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보는 한국사 (2)

우리 고대 역사에서도 화폐가 존재했을까?

1.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을까?

이제, 우리 역사에서 사용한 화폐들을 한번 짚어볼께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돈>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문헌은,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고조선의 8개조 법>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연 고조선 시대에 화폐를 사용했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과서에서는, 고조선 시대의 화폐 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부족하고, 화폐를 만드는 틀(거푸집)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폐를 주조해서 사용했건,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던지 간에, 고조선의 <8조법>에는 <50만전>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기 때문에, 일단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철전인 <자모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한 해석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자, 모>란, 글자체계에서 말하는 자음과 모음을 말할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위계질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만든 우리 화폐와 우리 글자체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반면, <자모>라는 것이 일반적인 한자의 번역이라면, 명도전같은 중국 돈은 청동식 자모전, 철기시대의 돈은 철기식 자모전 등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혹은, 자전, 모전과 같은 소액 화폐들과, 기타 돈들을 묶어서 자모전이라고 불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뭐, 기록이 없으니 가설이 몇백개가 있어도 증명은 안되겠죠. 결국 결론없이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명도전>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명도전은 일반적으로 중국 돈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고조선, 고구려의 영역이 많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화폐로 봐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제도전이나, 조도전 등은 제나라, 조나라 등 국가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연나라는 연도전과 달리, 명도전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것이죠.

최근, 명도전의 가치를 다시 조명한다거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강역을 다시 생각해보는 연구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최근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집권당인 한나라당에서, 역사왜곡에 대항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동북아 역사재단에 대한 지원 비용을 20% 삭감하고,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에서 빠이빠이~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뭐,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의 인식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게 더 큰 문제죠.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비용을 4대강 사업에 투자하고,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어서 우린, 아니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참 행복하답니다. ㅋ

반면, <도전>은 다른 화폐와 달리,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해서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칼) 모양으로 만든 화폐이기 때문에, 중국 화폐가 확실하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아직 알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여줄 자료가 너무 없네요. 우리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화폐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 보여드린 자료에 몇 가지를 더해 보여 드립니다.

이 중국 화폐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에서도 충분히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화폐들입니다. 고조선은, 위만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남방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역을 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겠죠.

다음은, 당시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에서 사용했던 화폐를 만드는 틀입니다. 이런 틀이 팍팍 나와준다면, 고조선에서도 화폐를 주조했다는 증거가 되겠죠? 실제, 내몽골 자치구 지방에서 이런 화폐 주조 틀들이 나오긴 하지만, 고조선에서 화폐를 주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는 않는답니다. 아마, 고조선도 화폐 주조를 했겠지만,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정도의 가설 수준이죠.

2.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에도 화폐를 사용했을까?

삼국시대에, 국가가 공식으로 주조한 뒤 유통시킨 화폐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곡물이나 직물이 <유사한 화폐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또, <변한>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된다는 역사 기록이나, 금, 은, 옥과 같은 것들을 보물로 여겼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광물들이 화폐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삼한 시대에, 무덤 밑에서 일정한 규격을 갖춘 철조각(철정 : 鐵鋌)이 발견되는데, 철이 많은 지역에서는 철을 가지고, 무기, 농기구, 화폐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연구를 하던 중, 발해의 화폐가 발굴되었고, 진품인지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폐가 진품이라는 증거를 밝히는 작업이 쉽지 않을 뿐더러, 진품이 아니라는 증거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발해에 대한 역사서는 물론, 유물이나 유적조차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은 발해이기에, 왕계표를 만드는 작업조차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제, 백날 이야기 해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고대 화폐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접고, 다음 장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실제 사용된 화폐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화폐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히스토리아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상)

  만약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단의 보기(v) - 인코딩(D)로 들어가서 자동선택 - 한국어(또는 유니코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This interactive crossword puzzle requires JavaScript and a reasonably recent web browser, such as Internet Explorer 5.5 or later, Netscape 7, Mozilla, Firefox, or Safari. If you have disabled web page scripting, please re-enable it and refresh the page. If this web page is saved to your computer, you may need to click the yellow Information Bar at the top of the page to allow the puzzle to load.

 

정답지 확인하기 클릭!!!

 

 

좌우 크로스

  1.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2. 1884년 프랑스의 에펠이 시공을 착수하여 만든 상으로, 1885년 미국으로 옮겨졌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양국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세웠다.
  3. 16세기 프랑스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을 표현한 영화. 주인공은 샤를르 9세의 동생으로 구교도였지만, 프랑스의 정략결혼 희생양이 된다. 이자벨 아자니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4.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 (건륭 46년)에 편찬 및 완성된 중국 최대의 총서이다. 전 3,503부 79,337권에 달한다..
  5. 1880년. 중국의 황줸믱의 저서를 국내에 번역한 책. 조선의 개화 방법의 지침을 적은 책으로, 이후 조선 사회의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였다.
  6. 은 조선 후기에 명나라에서 들어온 한국의 놀이이다. *패라고 불리기도 했다
  7. 중국 당나라 현장의 구법여행을 명나라 때 다시 재구성한 소설. 오승은의 저작이다.

상하 크로스

  1. 통일신라 원성왕의 이름이다. 혜공왕대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사살했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선덕왕 사후 김주원을 대신하여 신라 하대의 원성왕계를 시작하였다.
  2. 고대 이집트에서 만든 죽은 자의 책.
  3. 조선시대, 말을 치료하는 의원.
  4. 중국 남송 말에서 원나라 초에 걸쳐 활약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등 정사(正史) 17종에, 송대(宋代)의 사료를 더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5.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모든 저술을 정리한 문집이다. 흠흠신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외 154권 76책으로 정리하였다.
  6. 옛날 결혼한 남자들의 머리 모양.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한다. 이는 머리카락을 올려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감아 삐죽하게 맨 것이다
  7. 단군이 개창한 최초의 국가.
  8. 고려시대 수조권에 기반하여 토지를 분급한 토지제도.
  9. 고려, 조선 시대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각 포구에 만든 창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낙서 한국사1

고조선 이야기 - 환단고기와 가림토(1)

1. 한국사....

그동안 다루었던 한국사의 여러 이야기들을 재편집해서 순서대로 기술해볼까 합니다. 낙서처럼 끄적대며 적었던 글들이 많네요. 보통 한국사 하면 구석기 시대부터 쭈욱~ 읽었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면서 석기시대는 좀더 뒤로 미루고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논쟁>거리가 등장하네요.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는 너무 논란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고조선이 <기록이 없었던 선사시대와, 기록이 전해져오는 역사시대>의 기로에 서 있었던 국가이기 때문이지요. 얼마 안되는 기록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고조선에 대한 모든 기록을 하나 하나 다 파헤쳐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한국사의 시작점에서 환단고기나 가림토 문자 등을 다룬다고 하면, 속이 거북하실 분들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역사 사이트가 아니라 신화 사이트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야?

네... 실제 일어난 일들과 그럴듯하기 꾸민 것들을 구분하느라 머리가 아프시겠죠. 하지만, 가진 기록이 너무 없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을 살피고, 각자가 역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빠른 역사 이해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오늘은 환단고기부터 다루고, 다음 장부터는 고조선과 관련된 다른 책들과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글들, 실증주의 사학자들의 이야기와 교과서까지 쭈욱~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환단고기를 가지고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보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와 영상을 참조하세요.

http://hanpride.kr/ (한민족의 역사)

책 썸네일

시중에 나온 환단고기 - 계연수 저

2. 환단고기 - 완벽한 위서일까? 참고가 가능한 고서일까?

1979년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환단고기>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1985년 일반인을 위한 한글 번역본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책에서는 고조선 이전에 광할한 영토를 가진 우리 민족의 위대한 국가가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하나 하나 적혀 있습니다.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인 것 처럼 광고가 나오기도 했었죠.

그런데, 왜 그런 역사책이 최근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환단고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됩니다. 나라를 빼앗긴 독립군들은 간도, 민주 등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독립활동을 시작하게 되죠. 독립군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계연수에게 자금을 주어 민족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1911년 계연수가 기존에 있었던 역사서들을 모아서 <환단고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묶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한 뒤 계연수는 이유립에게 한단고기의 원본을 건네주었는데, 1975년 이유립이 모든 관련자료를 분실했다고 합니다. 1979년 나온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한 책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끊임없이 위서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책이고,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책입니다. 그 이유를 볼까요?

먼저, 이 책을 만든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해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1911년에 만든 책이라면, 출판도 되었어야 했고, 누군가가 이 책으로 독립군의 학교에서 수업도 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원본을 분실했는데, 그 방대한 내용을 모두 기억해서 복원했다는 점도 그렇고, 복원한 책에는 후대의 용어, 후대의 학설 등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또, 방대한 고대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면 아시아 어디선가 그 유물, 유적 등이 발견되고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도 못합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북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로 이르기 위해서는 원시사회 - 중세- 근대 자본주의 - 공산주의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런 세계사의 발전 규칙도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먼 옛날, 치우 황제가 강력한 철기 무기로 전쟁을 이겼다는 것을 북한도 인정할 수 없는 거죠. 북한은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고,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평양도읍설>을 주장히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남녀평등, 세계만방 등 현대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고려, 몽고 등 당시대와는 맞지 않는 언어가 나오며, 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시대에 철기가 나오는 등 도무지 근거가 없다는 것이죠.

더 이상한 점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민족주의가 <식민지의 민족>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와는 동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침략당한 민족들은 보통 침략자의 오만함을 비난하고, 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아시아 전체가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이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나치의 확장전쟁이나 일본의 대동아경영설을 반박할 수 없는 이상한 민족주의 사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대의 최남선 문인이 <아시아는 한민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관을 주장했다가 친일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반대로 이 책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어느 정도 내용을 첨가했을 수는 있지만, 완벽한 위작을 가지고 국민들을 속이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만약,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책이라면 아주 허황된 내용보다는 보다 믿을 수 있는 <적당한 사기>를 쳤을 것입니다. 또, 일본의 <대동아경영>과 비슷한 이론으로 역사서를 적을 이유도 없었겠지요. 결국,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려고 편찬한 <도가 계열의 작품>인데,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골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결정적으로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 역사의 참고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그런 역사적 일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고 대단한 것인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환단고기가 주장한 핵심적인 내용 몇가지를 가지고, 고조선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들어가 볼까요?

http://historia.tistory.com/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는 예수의 가르침과 고대 법

1. 고대 법의 대표적 사례 - 모세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유명한 말은 성인인 예수의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경이나 예수에 대한 일화는 사이트 내에서 가급적 언급을 피해왔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폭탄맞을까봐서요... 하지만, 성경의 내용도 역사적으로 보면 재미있게 접근할 내용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오늘은 고대법으로 한번 접근해볼께요.

고대법은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모든 법이 보복주의, 복수주의, 중형주의, 농경주의적인 법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고조선의 8조법.... 사람을 죽은 자는 죽이고, 다치게 한자는 곡물로서 갚아라 등이 있죠.

함무라비 법전.... 목수가 지은 집이 부서져 사람이 죽으면 목수를 죽이고, 아들이 죽었으면 목수의 아들을 죽인다. 등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법의 내용이죠. 그런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실제 한 사람이 구약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만약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때는 그 생명으로서 갚게 하고,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눈으로써 갚게 하고, 이를 다치게 했을 경우에는 이로써 갚는다> 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 역시 법은 보복과 복수, 중한 엄벌(중형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고대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복주의적인 법들의 특징은 그 법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통용된다는 <선민의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다른 이민족이 저지른 벌에 대해서는 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면 되니까요.

구약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선민의식>을 가진 책이라는 점입니다. 모세의 법은 모세와 그들 민족에 국한된 법이며, 선택받은 자들도 그들 민족이었으니까요. 선택받지 않은 자는 어떤 의무도 혜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대 법을 바꾼다는 것은 고대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생각해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자신들인데, 그러한 성스런 임무를 스스로 깬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2. 예수의 박애정신은 고대 법의 틀을 깨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시기는 철기 시기입니다. 구약 성경의 전쟁 내용은 대부분 철제 무기를 가지고, 다른 민족을 점령하는 단계의 사회발전수준이었죠. 초기 철기시대의 보편적 특징은 많은 정복 전쟁 속에서 집단간의 우열차가 벌어지고, 무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가 심해지는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수많은 사회변화 속에서 다양한 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법의 특징은 전술했듯이 중형주의, 보복주의, 복수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를 훔치면 2가지로 갚으라는 1책2법 등에서 볼 수 있죠. 또 투기하는 여자는 죽여서 버린자던가, 이전과 달리 정절을 강조한다는 것도 새로 추가된 법 내용입니다. 가부장적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니까요.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이러한 흐름이 당연한 것임에도, 그 흐름에 대항한 성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철기시대에 살았던 석가, 예수, 공자 같은 사람들이죠. 공자는 철기시대가 접어들어 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춘추전국시대에 <가족윤리>를 말하였고, 석가는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도의 소국들 속에서 카스트를 부정하고 <만민평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고대법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였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한 너희들은 들었노라.

하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 사람이 만약 너의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을 내 놓아라. 너를 소송하여 하의를 뺏으려 하는 자 있거든 상의도 내어 주어라.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는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자 함이로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 햇빛을 악한 자의 위에도 선한 자의 위에도 비춰 주며, 비를 올바른 자에게도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도 내리도록 하시도다.

이 말은 예수가 고대법의 체계를 깨 버리겠다는 선전포고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를 지탱하던 것였시 <고대법>적인 사회질서였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이상적이기만 한 것>이었고, 로마 정치인들이 지향하던 처세술이 아니였습니다. 결정적으로 황제 숭배를 안할 뿐더러, 황제가 만든 법마저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못박혀 죽은 것은 기존 질서에 도전한 대가로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 나라에서도 <보복주의> 법이 극복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때 이런 법이 있습니다.

<도둑질한 자는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는 징수하지 말라. 백성이 가난하여 남의 곡물을 빌린 자는 농사를 짓지 못한 경우에는 원곡과 이자를 모두 갚지 않아도 되고, 올해에 수확한 자는 원곡만 돌려주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소사는 이달 30일에 한하여 받들어 시행하라.>

-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2월 21일 -

이게 무슨 말인가요? 도둑놈인데 도둑질한 물건을 받지 말고, 돈을 빌렸는데 갚은 돈이 없으면 갚지 말라니... 네... 실제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가 말한 내용은 고대법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법률 체계와 유사합니다.

고대법에서 <나를 죽이면 너도 죽인다>라는 내용은, 중세, 근대로 넘어가면서 바뀝니다. 도둑질을 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급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내용이 우리나라 법에 나오는 것은 삼국통일 직후입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삼국통일 직후를 <고대가 아닌 중세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살던 시기는 중세도 아니였고, 아주 먼먼... 고대였습니다. 우리가 성인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이 너무 뛰어나고 고결해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사상을 말하고, 그 신념 속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몽소 실천하면서 해낸다는 것에서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고대법의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만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유태인들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종교의 폭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은 그 종교를 로마 제국안에 녹여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시켰습니다. 지금 그 종교가 어떤 형식으로 평가받던 간에, 고대법적인 체계를 깨뜨린 예수의 사상 체계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플래시 자료 - 철기의 제작 과정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고조선의 8조의 법과 해석

1. 8조의 법

고조선의 8조법은 현재 한서지리지에 3개조만 남아있습니다. 3개조에 대한 해석내용은 이전 8조법 해석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이지만, 이 환단고기는 위작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8조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을 않을까라는 부분이지요.

사실, 고대 법들은 함무라비 법전 등을 포함하여 모두 살인, 절도, 간음, 주술, 독신 등의 인간의 기본적 범죄에 대하여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법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임은 상상력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 환단고기 8조의 내용은 고대 법인 함무라비 법전 등의 법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고대 사회의 공통적인 부분이 바로 여성의 음란함의 규제(가부장성), 신에 대한 모독(성역침해), 노동에 대한 신성함(근면과 공경) 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내용은 고대 일반법들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8조법이 남아있는 한서지리지의 원문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우리는 고조선에 치우쳐 진국을 잊고 있었다.

1. 알려지지도, 알려하지도 않았던 미지의 나라 진국

진국에 대해서 한번쯤은 짚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진국은 중국 사료에 <중국衆國>이라고 나옵니다. 衆國이란 쉬운 말로 하면 무리 국가들이란 뜻이네요.

고조선이 북방에서 강성할 무렵의 역사를 우리는 자랑스럽게 배웁니다. 단군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단군의 영토가 평양과 황해도,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멀리 만주를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넓은 지역을 다스린 자랑스러운 국가가 고조선이지요.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고조선이 우리의 뿌리로 자리잡고 있을 무렵, 남쪽 전라도, 경상도에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같은 남방의 원숭이들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북방 영토를 중요하게 취급한 만큼, 남쪽 한반도의 역사는 소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그 남쪽에 있었던 국가들이 바로 사료상의 <진국 : 중국>인 것입니다.

진국은 위만 조선 멸망 후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까지 원시 공동체의 해체기를 거처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분명 기록에는 없는 어떤 小國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또, 고조선이 그정도 강성한 국가였다면, 그 문물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고조선의 남부지역이나, 남부 국경선 지역이 그 당시 강성한 중국 및 고조선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되는 점입니다. 중국의 진, 한 나라 시기 한반도 남쪽에 무리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들 역시 국가단위를 형성하여 멀리 중국영토까지 알려졌다는 것을 뜻 합니다.

2. 신채호는 고조선의 입장에서 3 조선설을 주장하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고조선이 과거 위대한 우리 시조 국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적으면서도, 남쪽 진국의 역사는 상세히 적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의 과제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신채호는 민족의 영광된 시기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았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역사를 강조했으니까요.

신채호는 고조선이 3조선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신한, 불한, 말한이였습니다. 그 중 신한이 고조선을 이끄는 대왕의 국가였습니다. 불한과 말한은 신한의 부왕이였습니다. 이 3명의 왕이 각각 3경이 거주했답니다. 이것을 신채호는 전 3한시대라고 부릅니다.

3한은 같은 민족이였으나, 기원전 4세기 신조선은 연해주, 불조선은 요동, 말조선은 한반도를 지배하며 영역을 각각 분리하여 통치하였습니다. 신채호 이론에 따르면 진국은 곧, 말조선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되기 전의 조선을 분리된 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를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조선은 보통 이성계의 조선왕조와의 구분 때문에 <고조선>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옛날 단군의 조선이 여러 단계를 거친 국가이므로, 고조선 등으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이 3개의 조선 중, 신조선은 흉노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불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장군 진개에게 패하여 영토를 천여리나 잃었습니다. 불조선은 복수하기 위해 중국 진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불조선은 중국과의 항쟁을 위해 철기를 도입하려 하였고,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 백성인 위만에게서 철기 기술을 도입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오히려 불조선의 준왕을 공격하였고, 불조선은 위만이 다스리는 위만조선이 되었습니다.

이 준왕이 한반도를 다스리는 말조선으로 넘어와 월지국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말조선의 공격으로 이 월지국은 망하게 됩니다.

3. 신채호가 서술한 남쪽의 나라 <말조선>

말조선은 3개의 조선 중 한반도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처음에는 도읍이 평양이였는데, 이후 국호를 <마한>으로 바꾸고 월지국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 월지국은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 때 빼앗기기도 했지만, 다시 탈환하여 <마한>이라는 한반도 국가 중심체를 구축합니다.

마한은 한반도의 종주국이였습니다. 마한은 북방항쟁에서 중국에게 패한 신조선, 불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신조선의 유민들이 동부에 정착하여 진한이 되었고, 불조선의 유민들이 남부에 정착하여 변한을 형성합니다. 이로서 북방에서 활동하던 전삼한시대의 3개 조선은, 남방에서 다시 후삼한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삼한시대는 마한왕이 <진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진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자료로 참조되어 왔지만, 근거가 빈약하다고 해서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생각거리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이 고조선의 진정한 역사와 한반도 남쪽 <진국>의 정체를 밝힐 중요한 단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 출신의 역사 교수들은 이 3한 조선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 고구려사 역사 왜곡에 대항할 논리로 이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님도 같은 맥락의 역사학을 연구한 적이 있다고 하네요.

 
고조선의 위대한 영광이 빛나던 시대에 실제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였던 한반도의 역사는 200년 이상 아무런 자료도 없이 묻혀있다가 갑자기 삼한시대를 거쳐 백제, 신라가 튀어노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백제의 전성기인 4c에 백제인들은 중국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본 규수 지방까지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의 수도를 공격하기도 하는 강대한 세력이였습니다. 그러한 세력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백제 이전의 역사인 <진국>의 역사는 밝혀져야 합니다.

- 지금까지 서술한 신채호 선생님의 3조선설이나, 기타 내용들은 교과서에서 인정하는 부분이 아니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 부분의 내용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실제 조선상고사 등 일제시대 민족주의 학자들의 저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많이 적혀있다고 하네요. -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글을 퍼가실 땐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인터넷 문화의 기본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초기 고구려의 생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다. 환도 아래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살면서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마신다. 좋은 논이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다. 동이의 옛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많이 같지만 기질이나 옷차림이 다르다.

본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5족이 있었다. 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했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는데 이름을 부경이라고 한다. 길을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한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하여 동맹이라고 한다.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이라고 하며,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사료해석 : 7차 교과서에 제시되어 있는 고구려인의 모습의 증거가 되는 사료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