타나베 쇼코 (동쪽나라,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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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탐구시리즈:세계의 위인 13)
카테고리 유아
지은이 김미심 (국민서관,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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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병역 (국학자료원,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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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구. 1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담마빨라 (열린경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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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고사 속 역사여행 10 - 불구대천의 어원과 고대의 <예 사상>

부모에 대한 예의가 첫 번째인 사회....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야기를 정리한 <예기>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기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까지 예(禮)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책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예>라는 것을 무척 중요시 하였는데, 이 예기는 <시경, 서경, 춘추, 주역>이라는 유명한 책과 함께 5경으로 불리는 책이죠.

다른 유명한 책들은 모두 시경, 서경 처럼 <경>자를 쓰지만, 예기는 <예>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각주(주석)을 달았다는 뜻에서 <예를 모아 기록한다는> 예기로 전해져 옵니다. 예기는 1권의 책이 아니라 예와 관련된 모든 문헌을 모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여러 파트에서 모은 책들을 다시 정리해서 쓴 경전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가면서 까지 예에 대한 책을 편찬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키워드로 풀어보도록 하죠.

불구대천 - 같은 하늘을 마주할 수 없는....

예기 곡례편에 나와있는 말을 한번볼까요?

자식된 자의 도리가 무엇인가?

겨울이 되면 부모님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이 되면 시원하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밤이 되면부모가 잘 주무시도록 해야 하며, 아침이 되면 문안을 드려야 할 것이다.

친구와 다투면 누가 부모에게 미칠지 모르니 다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략)

부부간의 다툼은 부모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며,

형제간에 의가 상한다면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효(孝)로부터 비롯하지 않는가?  (줃략)

아비의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늘 가지고 다녀 언제나 복수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같이 하여 살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불구대천이란, <같은 하늘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의 한자입니다.

예(禮) 란 무엇인가?

중국에서 <예>라는 것은, 원래 천자에게 <지배층>임을 증명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의 이상국가라고 여겨졌던 주나라는 봉건제도가 있었죠. 봉건제도는 황제가 전 국토를 다스리되, 각 제후들을 지방의 번왕으로 임명하여 각 지역의 통치를 맡기는 제도였습니다. 또 각 제후들 역시 자신들의 신하(가신)들에게 자신의 땅 일부를 주는 대가로 충성을 요구하였죠.

지방의 유력한 제후들이 다스리는 가신집단이 <대부, 경, 사> 등의 신하였습니다. 그 신하들은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는데, 그 서약식을 <작>이라고 합니다. 그 서약을 받는 것을 <작위>를 받는다고 하죠. 그리고 그 서약을 할 수 있는 교양과 덕망을 <예>라고 합니다. 즉, <예>란, 지배층이 될 수 있도록 <작>을 받는 의식을 아는 것을 말하죠. <예>를 알고 행하며 <작>을 받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합치면, <예의>가 되겠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대 중국에서는 <남작, 백작, 자작>과 같은 작위들이 있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은데, 우리나라의 고려에서도 작위는 있었습니다. 토지를 받으면서 작위를 같이 받았죠.

작위는 관직과는 좀 다르네요. 관직이 자신의 주어진 위치라면, 작위는 자신의 도덕적 인품을 상징하면서, 자신의 영토에서 자신이 갖는 권위 비슷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라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원래 예라는 뜻은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내용은 춘추시대를 통일한 진, 한 대에 바뀌게 됩니다. 특히, 한나라에서 <유교>를 국가사상으로 통일하면서 예는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의 으뜸은 효(孝)가 아닌가?

그럼 다시 <불구대천의 원수>로 돌아와보죠.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공자, 맹자, 순자 등 유가파가 등장했었습니다. 특히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함이 <가족윤리>가 파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죠.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 仁>인데, 이것은 사회적 관용과 가족간의 사랑을 한 글자에 압축시켜놓은 단어였습니다. 공자는 <인>이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찾기 위해서는 효도, 우애 등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것을 맹자가 국가윤리까지 확대하였죠. 맹자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군주가 신하를 사랑하는 <덕치주의>가 곧, 평화의 시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가족윤리>였고, 가족윤리의 핵심은 곧 <부모>였습니다.

다시, 위에 적은 예기 <곡례편>을 보세요. 유학자들이 생각한 <예>는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 등에서 지켜야 할 윤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 윤리로서 이것을 어긴 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된다고 여긴 것이죠.

유가에서의 살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구대천의 원수는 죽여야 한다>는 이념은 왜 나왔을까요?

그건, 윤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일것인데, 부모, 형제에 대한 윤리를 무시한 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 형제, 군주, 부부 등에 관련된 것들은 법에 의해 왈가왈부할 내용이 아닙니다. 인간의 절대 윤리이므로, <도덕>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들이죠. 이것은 법과 상관없이 인간이기에 어기면 처벌해야 할 것들입니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는 이 윤리에 의해 마을 공동체, 국가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지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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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법에 우선하는 사회...

우리는 보통 법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구인들은 합리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에 적응이 잘 된 편이지요. 그런나, 아시아 전통 사회에서는 <법이 도덕의 표현>이라는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법은 최소한으로 필요합니다. 고조선에서는 8조의 법만 있었고, 이 8가지 법만으로 사회가 유지되었습니다. 그 말은 법이 많지 않아도 사회가 운영될 수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지금은? 수백, 수백만 가지의 법이 있으면서도 그 법을 피해 범죄를 만들고, 또 그것을 막기 위한 법이 생겨납니다. 법이 많고, 합리적인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요?

고대 사회에서의 <법>은 국가의 지침서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법을 어긴자는 처형을 하지만, 그 법은 도덕을 기준으로 설정되며, 법에 없는 내용이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면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대부분 전통왕조들은 아무리 나쁜 관리라 해도 <신하나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면, 신하와 백성은 자식, 수령은 어버이이기 때문에 자식이 어버이를 고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인이 남편을 고발할 수 없고, 친구의 죄가 반역죄가 아닌 이상 눈감아주는 것은 <의리>로 생각하였습니다. 단,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할 수 있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흔히 이런 경우는 <강상죄>를 범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즉, 수령이 아버지인 임금에게 반란을 하려고 한다던가, 형이 아버지를 죽였던가 등의 패륜은 고발할 수 있죠.

불구대천의 뜻...

정리하자면, 불구대천이란 <아비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유가의 가족윤리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은 속담처럼 쓰이게 된 것이죠.

유가사상은 지금 시대로 보면 고리타분한 사상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충성, 효도, 의리, 믿음, 열정 등을 실현하는 방법이 불과 10여년 전과 지금도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가사상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근본>이라는 측면은 아직도 동아시아인들의 머릿 속에 크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을 모시고, 벗을 사랑하며, 형제를 믿고, 부부간에 신의가 중요하다는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고 살아가니까요.

술을 먹고 적어서 그런가? 오늘 이야기는 횡설수설이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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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키워드>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기의 정치사를 정리해 봅시다.

1. 전제왕권의 성립 배경

지난 장에서 전제왕권을 정의내릴 때, 국왕의 1인 독재권이 아닌 <국왕권의 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실행>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성립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통일에서 그 핵심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기 신라는 <긴장된 군부 체제>가 계속되었습니다. 고구려, 백제와의 통일 전쟁, 중국 당나라와의 통일전쟁은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군사적 이념이 앞서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 무열왕 김춘추의 집권은 선덕여왕기 국가의 군사적 위기, 중국과의 통일 외교 등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문무왕기의 왕권 강화도 삼국통일의 위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구요.

특히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완성을 위해 중국 당과의 혈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중국과의 전쟁은 백제,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지원함으로서 백제, 고구려의 구 귀족들이 반신라적 감정을 갖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이들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을 6, 5 두품 등으로 임명하고 신라 귀족으로 인정함으로서 기존 신라 귀족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또 당과의 전쟁 속에서 친당 귀족 세력을 제거함으로서 왕권에 저항할 수 있는 귀족 세력은 점차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실제 무열왕기 비담, 알천의 난 이래 상대등 세력이 왕권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 이들이 통일전쟁기 국가통일의 명분 속에서 점차 제거당하면서 왕권은 극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후 신문왕은 기존 귀족세력을 철저히 억제하면서, 반대로 고구려, 백제 계열의 6두품, 5두품을 등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라의 6두품 출신들을 중용하기도 합니다. 강수, 설총, 이지성, 이순 등은 이 당시 신문왕을 보좌했던 전문관료로서 학문적 식련을 가진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신문왕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돕기 위해 마련된 기구가 바로 전문 교육 기관인 <국학>입니다.

2. 중앙집권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귀족권을 탄압해야 했다.

신문왕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관료제 완성, 지방에서는 국가기구에 의한 지방통치가 절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문왕기에는 중앙에서는 <귀족권의 억압과 행정적 관료기구 정비>, 지방에서는 <지방행정구역정비, 군사제도 정비>가 필요했습니다. 또 이러한 관료제를 지원하기 위한 <토지제도의 정비>가 필요했고,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적 이념으로 <유교사상>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등장한 제도가 바로 중앙의 <6전체제 완성>, 지방의 <9주 5소경 완성>, 경제적으로 <관료전 시행>,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의 실현과 국학 설치) 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존 기독권 세력인 <진골 귀족>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새로운 관료군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상대등 세력인 구 귀족을 탄압하고, 중시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행정관료체제>가 강화된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죠.

신문왕의 행정관료제 변화의 가장 큰 키워드는 <김흠돌의 난>입니다. 김흠돌의 난은 무열왕기 비담, 알천의 난과 같이 상대등과 구 귀족 세력을 제거하는 난이었지만, 그 규모와 목적이 무열왕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김흠돌의 난에 대한 기록을 한 번 볼까요?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 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약정한 후 반역을 행하려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의 도움을 입고 아래로는 종묘의 영조를 받아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찬 홈돌 등의 꾀가 발로되니, 이는 곧 인신이 공기한 것이요, 천지에 용납치 못하게 된 것이다. 정의를 범하고 미풍을 상함이 이에서 더 심한 것이 없다. 이러므로 병중을 모아 그 무도한 자들을 없애려 하매, 혹은 산곡으로 도망가고 혹은 궁궐에 와서 투항하였다. 그러나 그 여당을 탐색하여 모두 주살하고 3, 4일 동안에 죄수가 탕진함은 마지못해 한 일이었고, 이로 인하여 사인(士人)을 경동케 하였으니, 근심스런 마음은 어찌 조석으로 잊을 수 있으랴. 지금은 이미 그 요사스러운 무리가 깨끗히 제거되어 원근에 우환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는 속히 돌아가게 하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신문왕1년>

이 사료에 나오는 흠들이 김홈돌입니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으로서 가장 유력한 귀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문왕은 김흠들의 난을 이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걸림돌이 되는 기존 귀족들을 주살합니다. 특히, 당시 왕권에 위협적이었던 상대등 세력마저 제거하기 위해 신문왕은 상대등 김군관 부자마저 주살합니다. 김군관 부자의 죄는 김흠돌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보고만 있었는가라는 불고지죄라는 것이었죠. 상대등을 애매한 죄로 제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신문왕이 얼마나 구세력 제거와 중앙집권화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김흠돌의 난을 통해 김씨왕족은 왕권을 제약하는 상대등계 귀족 세력에서 왕권에 철저히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왕권 옹호세력으로 탈바꿈됩니다. 그리고, 신라 원래 귀족이었던 박씨, 가야계 김씨, 고구려계 유민 귀족들은 설자리마저 잃고 맙니다. 대신 왕의 조언자로서 학문적 식견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6두품 세력들이 행정관료군으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화왕계를 쓴 설총같은 사람이지요.

3. 새로운 관료군을 위한 국학을 마련하다.

국학은 골품귀족들을 누른 신문왕이 새로운 관료제 사회를 위해 마련한 신라 최고 학부입니다. 신라시대가 골품제적 신분사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왕의 관료제 지향의 이상은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신문왕은 국학이라는 대학을 통하여 중국 당나라와 같은 관료정치를 시행할 관료군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신라에서의 국학은 골품제적 신분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기에 사회적 기반이 너무 약했습니다. 국학이 존속한 것은 오로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일시적으로 왕권이 귀족권을 눌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국학의 문제점은 이 국학 제도가 관리 임용과 관련된 <과거제> 등의 임용체계와 연계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물론 6두품 출신들이 신문왕기에 많이 중용되지만, 관리 중용에 있어 국학은 참고사항일 뿐 이였습니다. 국학출신이라는 것이 어떤 사회적 신분 보장을 해주지는 못하였지요. 사회적 신분 보장은 골품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니까요. 실제 학교제도와 관리임용제도가 연계된 것은 고려 시대 광종이후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부터입니다. 물론 원성왕대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국학생들을 평가하고, 관료 임용에 참조하긴 하였지만, 이것도 골품적 한계 때문에 국가적으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국학은 예부에 속한다.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대학감으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경은 1인인데 경덕왕이 사업으로 고쳤더니,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일컬었다. 관등은 다른 부서의 경과 같다. 박사, 조교가 있고, 대사는 2인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이 주부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일컬었다 관등은 사지에서 내마까지로 하였다. 사는 2인, 혜공왕 원년에 2인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J,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 [주역J, [논어], [효경]을 가르치고, 혹은 [춘주좌전J, [모시], [논어], [효경]을, 혹은 [상서], [논어],.[효경], [문선]으로써 교수한다. 여러 학생의 독서에는 삼픔출신의 법이 있으니, [춘추좌씨전]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을 잘 통하고 [논어], [효경]에도 밝은 자를 상으로 하고,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으로 하고,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로 하되, 만일 [오경], [삼서]와 제자백가의 서를 능히 겸통하는 자가 있으면 등급을 뛰어넘어서 등용한다. 혹은 산학박사나 조교 1인을 명하여 [철경], [삼개], [구장]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등위는 대사 이하로 위가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케 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질박노둔하여 향상치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도량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케 하며, 등위는 대내마나 내마에 이른 다음 내보낸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국학은 신문왕이 골품적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통일이후 친당세력을 도태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친당세력들 역시 당과의 연계를 통하여 신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방해가 되었으니까요.

그럼 국학에 의해 등용된 자들은 신라 시대를 주름잡았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문왕은 국학출신들을 중앙집권적 관료군으로 양성하려고 했고, 6두품 출신의 국학생들은 왕의 자문, 문한을 통해 성장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골품제적 한계에 의해 진골귀족과 동등해지지 못하는 지산들의 상황에 대하여 더욱 고민하고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됩니다. 이후 신라 후기에 이들 6두품은 사회체제의 한계 때문에 국학보다는 대당유학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고, 이들이 숙위 학생으로 성장해 갑니다. 숙위 학생들은 국학생과 동등한 대우, 또는 그 이상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라말기 이들은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반신라적 성향을 가지기도 합니다.

9월에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자, 집사자 모초가 논박하였다. "자옥은 문적 출신이 아니므로 수령 직을 맡길 수 없다." 그러자 시중이 제의하였다. "비록 문적 출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찍이 당에 들어가 학생이 되었던 사람이므로 역시 등용할 만하지 않겠는가?"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3. 직조관념을 표출하다.

직조관념이란, 왕권의 전제화를 위하여 조상에 대한 혈연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조관념은 신문왕기에 무열왕, 문무왕에 대한 제사를 화려하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러한 선왕에 대한 제사는 곧 현왕의 정통성과 국가 체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교와 함께 사상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신문왕은 왕실의 권위 향상을 위하여 유교이념을 표방하였는데, 이것에 하나 더 하여 선왕에 대한 제사로 왕실을 통합하였습니다.

이후, 직조관념은 혜공왕대에 5묘제로 정착됩니다. 혜공왕은 점차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약해져감에 따라 직조관념을 대외에 과시하고, 왕실의 혈연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5묘>를 제사지냈습니다. 오묘의 5명의 왕은 <미추왕, 무열왕, 문무왕>의 3왕과 함께 현왕의 <아버지왕, 할아버지왕>을 포함한 5명의 왕을 제사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중국에서 천자국은 7묘를 제사지내고, 제후국은 5묘를 제사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당시 삼국통일 이후 중국과 다시 교류를 시작한 신라가 바로 5묘제를 함으로서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 36대 혜공왕대, 오묘를 시작하였다. 미추왕은 김씨 시조로서 제사하고, 태종대왕,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발한 공덕으로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이것을 영원히 없애지 않는 근본으로 삼는다. 또한 친부와 조부, 2조를 합하여 5묘로 한다.

여기까지 신문왕대의 정치적 상황을 포스팅해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신문왕대의 경제제도를 관료전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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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이번 장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정치 제도에 대하여 간략하게 포스트하겠습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냥 순서대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봅니다.

1. 한의 중앙제도

한나라의 제도는 진의 3공 9경제를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와 같이 3공 9경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 권한은 약간 약화되는 쪽으로 제도정비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3공의 역할
   1. 승상 : 어사대부가 승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역할이 커져서 승상이 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2. 태위 : 군사권을 황제가 장악하려고 하여 태위의 군사권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
   3. 어사대부 : 승상, 태위를 감시하는 기능이 대폭 강화되어 황제권과 좀 더 밀착됩니다.
                       바로 이 어사대부직에 있었던 한무제 때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대상인이 상홍양입니다.

9경은 국가 최고직인 3공 아래에 존재하는 <9시>라는 하부 관직의 장관(경)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3공 하위에 있으면서도 그 중요한 업무는 모두 황제와 직접 논의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황제 수족기구의 역할을 합니다. 특히 광록훈, 위위 등은 황제의 친위 부대로 역할 하고, 종백은 황실 사무를, 소부는 황실재정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황제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2. 한의 지방 제도

한나라의 지방제도는 초기 유방의 <군국제>를 제외하고는 항상 <군현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군현제도라는 것이 진시황제 때처럼 강력한 법가이념에 의한 절대적 통치제도가 아니였습니다. 군현제도를 실시하면서도, 한무제 때 유교 관학화 등 유교적 이념을 도입한 관계로 한의 군현제는 실제 운영상에서는 <봉건제> 성격이 강합니다.

쉽게 말하면, 국가가 군현에 태수를 파견하였지만, 이 태수들이 지방민을 다스릴 때는 <봉건영주>처럼 다스렸다는 것이지요. 특히 후한시대에는 아예 태수나 현령이 봉건제도의 <주군>처럼 행사하면서 하위 관리들을 <가신>취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은 유교이념에 바탕을 두어서 현명한 태수(주군)에게는 존경을 표한다는 덕치주의와 봉건적 충성이 결합된 이념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시기의 지방제도는 운영은 군현제였지만, 그 군현 내에서는 봉건제적 사회였음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3. 자사가 등장하다.

한의 지방제도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한무제 시기에 <자사>라는 감찰관리가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 자사란, 군현의 관리와 지방 제후를 감시하기 위해서 황제가 파견한 <관찰사>입니다. 실제, 한나라의 군현 내에서의 태수는 봉건영주와 같이 지방민을 다스렸으므로 철저한 통제가 필요했고, 한무제는 13주에 자사를 보내는 <13주 자사제>를 실시하여 제후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사라는 기구는 한무제 시기에는 지방 제후를 감시하기 위한 임시 파견관이었지만, 후한 대에는 호족들이 세력이 강해진 관계로 아예 자사를 행정기구로 만들어 지방 군현을 감독하게 하였고, 자사는 곧 지방장관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래 군현제도였던 중국의 지방제도는 후한 대로 갈수록 <주군현>이라는 3층 제도가 됩니다.

한이 망한 후 위진남북조에서는 아예 자사에게 지방 통치의 모든 권한이 넘어갑니다. 위진남북조가 혼란한 시대였던 만큼, 이 때 자사는 지방의 모든 민정, 군정,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들 자사라는 위치를 귀족들이 독식함으로서 이 시기에 귀족사회가 성립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주군현>제도를 다시 수정하여 중앙집권화 하였는데, 이 때는 종래 <군현>제도가 아니라, 주의 감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주현>제도로 바꾸어 <군>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라는 것은 지방 최고 관직을 대표하는 명사가 되었고, 한국사에서도 신라의 <9주> 등 주라는 명칭이 쓰이게 됩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까지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도>에 각각 <관찰사>를 파견합니다. <관찰사>란 지방 행정을 실제로 운영하는 자리가 아니라, 지방 실무직인 수령을 <관찰>하는 자리입니다. 즉, <자사>라는 역할과 같은 개념인 것이지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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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특징과 칭왕현상

1. 전국시대의 시작

전국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춘추 전국시기 이후 출현한 군현제적 중앙국가체제의 등장과 연관됩니다. 14장에서 말했듯, 춘추 전국시대 중기에는 남방과 북방의 치열한 패자 다툼이 있었고, 이 시기에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강력한 통일국가가 필요했습니다. 각 국가들은 주왕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약소국을 멸망시켜 중원의 주인으로서 활약하려 하였고, 이것은 곧 군현제도의 가속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춘추시대 북방의 패자였던 <진>나라의 가신인 한, 위, 조가 하극상으로 각각 독립국을 세운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것은 가신계급인 경, 대부의 성씨집단들이 제후집단에 반란을 일으켠 것을 말하며, 이제 주왕실과 제후라는 봉건질서의 주체들 외에 경, 대부라는 국인층들도 건국 주체로 성장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주왕실을 지킨다는 존왕양이는 사라졌고, 주왕실의 국인으로서 같은 하늘의 백성이라는 의식인 <예>는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강력한 영토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군주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군주는 자신을 보필한 현명한 인재와 강한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즉, 광대한 영역 국가에서 국왕인 인, 민을 직접 지배해야 했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 거대한 관료지배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반맹을 거듭하는 회맹질서는 필요없게 되었고, 국왕은 가부장권을 가진 모든 지배층(인)과 피지배층(민)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지방은 왕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 거대한 군, 현 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즉, 전국시대의 시작을 기점으로 봉건제적인 씨족제는 사라지고, 봉건제적인 혈연관계는 타도된 것입니다.

2, 전국시대의 왕들은 군현제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군현제는 말 그대로, 왕이 지배하는 전국을 군, 현으로 나누어 왕이 파견한 신하에 의해 전국을 직접 지배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 군현제는 현 - 군 - 향의 3층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현이란, 대국이 소급을 병합한 경우, 국가단위의 땅을 행정구역으로 개편한 행정구역입니다. 군은 변방지역이나, 작은 읍을 점령한 경우 설치한 작은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현이 너무 큰 경우 몇 개로 쪼개어 다수의 군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향이란, 현 아래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씨족 공동체적 유제가 남아있는 씨족 마을을 말합니다. 현은 차춤 군에 흡수되어 소멸되어 가지만, <향>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공동체 마을을 지칭하는 말로 쓰입니다.

3. 칭왕 현상의 시작과 관제 개편

전국시대의 왕들은 이제 패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주왕실을 모신다는 개념의 패자, 제후, 국군, 작이라는 칭호를 완전히 버립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는데, 이 시기는 각 국이 씨족적 기반을 버리고, 구귀족을 죽이며, 새로운 사회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변법의 실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제 왕은 누군가에게 존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하늘의 자손으로서 천하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사회에 제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신성화하기 시작합니다.

각 국의 왕은 이제 지방의 군현제 정비와 함께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변법을 시도합니다. 중앙 관제의 개편 목적은 종래 세습귀족과 다른 새로운 관료들이 새로운 관직에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 특징은 보다 전문적인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관직의 세분화였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행정권 - 군사권 - 지방권을 분리시키는 일이었으며, 이 분리된 권한은 각각 왕에게 귀속됨으로서 모든 국가의 총괄책임을 왕에게 부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종래 세습귀족들은 이제 왕에게 반항할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습귀족들의 모든 특권을 왕에게 돌려 왕이 직접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체제를 <제민지배체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민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하여 사회 제도를 씨족적 질서에서 중앙집권질서로 통채로 바꾸는 것을 <변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새로운 제도를 살펴볼까요?

왕권 밑에서 행정을 총괄하고 재상으로서 활약하는 최고 전문직 관리를 <승상>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승상은 백관을 감시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할 뿐 독자적으로 가진 권한은 별로 없습니다. 감찰은 <어사>가, 토지는 <사도>가, 재정은 <소부>라는 부서가 담당했습니다.

또 효율적인 영토확장을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지만, 이러한 군사제도 역시 문, 무 관리들을 분할하여 각각의 임무를 따로 두었습니다. 특히 장군 아래 <위>라는 호위대장을 두었는데, 이 위가 진시황의 통일 후 <태위>가 되어 군사권을 총괄하는 총수개념이 됩니다.

지방 제도도 확실히 분할합니다. 군의 태수는 <군수>, 현의 태수는 <현승>, 향리는 자치적인 토착세력, 지방 군사는 <위>에게 각각 분담하는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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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은, 주, 춘추전국시대의 지역 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 배경

1. 은나라의 영역 구조

은나라 시대의 씨족 공동체적인 원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 구조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3층적인 구조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국사나 중국사에서 고대를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중층적 구조>나 <부체제>가 바로 은, 주 시대의 기본 구조입니다.

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토지 구성을 보면, 국왕은 자신의 본거지만 직할지로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나머지 땅들은 각 부족장들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서양으로 보면 그리스의 <폴리스>같은 도시국가 구조이고, 한국사로 보면 각 부족들이 모여 합의하는 <연맹왕국> 성격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은의 중층적이고 3층적인 구조를 보면 대읍(은왕 직할지) - 족읍(방백, 각 부족의 땅) - 소읍(종족단위의 마을)로 구성된 3층 구조입니다.

2. 서주 시대 초기 봉건제도에서의 지역 구조

이러한 구조는 서주시대에 <봉건제>성립과 함께 약간 바뀝니다. 봉건제도를 실시한 목적 중의 하나가 은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족읍을 주왕조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왕조는 멸망했지만, 실제 은 왕조의 세력은 은 왕조와 연합하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세력들(족읍의 군장)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는 소국의 군장들(족읍의 독자적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혈연적인 관계를 매개로 하여 토지를 분봉하는 형식으로 그 독자적 지배를 인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주나라 초기의 새로운 족읍 체제를 한번 볼까요?

은대부터 내려오는 읍은 새 제후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우 옛 거주자는 새로운 봉건제후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독자적인 옛 은의 영역에 주 왕실의 혈연성을 가진 제후를 파견하여 그 영역을 은이 아닌, 주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 왕실이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제후가 그 영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중국 사회는 중앙집권화 할 만큼 민족적 동질성이나 고유 문화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화>라는 개념이 있긴 하나 이것은 외부 적을 상대할 때 이야기이고, 각 부족은 아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중화>라는 중국중심의 공통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넘어가야 완전히 확립됩니다.

주가 새롭게 개척하여 영역을 넓힌 새로운 족읍은 국가가 지정한 주왕실의 혈연 제후에게 분봉되어 그가 옛 은나라의 씨족 사회 지배자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주 교체로 인한 사회혼란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은의 옛 부족국가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의 지배층은 인, 피지배층(정복민)은 민으로 구별함으로서 국의 구성원간에 계층적인 구별을 합니다. 지배층은 파견된 제후를 중심으로 민(정복민)과 전(토지)를 지배하며, 민은 직접생산자로서 국인의 소유물로 간주됩니다. 민(民)은 이 당시에는 정복된 노예라는 개념이 강한 단어이나, 훗날에는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즉, 이 당시의 민은 인(人,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사람 대우를 받는 지배층 밑에서 존재하는 노예같은 민(民, 피지배층)이므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하는 학설이 다수설입니다.

3. 서주 시대 중기 - 춘추시대의 지역 변화

춘추 시대에는 대읍-족읍-소읍이라는 3층적 구조와 인, 민 이라는 지배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은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국, 도, 비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춘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의 약화와 각 봉건제후들의 독자성 강화입니다. 봉건제후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문만 가졌을 뿐, 실제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방어 태세를 위한 새로운 지역 개념을 제시합니다.

주왕실은 왕기(대읍)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제후들은 각각 족읍을 국(國) 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또 제후들은 자신이 가진 국의 일부를 가신인 경, 대부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도(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비(卑)라고 합니다. 국, 도에는 각각 지배층인 인과 피지배층인 민이 삽니다. 즉, 은, 주 시대와 같은 중층적 구조이나, 달라진 점은 제후들이 성장하여 족읍을 국으로 바꾼 것이지요.

당시 왕과 제후는 동족의 대표자 성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제후의 독립지역은 국을 넘보기 어려웠고,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지배층인 인들에게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사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회의 체제나 연맹왕국 수준의 체제와 비슷합니다. 즉, 왕이 국의 민을 지배할 수 없고, 제후는 도의 민을 지배할 수 없는 각각의 독자적인 구조이지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계루부 왕이 소노부의 종묘사직을 인정한 것처럼, 춘추시대에도 각각의 분봉자들의 영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에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방>이라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읍에 속하지도 않고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이민족의 땅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의 국가들과 상당히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중원의 국들은 이러한 방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의 땅인 국과 구분하기 위해 <방>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대한 문명의 한 가운데라는 뜻으로 <중화>라고 부르고, 이민족들은 <변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국, 도, 비의 변화

춘추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제후의 영토 확대로 국, 도, 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원래 주왕실이 분봉한 땅을 의미한던 국(國)은 이제 제후가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집안이라는 뜻의 국가(國家)로 바뀝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국, 국가라는 영토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된 것입니다.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눠준 땅인 도(都)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하여 경, 대부의 독자적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도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으뜸머리의 도라는 뜻의 수도(首都)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가의 수도(서울)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卑)는 비루한 백성들이 사는 피지배계급의 땅이라는 뜻에서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각각 국가, 수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용어로 변환되는 것이며, 이렇게 국가, 수도, 변경을 갖춘 통일국가가 바로 <중화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진은 너무 단명한 까닭에 다음 한나라 시기에 이러한 중화제국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유교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 한나라가 바로 <중화>를 대표하는 민족국가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중국말은 <한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한나라가 과거 모든 사상적 체계를 차분히 완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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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지배층 - 가, 호민, 하호, 간

1. 가란 무엇인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을 논할 때 우선 알아야 할 단어는 <가>입니다. 가란, 북방 유목민 사회에서 전파되어 온 개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는 지배자(족장)를 가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가한이란 큰 추장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흉노에서는 지배자를 <선우>라고 부르는데, 이 선우도 그 원 뜻은 <가한>이라고 한답니다. 중국에서 유목왕조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당나라도 이 <가한>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지배자라고 자처하기도 했답니다.

이 <가>라는 말은 남방에 내려와서 삼한 사회에서 <간, 한>이라는 용어와 같이 쓰였습니다.

우선 가가 들어간 말들은 고추가, 대가, 소가, 제가 등 북방계통의 국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부여에서 많이 나오는 용오들이죠. 신라에서는 마립간, 이사금, 거서간 등의 파생어가 있는데, 여기서의 간 역시 <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용어는 공통적으로 추장, 족장, 군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국의 군장을 뜻하는 용어로서의 <가>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연맹왕국 단계의 초기 철기 시대가 주류를 이루는 듯 싶습니다. 제가 역시 이 <가>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작은 영역의 지배자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 싶네요.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를 넘어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가> 계급은 중앙세력에 편입되어 관등제도 속으로 포함됩니다. 예로, 고구려의 초기 나(노)집단은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연노, 절노, 순노, 관노 등의 <가>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루부 중심의 부로 통합되었고, 씨족적 부는 고국천왕대에 행정적 부로 재편됩니다. 그리고, 가들은 중앙관위 속에 편제되어 고추가 - 대가 - 소가라는 3중적인 서열로 재편됩니다. 즉, 가들은 읍락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왕권에 신속한 신하가 되는 것이지요. 이들은 왕권 밑에서 읍락과 하호를 통제하는 행정관 성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부체제적인 <중층적인 이중 구조>의 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바뀜을 말합니다.

2. 호민이란 무엇인가?

호민은 원래 가에 속한 가층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정복사업이 많아졌으며, 철기시대가 진전되면서 이 호민층은 가층에서 갈라져 나온 중간 계급의 성격을 갖습니다. 원래 호민은 소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예로 옥저, 동예, 삼한 등에서는 뚜렷한 지배자가 없이 다수의 읍군, 삼로, 장수, 후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더 큰 대국에 점령당하면서 대국에 편입된 호민층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호민은 초기부터 자신의 지배영역을 가지고 있던 소국 족장으로서, 대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읍락의 점유권 등을 바탕으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 지배층이라고 보시면 무난할 듯 싶습니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호족>세력과도 비교가 되네요.

3. 경, 대부는 무엇일까?

경과 대부는 중국 서주시대사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필요하신 분들은 검색해보세요. 서주시대로..) 대부은 원래 제후 밑에서 봉토를 부여받고 군사와 공납을 담당하던 <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경은 제후 옆에서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실권자인 대부를 말합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자조선 시대에 경, 대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경은 한 지역의 국사를 맡던 관직으로 <조선상 역계경> 등에서 보여지듯이 독자성을 가진 이름입니다. 대부란, 일정 가문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층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이들 경, 대부들은 각각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위 지배집단이 동요할 때에는 스스로 <가, 간>을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는 했습니다. 삼한 70여개국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도 없고, 그 영역도 잡거 형태이며, 생몰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경, 대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고, 영역를 인정하여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 신속하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한다던가 지역통치에도 관여했을 것입니다. <조선상 역계경>을 예로 보면, <상>은 국가에 신속한 관리를, <경>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두가지가 동시에 명칭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네요. 이러한 경, 대부라는 직책은 위만 조선에서 보입니다.

4. 제가란 무엇일까?

제가란 용어는 부여에서 나옵니다. 제가란, 한자로 보아 <가>들을 두루 다스리는 큰 가란 뜻일 겁니다. 제가는 왕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큰 족장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읍락에서 수백, 수천가를 다스리며, 좌식자(앉아서 먹고 노는 계급)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호를 착취하여 막대한 조세를 걷었죠.

부여는 <제가평의>를 통해 행정에 참여하였는데, 이미 1책 12법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제가평의는 법의 제한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들은 그들의 특권이 존재하는 만큼 어느 정도 법의 제한에서는 벗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가는 하호를 지배하는 실제적인 영역의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대로 관료를 임명하고, 임명한 관료의 명단만을 왕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예로, 고구려의 대가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을 스스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여의 제가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들은 독자적인 군사력도 막강하여 왕위계승분쟁이 있을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전쟁시에는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만큼의 자제적 군사력과 전술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부여나 초기 고구려 등의 5부족 연맹왕국은 2중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국왕이 제가를 통솔하나, 제가 역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관료조직을 가지고 읍락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부체제에서 말하는 <중층적 구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하호는 무엇을 하였나?

하호에 관련된 유명한 사료는 <제가에게 고기, 소금>을 날라다 준다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혹한 수취로 하호들을 다루었으며, 하호가 노예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부여의 순장, 인두세 등은 노예제 사회임을 강력하게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실제 하호가 노예인가, 농노인가, 씨족사회 일원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학자들간에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6. 지배체제에 대해 정리해보자.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지배계급은 가, 한, 간 등의 족장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본래 독자적인 소국의 왕을 칭하던 가, 한, 간 등은 소국이 대국에 굴복함으로서 대국에 귀속된 계층으로 전환됩니다. 고구려의 가(고추가, 대가, 소가), 백제의 한(가한), 신라의 간(거서간, 마립간 등)의 질서를 볼까요?

고구려는 보통 형제적인 질서를 보입니다. 태대형, 대형 등 <형>의 계열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초기 고구려 지배층은 소국과의 관계가 같은 예맥족에서 출발함을 암시하는 듯 싶습니다. 대형은 큰 세력, 소형은 작은 세력을 말하는 듯 합니다.

신라는 지방 간층의 지배세력을 신지, 험측, 범예, 살해, 읍차라 부르며 등급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앙지배세력으로 포섭된 이후에도 이간, 파진간 등 <간>의 칭호를 달리하여 세력을 등급화하였습니다. 초기에는 12등급, 법흥왕 이후에는 17등급으로 정비하면서 이것이 곧 골품제와 연결되는 <간군관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관등이란 것은 원래 국가 업무에 참여하는 자들을 <등>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지배층의 높낮이를 구별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국왕 밑에 신속한 관리는 <대등>, 그들의 우두머리는 <상대등>, 간층 귀족들이 차지하는 관등은 <간군관등> 등으로 쓰이죠.

7. 이 지배체제는 <부체제>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국가들의 특징은 각 소국의 지배자(가, 간, 한)들에게 영역을 인정해주고, 백성 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국의 지배자인 족장, 군장들은 각각 자국의 지배층들과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것을 <귀족 회의>라고 합니다. 국가 중대사는 거의 이 회의체가 결정하였습니다. 국왕도 이 회의의 결정을 때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왕권이 전제화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등은 이런 역할을 수행한 면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의 지배층은 왕의 도읍에 거주지를 마련한 후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고구려의 5부, 백제의 5부, 신라의 6부 등은 이런 정치집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 중에 가장 강력한 집단이 왕이 되었고, 그 다음은 왕비족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계루부 정권에서 절노부가 왕비족으로 군림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집단도 일정 세력을 가진 자치권이 있었습니다. 예로, 고구려 소노부는 계루부에게 정권을 넘겨준 부였지만, 자체 종묘사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 밑에서 각 부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의 구조를 <부체제>라고 합니다. 부체제에서의 부들은 상호 후원자적 성격으로서 각 부는 자신의 이익을 지킴과 동시에 외적에 대해서는 공동방어를 추구했습니다.

모든 부는 왕 이하 평등관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 신라 진흥왕기 이전의 삼국을 보면, 왕이 하교를 내릴 때, 왕도 왕의 명칭 앞에 소속부를 붙었으며, 그 하교가 왕과 여러 부의 공동하교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은 군사권, 인사권, 재정권, 세습권을 가지고 있지만, 각 부는 자치권, 제사권, 방아권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유지함을 알 수 있네요.

그리고 각 부에서는 귀족 대표를 스스로 뽑습니다. 고구려는 삼세일역이라고 하여, 삼년에 한번 신하들 가운데 실력자를 대대로로 선임하였으며, 백제는 서너명의 재상 후보들이 다투면 왕이 마지막에 선택하였고, 신라의 상대등은 6부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선발했다고 합니다. 부체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부체제>라는 파트를 만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무지 길거든요.

8. 부체제는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부체제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각 부의 독자적 영역과 세력이 약해집니다. 부는 행정구역으로 변하게 되고, 각 부의 <간>층은 관등에 속한 관료계급으로 전환됩니다. 이 때, 부가 국가의 행정구역으로 변하면서 <간>층은 유력한 혈연 귀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혈연을 뜻하는 단어인 <골>입니다. 특히, 내물왕 이후 골들은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진정한 골(진골)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 후계자가 될 진골들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혈통이락 하여 성스런 골(성골)로 규정하기도 하죠. 이 부분은 다음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를 보면, 신라 초기에는 공동하교를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수리비에서 지증왕(지도로갈문왕)은 아직까지도 여러 부의 왕들과 함께 교를 내리고 있습니다. 울진봉평비에서 법흥왕은 노인법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간>층이 임의로 지배했던 피지배층(노인)을 국가체제로 흡수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 왕은 아직도 <부>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각 지방에서는 <부>를 다스리는 <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를 확실하게 누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영토확장을 과감하게 실시한 왕이 바로 <진흥왕>입니다. 진흥왕의 단양적성비에는 모든 부를 제외하고 왕 혼자서 명령을 내리는 <단독하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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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주시대 봉건제도에 대한 분석

1. 봉건제에 대한 이론들

봉건제도는 전통적으로 중국 서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중국사회가 유가주의를 사상적으로 채택하면서 유교의 유덕자 주공에 의해 봉건제의 기틀이 마련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렇게 유가적 봉건론을 주장하면서 주공을 신성시 하는 학파를 신고파라고 합니다.

주공은 <혈연>을 중심으로 새 정복지에 대하여 왕실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을 든든히 다지기 위해 일족과 공신에게 땅을 분봉하였는데, 이것을 봉건제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공은 봉건제도, 지방통제제도, 어진 재상의 모범, 강태공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봉건제도에 대한 유가적인 입장을 부인하는 연구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봉건제는 주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은나라 시대에 이미 실시하고 있던 것을 주나라에서 확대 실시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봉건제를 주나라에서 계승하여 확대 실시한 목적은 은주교체기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정복지에 왕실의 일족과 믿을 수 있는 공신을 제후로 봉함으로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함과 동시에, 공신에 대한 포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종래 은왕조에 종속되었던 유력한 읍의 지배자를 서주의 지배체제로 복속시키기 위한 사회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유가적인 봉건제 해석은 실제 봉건제가 주대 이상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후대 진시황의 법가적 통일에 대한 반발로서 부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의 법가주의적 통치와 분서갱유같은 유교탄압이 진왕조의 단명이라고 생각한 유교주의자들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봉건제도를 상당히 미화한 것입니다.

2. 봉건제도의 구성

봉건제도는 일단 토지를 여러 단계로 분봉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왕은 왕토사상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직할지인 왕기만을 소유하고 나머지 토지는 제후에게 분봉합니다. 제후에게 분봉한 땅을 <국>이라고 합니다. 제후는 자신의 국(국가)를 가지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주하면서 가신집단인 경, 대부에게 토지를 사여합니다. 경, 대부에게 분봉한 땅을 <공읍, 채읍>이라고 하며, 그 중심지를 <도>라고 부릅니다.

즉,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왕기 - 왕의 직할지, 원칙적으로  왕토사상에 의하여 모든 땅은 국왕의 소유라고 관념적으로 규정한다.
   국 - 주왕실이 분봉한 읍, 제후는 이곳을 성곽으로 둘러싸고 자신의 영역으로 확정한다.
   도 - 제후가 경, 대부에게 분봉한 읍(공읍, 채읍), 경, 대부는 국의 중심지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한다.
   봉토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려준 토지의 명칭, 이 토지(채읍)를 받은 대가로 군사적 봉사와 공납이 따른다
   구조 - 왕기에서 각 읍에 이르는 분봉 과정은 피라미드형 구조이다.
            ; 도의 경, 대부가 갖는 봉건적 의무 역시 제후가 주왕실에 해야 하는 의무와 같다.

3. 봉건제도의 원리

봉건제도의 원리를 한 문장으로 규정하자면 천명사상, 왕토사상, 종법제도, 혈연중심 통치제도 속에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매개로 맺어진 사회, 정치 질서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봉건제도는 국왕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천명사상과 모든 땅은 국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속에서 혈연적 유대관념과 씨족적 질서, 종법제도, 세습제도 등으로 천명사상을 든든히 받쳐줍니다.

특히, 종법제도는 천명사상, 왕토사상에 근거한 혈연중심 통치제도입니다. 종법이란 부계씨족제, 장자상속제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본가와 분가의 종적 신분질서를 철저히 규명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곧 동양 가족 질서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종법에서의 종주는 주왕실입니다. 주왕실은 종국, 종읍, 종묘, 종족 등의 관념을 형성하고 이것을 종법 속에서 신격화합니다. 천자는 하늘의 자식으로서 왕토사상에 입각하여 왕기를 다스리고, 제후, 방백들에게 <국>을 하사하여 혈연관계를 과시합니다. 제후와 방백은 경, 대부, 사 등에게 혈연관계에 입각하여 <도>를 하사함으로서 <혈연적 봉건 신분제>를 유지합니다.

서양의 봉건제도가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일본막부의 봉건제도가 의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갖는다면, 중국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왕도주의는 이념상 유가적 이상주의이지만, 이 제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공, 순수, 감국 제도 등을 활용하여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방분권주의의 병폐를 막기위한 제도적 방편이었지요. 물론 이것은 실패하여 진나라 시기 법가적 중앙집권주의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봉건제도의 원리를 요약하자면, 봉토를 매개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혈연성을 과시하는 혈연적 종법질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봉건제도의 원리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 종가에 대한 분가의 종법적 충성심이 점점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국가 운영체제를 구축한 전한, 서진은 종친, 왕자의 난 등 혈연관계의 지배집단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국가 기반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봉건제가 갖는 가장 큰 모순중 하나입니다.

4. 서주의 지방제후 통제

서주에서는 봉건제도의 원리 하에서 효율적인 지방 통제를 하기 위한 여러 방편을 마련했습니다.

제도적인 통제책으로는 종법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혈연의식강화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사상적인 통제책으로는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국토의 왕토사상으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제도에 의한 통제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볼까요?

일단 서주는 주공시대에 채숙의 난을 진압하고, 양경체제를 구축합니다. 양경체제란 종주, 성주로 주요 거점을 나눠 국가를 통치하는 방책을 말합니다.

종주란, 주의 본거지인 호경으로 왕기(직할지)를 말합니다. 성주란, 낙양을 말하는 것으로 은의 옛 땅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곳입니다. 종주와 성주는 각각 종주 6사(서방 6사), 성주 8사(동방 8사)로 구성된 천자 직속군단이 있어 태사가 이를 통솔합니다.

종주6사는 왕실군으로서 국인으로 편성됩니다. 역할은 서방방어 및 호경 방어입니다.
   성주8사는 은의 유민으로 편제하여 낙양을 방어하면서, 지방제후의 반란 진압, 동남이 정벌의 주력부대로 활용됩니다.

다음으로 지방제후의 일족을 중앙에 머물게 하고 관직을 임용해줌으로서 효율적으로 지방을 통제합니다. 또, 지방에 감시관을 배치하는 <감국제도>, 천자와 제후가 상견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로 물품을 바치는 <조공제도>, 천자의 권위를 지방으로 확대하고 제후의 정치를 천자가 나서서 직접 살피는 <순수제도>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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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 계급구조와 계급 용어를 파악하자.

1. 서주의 계급구조

중국 서주 시대의 계급을 보면, 그 특징이 종법과 혈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도라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세습되는 혈연적 관계의 신분에 의해 사회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것이죠. 지금부터 설명하는 이 용어들은 모두 고대 주나라에서 성립된 용어들로, 동아시아의 많은 왕조들이 이 용어를 실제로 사용하였던 개념들입니다. 알아두시면 동아시아 역사이해하기 좋아요.

먼저, 가장 높은 계급을 말하라고 하면 당연 <주왕실>입니다. 주왕실은 국토와 인민은 모두 주왕실의 소유여야 한다는 <왕토사상>의 이념을 가지고 영토를 지배합니다. 그러나 모든 영토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은 이념적인 이상을 말한 것이고, 실제로는 왕의 직할지를 제외하고는 제후에게 영지를 분배하는 <봉건제도>를 통해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다음 계급을 말하라고 하면 <제후>계급입니다. 제후는 주왕실로부터 땅(읍)을 분봉받은 친족을 말하는데, 이렇게 주왕실로부터 받은 땅을 <국國>이라고 합니다. 제후는 땅을 받은 대가로 천자를 받들고 천자를 위해 조공과 군사적 의무를 이행합니다. 그러나 이들 <제후>계급은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왕실과 혈연관계가 약해지면서, 훗날에는 주왕실을 형식적으로는 받들게 됩니다.

제후는 자신이 받은 <국>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경, 대부에게 일부 나눠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국의 중심지에 도성을 설치하고, 지방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제후의 영토는 독립적인 성격이 강해서 독자적인 관료,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국國의> 중심지에 설치한 도성을 훗날에는 <도都邑 : 수도>라고 부르게 됩니다.

제후 아래에는 사족(국인)이라고 불린 대부와 경이 있었습니다.

대부는 제후국 안에 작은 영토로서 (국>을 부여받은 자를 말합니다. 대부의 가족은 氏로 구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다른 계급에 비해 높다며 우월감을 과시하는데, 이러한 대부 가문을 <씨실>이라고 부릅니다. 즉, 왕의 가문은 <왕실>, 제후 가문은 <공실>, 대부 가문은 <씨실>이라고 칭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씨실제도는 명목상으로는 제후의 신하이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독립국이다라는 것을 내포하는 개념입니다. 또, 공실개념 역시 왕실에 속해있으나, 그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과시하는 개념으로 쓰이죠. 그러나, 정반대로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공실, 씨실은 왕실에 속한 혈연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대부들은 서주가 약해진 이후, 실제 독립국가의 개념으로 역사에 대두하여 <국>의 대권을 좌우하고, 군주를 폐립하는 데 까지 이릅니다. 이 시기가 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국>에서 왕을 자처하는 사회가 된 것이니까요.

<경>은 사실 대부출신입니다. 경이란 대부의 자격을 가지고, 제후를 실제로 보조하면서 제후 국가의 정책을 도와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대부 중에서 똑똑하고 유력한 사람을 <경>이라고 하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경>이라고 하면 <대부>보다는 높은 계층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부와 경 아래에는 가장 말단 지배층인 <사士>계층이 있습니다. 사는 하위 지배층으로 보통은 전투에 주력하는 전사계급입니다. 이들은 무사계급으로서 전투에 필요한 6예(활쏘기, 말하기, 예절, 음악, 그림, 수학)을 습득하였는데, 그들이 배우는 과정은 무사로서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가장 필수적인 교양과목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교양인으로 성장하게 되고, 그들이 습득한 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대부>계급을 <사대부>라고 칭하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다음으로 평민 계급을 볼까요?

평민층은 상인이나 공인보다 농민이 많습니다. 농민들은 귀족의 사유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인 <경작권>만 세습이 되었을 뿐, 토지의 주인이 아닌 관계로 토지매매나 양도는 불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주시대의 노예계급은 대부분이 전쟁 포로들입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이 전쟁 노예가 많다는 점이지요. 물론 범죄자나, 빚을 갚지 못한 평민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가 가능했습니다. 이 노예의 존재는 서주를 어떤 사회로 볼 것인가라는 시대구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노예가 만약 노동노예, 가내노예, 국유노예, 종족의 노예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면 일단 서주시대가 노예제 사회라고 볼 수 있겠죠. 이것은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고대 노예제 사회가 됩니다.

그러나 노예라는 존재가 주인의 땅에서 소작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 학자들은 서주 시대는 봉건제도와 정전제가 존재하는 봉건제 사회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실제, 서주에서는 봉건제도가 실시되었고, 봉건제 밑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노예가 아닌 농노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죠. 암튼,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보기 위해 다음 장에서는 서주시대의 특이한 제도인 <정전제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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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가

모든 대가들 또한 자체적으로 사자·조의·선인을 두는데,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한다. 이들은 마치 중국의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존재로서 회합할 때의 좌석 차례에서는 왕가(王家)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열에 앉을 수가 없다. 그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고기·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머리에 책(瓔) 같은 것을 쓰는데, [중국의] 책(瓔)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가 부세(賦稅)를 대는데 마치 노객(奴客)과 같다.

- 태평어감 동이, 고구려 -


자료 참조 : 고구려는 대가들 자체가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두었다는점에서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왕이 있으나, 초기 각 부족장들의 정통적인 촌락 구조가 유지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7차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중앙에는 왕이 있어 국방, 외교 등을 담당하지만 촌락내부에는 스스로 관리를 두고 제사와 풍습을 유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초기 연망왕국의 구조를 <부체제>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것은 중앙집권국가가 되기 전 연맹왕국 단계에서의 국가 모습을 말합니다.

좌식자가 만여호이며, 하호가 식량을 공급한다는 점에서 이 당시를 고대 사회로 보는 관점이 최근 대두하였습니다. 제천행사라는 고도의 종교양식과 당시의 잉여생산력, 또 범죄자에 대한 처벌 및 법의 존재 등이 고대 사회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교과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대로 규정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연맹왕국단계까지 고대로 보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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