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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도

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에 이른 다이묘들의 시기 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 더보기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통일신라시대의 숙위학생 숙위학생이란, 신라에서 중국 당나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말합니다. 이 숙위학생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제왕권기와 신라하대에 성격을 달리합니다. 숙위학생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상단 검색창에서 을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1. 숙위학생이 시작된 이유는? 원래 숙위학생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등에서 당의 개방정책에 의해 유학생을 파견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당은 주변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을 모아 당나라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고, 유능한 인재를 당에서 선별하여 활용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숙위학생을 당나라의 개방성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초기의 숙위학생들은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인질적 성격이라는 것은 초기 숙.. 더보기
신라 골품제도에 대한 분석 신라 골품제도에 대한 분석 1. 골품제도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 골품제도는 신라 지배층내에서의 관등제도입니다. 이것은 신라 초기 독자적 영역세력인 층(족장, 군장층)을 신라 지배체제 내로 끌어들이면서, 상호 혈연성과 세력 규모에 입각하여 지배세력의 서열을 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는 신라라는 국가가 체제정비를 한 바로 직후 시기부터 그 골격이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12등급의 서열로 관등을 정했는데, 신라사회가 체계를 잡아가던 법흥왕기에 17관등제로 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골품제도가 서서히 정비됩니다. 따라서 골품제도란, 어느 한 시기에 카스트 제도처럼 법칙적으로 그 사회를 규정한 제도가 아니라, 신라 사회가 변동하는 방향성에 맞추어 계속 변화하면서 정비된 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골품제도는 신라 .. 더보기
초기 신라인의 생활상 신라인의 생활 평민의 경우 모자는 명주와 베를 쓰고. 겉옷과 바지는 베를 쓰고, 주나 베를 쓰고, 띠는 구리나 철을 쓰고, 가죽신은 주름 무늬로 된 가죽과 자색 가죽을 금하고, 가죽띠는 철과 구리로 장식하고, 신은 삼 이하를 쓰고, 베는 12승 이하를 쓴다. - 삼국사기 잡지2 복색 - 평민 여자의 경우 겉옷은 무늬 없는 베나 명주를 쓰고, 속옷은 거친 명주 또는 민무늬 명주나 베를 쓰고, 바지는 거친 명주 이하를 십고, 겉치마는 명주 이하를 쓴다. 옷고름은 무늬 있는 비단 이하를 쓰고, 띠는 무늬 있는 비단이나 명주 이하를 쓰고 버선목은 무늬가 없는 것을 쓰고 버선은 거친 명주나 민무늬 명주를 쓴다. 빗은 횐 상아와 뿔 이하를 쓰고, 비녀는 놋쇠나 돌 이하를 쓰고, 색깔은 4두품 여자와 같다. - 삼국.. 더보기
신라 진골의 분화 과정 진골의 분화 대관대감(大官大監)은 진흥왕 10년에 두었는데 …… 진골의 경우엔 관위 사지(舍知)부터 아찬(阿瑗)까지가 이 직에 임명되며, 차품(此品)의 경우에는 나마(奈麻)에서 사중아찬(四重阿瑗)까지 이 직에 보임된다. - 삼국사기 38, 잡지, 7, 직관 하 - 그 관직을 세울 때 왕의 친족을 상위로 삼는다. 그 족(族)명은 '제1골'·'제2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구분한다. 형제의 딸이나 고종·이종자매를 모두 취하여 처로 삼는다. 왕족이 '제1골'인데 처도 역시 그 족이고 자식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제2골' 여자는 취하지 않으며 비록 취하더라도 으레 첩(妾)으로 삼는다. 관(官)에는 재상(宰相)· 시중(侍中)· 사농경(司農卿)· 태부령(太府令) 등이 있고 무릇 열일곱의 등급이 있는데 .. 더보기
신라 흥덕왕 대의 사치 금지령 흥덕왕 대 사치 금지 흥덕왕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에 하교하여 이르기를 "사람은 위 아래가 있고 지위는 높고 낮음이 있어 칭호와 법식이 같지 아니하며 의복 또한 다르다. 그런데 세속이 점차 경박해져서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 오직 외래품의 진기한 것만을 좋게 여기고 토산물은 오히려 야비하다 싫어하니, 신분에 따른 대우가 무너져 거의 참람함에 가깝고 풍속이 쇠퇴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옛 법에 따라 하늘이 내린 도리를 펴고자 하노니, 참으로 혹시라도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을진댄 나라에 일정한 법도가 있음을 알려 국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진골대등(眞骨大等)은 복두(按頭)를 임의로 쓰되 겉옷과 반소매 옷·바지에는 모두 계수금라(喬繡錦羅)를 금하며, 허리띠에는 연문백옥(硏文白玉)을 금한.. 더보기
금관가야의 멸망과 식읍(부체제)의 등장 금관가야의 병합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장남 노종(奴宗), 둘째 덕무(武德), 세째 무력(武力)의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왕은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조정에 벼슬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유사 - 자료 참조 :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는데, 이 사료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그 일족을 흡수한 사실입니다. 왕이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지위를 준다는 것은, 가야국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연구되어야 알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금관가야계 김씨인 김유신 등이 신라 공신으로 성장하였다가, 중대 이후 골품제의 한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