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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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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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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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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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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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삼웅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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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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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입체영상 플래시

이 영상의 원 출처는 두산대백과 사전입니다. 교수, 학습 자료로 활용하기 좋아서 긁어왔습니다. 수업에서 쓰기 딱 좋겠더군요.

- 이 자료는 펌 자료입니다. -
  원문 :
http://www.encyber.com/gwang-gae-to/index.html

다음은 광개토대왕 비석의 비문 탁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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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istoria.tistory.com 티스토리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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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문제점 논의(종합자료)

1. 광개토 대왕릉비에 관한 이 사이트 내 검색 자료(히스토리아)

비문 전문  해석 : http://historia.tistory.com/236    
   비문 해석(한문포함) :
http://historia.tistory.com/909
   고구려의 영토 확장 :
http://historia.tistory.com/31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일부 : http://historia.tistory.com/323
   비문 위치와 내용 : http://historia.tistory.com/328

2.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은 보통 우리가 영토를 넓힌 왕(광,개,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 이름은 담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엄청난 묘호를 쓰고 있죠. 생전에 연호는 영락으로서 보통 영락대왕이라고 합니다.

비문은 보통 3개의 단계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위 참조 자료들에도 각각 자세한 설명을 달았지만, 1부는 고구려의 건국 내역, 2부는 대외 정복과정, 3부는 수묘인 연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 비문 위치와 내용 글 참조)

3. 비문의 발견과 위조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중국 만주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이 당시 만주가 가장 강성했던 국가인 청나라의 근거지라는 점입니다. 이 비석을 발견한 청은 이 비석의 내용이 자국의 수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비석의 내용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근거지인 요동-만주 지역을 차지한 일본은 이 비석을 위조했습니다.(청이 먼저 위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의 위조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의 침략자료로 활용하여,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를 정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비문의 중요 부분들을 쪼아내어 비문을 훼손하고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일본인 사까와는 이 위조된 비문으로 탁본을 만들었고, 이 탁본 또한 탁본을 만들때마다 약간씩 글자가 달라지고나, 먹물 농도가 달라져서 탁본 1장 1장의 내용이 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을 위조했다는 점입니다.

4, 신묘년조의 문제점

광개토대왕릉비의 최대 논점은 바로 신묘년조입니다. 신묘년조를 위조한 목적은 일본 참모부가 일본서기(니혼쇼키)에 적혀있는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즉,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약 200년간 경영하였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된 것이죠.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볼까요?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과*南,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 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은 이 부분을 위조했습니다. 일본측의 위조는 일본이 백잔, 신라,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來渡海입니다. 즉, 건너와서 쳐부순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그 뒤의 글자들이 지워져 있으므로 알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실제, 당시 상황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이므로 고구려가 주어가 되어야 맞습니다. 즉,

고구려가 바다를 건녀 신묘년에 왜를 쳐부셨다. 가 맞죠.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양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아있는 역사상 중요한 논쟁입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위 참조 포스트들에 각각 기술되어 있습니다. 혹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글을 읽다가 중요한 것이 눈에 띄면 바로 올릴께요.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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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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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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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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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본 일본과 야마타이 국

1. 일본의 신화

일본의 신화는 일본서기에 쓰여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니혼쇼키라고 일본식으로 많이 부르는데, 이 일본서기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고, 중국측 기록에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며, 특히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 부분에서는 당시 한반도 정세와 너무 안 맞아서 위작이란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사료의 신빙성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일본의 정사인 만큼 이 책을 인용하여 신화를 서술해볼까 합니다. 어짜피 신화란 있었던 사실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사회상을 알려주는 key의 역할을 하는 편이니까요.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아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일본 고대의 야마타이국 논쟁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여왕 신공황후가 나옵니다. 원래 일본에 히미코라는 여군장이 있었는데, 일본역사책은 이 히미코를 일본의 절대군주인 신공황후로 상정한 것이지요. 이 신공황후는 야마타이국을 이끌고 있었고 야마타이 국은 곧 일본의 야마토 조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야마타이국은 곧 야마토 지방(일본 나라현)에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전편에서 지도로 보았지요? 나라의 위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고대 강국 야마타이국이라는 여왕의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이며,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일본인들도 알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사에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요동인지, 평양인지, 아니면 수도가 이동하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일본정사인 일본서기로 따지면 당연히 야마타이국은 야마토 정권과 연결되는 나라지방입니다. 그러나 중국책인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일본의 위치와 방향을 따라가보면 방향이 일치하는 곳은 규슈지방(위 지도의 기타규수-나가사키 근처)입니다.

이것은 일본 고대사에 큰 숙제를 던져줍니다. 만약 야마토 지방이 일본 고대 강국인 야마타이국이라면 일본은 초기부터 여왕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과도기의 연맹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변방인 규슈가 야마타이국의 중심지라면 고대 일본은 그냥 작은 소국국가들이 있었던 수준이 되는 것이고, 야마타이국도 수많은 일본 소국 중 변방에 위치한 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 고대의 여왕인 히미코(신공황후)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일본서기에서는 이 신공황후가 가야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뒤 가야-백제남부-신라남부에 걸치는 영역을 200년간 지배했다고 나오거든요. 물론 허황되긴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기록을 꽤 많이 믿고 있습니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를 일본이 위조한 목적도 이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앙이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하며, 일본을 격파했다는 기사는 일본측에 의해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격파하였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양국이 풀어야할 문제중 하나죠. 신묘년조 기사가 포함된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은 한국사 사료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중에 고구려사를 풀어 쓸 때 자세히 설명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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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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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내가 일직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비가 오랬동안 초래 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 지방 영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토지를 침탈하였다는 자구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것을 도부로 쪼개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영업적으로 탁본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닳아 없어지거나 이지러진 부분을 석회로 떼어 발랐는데 이 때문에 그동안 인식할 수 없었던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참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만 첨가된 것 같습니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

사료해석 :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청시대의 만주족 성지인 만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희가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한 농민이 발견하였고, 영희는 그것을 탁본뜬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석이 왜곡되어진 과정입니다. 일본인들이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비석을 탁본뜨고, 잘못된 부분을 위조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논쟁이 더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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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해석참조 : http://myhome.naver.com/sial/sss.htm

제 1부.

오직 옛날 시조는 추모왕이시니 창업의 기초를 닦으셨느니라.. 출생하여 스스로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랑부란(사내부족 아이)이 내려와 세상에 태어나니 성스러움이 있었다. 0000 이름을 駕(가)라 하였다. 순행하여 돌아다니다 남쪽 아래의 길에서 부여 엄리에서 큰 물(홍수)로 말미암아 왕으로 임하였다. 나루에서 말씀하여 가로되 “나는 바로 임금이니 하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백녀이고 郞 부족의 추모왕이라 한다. 나를 건너가게 이어 주시오.”

거북이 떠올라 소리를 쳐 응하는 즉 허락하였음이다. 쭈욱 이어서 건널 수 있도록 거북은 떠 있었다. 그리하여 뒷날 비류곡을 건널 수 있게 만들었다. 홀본을 근본으로 하니 서성산 위쪽이었다. 그리하여 도읍을 세우니 어찌 아니 즐거우랴! 세상의 位는 황룡이 보내는 것으로 인하는 것이다. 황룡이 와 아래에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의 동쪽 산등성이를 밟으니 황룡의 머리였다.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하늘을 고려하여 세자에 명하니 유류왕(유리왕)이다.  이로써 道를 일으켜 다스리니 크고 넒었다. 주류왕이 터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뒤섞여 0000 이르다가 17세 손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리셨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皇天 - 가장 높은하늘)과 같고, 무예와 위엄은 사해(四海 - 온세상)에 떨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그 생업(직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여, 오곡(여러 양식)이 풍성하였다.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 9월 29일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여 새겨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제 2부.

영락 5년 해에 있었으니 을미다. 왕이 이로써 피(잡초)가 곱지 못하니 000 돌아와 0000 사람을 몸소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부산을 지나 00산을 짊어지고 이르니 염수 위였다. 터를 격파하니 언덕 부락 육칠백으로서 소와 말을 키우는 무리였다. 양은 헤아려 세기 어려웠다. 이를 바로하고 돌아오면서 지나는 곳을 부드럽고 평평히 길을 내며 동쪽으로 왔다. 000성에 힘을 기울이니 성 북쪽이 풍요로웠다. 다섯 (왕)이 해산물을 준비하고는 (사냥)을 하면서 놀다 가시라 하였다. 나라 국경의 밭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피다가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옛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0000는) 백잔과 신라를 깨부수고 신민으로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6년인 병신에 왕이 몸소 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여 멸하려 하였다.  ‘잔국군’을 토벌하여 치니 과000에 이르렀다. 우선 남쪽을 공격하여 8성을 취하고 모로성을 허물었다. 각각 모로성, 간저리000, 000성, 관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이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막(수)0(추)0(성), 000성, 00이야라0성, 전성, 0어0이성,농0매0성, 두노성, 비0성, 0차0이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0발성, 00성, 루매성, 산야성, 야단성, 세성, 모루성, 0우루성, 소회염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0잠성, 임성, 000, 000, 0이성, 취추성, 0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삼양  성, 회0발0성, 종0고0로성, 구천성, 00, 000이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니 나라 성의 ‘잔’이 불복함이 의롭다며 감히 나와  싸웠다. 왕은 위엄을 빛내며 노도같이 언덕을 통하는 물 아리수를 건넜다. 이리하여 찌르며 핍박하니 가로누운 잔(병이  000이었다. 쉽게 성을 0하니 ‘잔주’는 다급하여 000 남쪽과 여자를 바치고 살려달라고 말하였다. 일천 인과 모시 천 필을 00 하였다.

왕에게 궤000 스스로 맹세하여 따르니 금일 이후 영원히 종으로서 몸을 의탁하는 손으로서 ‘노객’이 되겠다 하였다. 태왕은 은혜로 용서하고 “먼저는 미혹되어 잘못된 것이로다.“ 하고 그러한 것(맹세)을 쓰게 한 후에 ”순응하여 정성을 다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얻으니 58성에 촌이 700이었다. 장군과 잔주의 아우와 아울러 대신 10인을 스승과 돌아가도록 하였다. 도읍으로 돌아오니 8년 무술이다. 가르침(교지)을 스승 편에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토곡’은 비단을 삼가도록 하니 쉽게 노략질하여 얻으려 하는 까닭이다. 없애고 (이를?) 라성에 더하여 ‘태라곡’이라 하였다. 토곡의 남녀 삼백여 인이 스스로 와서 조공을 하고 이로써 일을 논의하였다. 9년 기해에 백잔이 왜와 화합하여 통하고 더불어 함께하자 맹세하였다. 왕은이 아래 평양을 순행하니 신라에서 사신 백을 보냈다.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나라국경에 가득하고 성의 연못이 무너져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하여 종으로서 몸을 의탁하고 백성을 위하고자 합니다.”왕에게 귀복하고자 청하니 태왕은 자비로운 은혜로 불쌍히 여겨 “그렇다면 충성을 다 하시오.” 하고 명하였다. 특별히사신을 보내 알리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로써 치밀한 계책을 10년 경자에 가르쳐 보내니 보병과 기병으로 5만이다.

신라를 구하러 가니 남자들이 좇아와서 성에 거하였다. 신라성에 이르니 왜구가 터에 가득하였다. 가운데 관군 쪽으로 왜적이 이르니 물리쳤다.  000000000000000 스스로 왔다.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라’에 이르렀다. ‘임라’를 맡고 성을 빼내어 신라를 따르도록 하여 더하였다. 성에 즉시 귀복하여 돌아오니 ‘안라인 술병’이다. 이들을 신라성으로 뽑았다. 염00성에 왜구가 가득하였으나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00000000000000000000  다하여 고치고 막으니 왜구가 왔다. 안라인 술병이 신라성에 가득 하였다. 000 터 00000 말하였다.  000000000000000000000000000 백잔과 왜구는 무너졌다.  

00이로써 00을 따랐다. 안라인 술병은 옛날처럼 신라에서 잠을 잤다. 비단을 몸에 아니 걸쳤다. 와서 논의하여 일을 0000

(광)개토경호태왕은 “000 비단금침은 종복으로 하리라.” 하고 글귀를 써 놓았다. 0000 청하여 조공하였다. 14년 갑진에 왜구가 불쾌하게도 대방에 침입하였다. 잔병과 화합하여 통하니 00000  석성에 배를 연결하여 0000 하였다. 0000왕은 몸소 거느리고 토벌하니 수숫대 치듯 하였다. 0000 서로 만나 칼끝을 겨누었다. 왕은 깃발을 겨누어 끊었다. 찌르니 왜구는 패하여 무너졌다. 베어 죽이니 수를 셀 수가 없었다.

17년 정미에 가르쳐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냈다. 00000000왕은 스승과 사방 합하여 싸웠다. 베어 죽여 쓸어버리니 터에서 없어졌다. 베어 버리고 수확한 기와 갑옷이 일만여나 되었다. 영군의 재물, 그릇, 기계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깨뜨리고 돌아오니 사구성, 루성, 우전성, 00000, 나00성이었다.

20년 경술이 되었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에 속한 백성이었다. 그 중에 배반하여 불공하는 자가 있으니 왕이 몸소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대가 도착하여 려성에 들이닥치니 려성국은 놀라 소란이 일었다. 굴복하고 나와 헌납 하였다.

000왕의 은혜가 널리 전도되었다. 이리하여 바로잡고 되돌리고 돌아오니 또 그들은 사모하여 관을 따르는 것이었다. 관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 압로, 비사마 압로, 서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압로였다. 다 공격하여 파한 성이 64였고 촌이 1400이었다.

제 3부.

묘지기로 두어 굴을 파고 연기를 피워 내통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하고, 고구려를 배반한 나머지 백성의 나라에는 연기 둘을 피우도록 하고 이마에 손을 얹고 관찰하며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를 ‘간연’이라 하였다. 동해의 배반한 나라는 연기 셋을 피우도록 하였다. 연기 셋으로 살피도록 하니 오돈성은 백성 네 집이 함께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간성은 한 집이 연기를 돌보도록 하고, 비리성은 두 집으로 하여 나라의 연기를 피우도록 하였다. 평양성은 백성의 나라이니 연기 하나로 돌보도록 하고, 연기 열을 잇닿게 이루고 두 집씩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문드문한 사람의 나라는 연기 하나로써 돌보고, 연기 셋이니 고을이다.

곡은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고 양성은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니 사내가 편안하였다. 연달아 스물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고쳤다 개량한 고을은 세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니 새로 생긴 신성으로 세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였다. 남소성은 한 집으로 하여 나라의 연기를 하였다. 새로 한과 예를 오게 하여 사수성에 나라의 연기 하나를 돌보게 하였다. 잇대어 하나는 모루성에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였다.   구모는 손님 중에 머리다.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니 저 아래의 한에서 한 집을 구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였다.

사조성은 한과 예로서 나라의 연기 국연 셋과 간연 스물 하나를 돌보게 하였다. 옛날의 법식을 어찌 존중치 아니하겠는가? 라성은 한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니 빛나는 옛날의 성이다.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하여 돌보도록 하였다. 셋이 몸을 의탁하여 손님이니 한(韓) 한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아단성은 잡석과 보배가 뒤섞인 성이다. 열 집을 합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파노성은 한(韓) 아홉 집으로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허물어진 모려(로) 성은 네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니 모로성 각각은 두 집씩 하여 연기를 돌보았다. 모수성은 세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고, 간저리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돌보도록 하였다. 세 미추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돌보도록 하였다.

0000000  일곱이니 야리성은 세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두노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둘을 돌보도록 하였다. 안으로 통하는 성인 오리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였다. 수추성은 모름지기 추나라(주몽이 탄생한 나라)의 성이니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오백을 하여 돌보도록 하였다.

잔은 남쪽에 거하니 韓國에 살았다. 韓으로 하여금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다섯을 돌보도록 하였다. 다섯 큰 산과 한성韓城은 여섯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농매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일곱을 돌보도록 하였다. 윤노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스물 둘을 달아매어 돌보도록 하였다. 고모루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고, 전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였다. 미성은 여섯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고, 취자성은 다섯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삼?)양성은 스물 네 집을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박살난 '나성(임라의 성)'은 한 집을 하여 나라의 연기 국연을 올리도록 하였다. 나단성(임라의 단성)은 한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고, 구모성은 한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어리성은 여덟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고, 비리성은 세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세성은 세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계실 때에 가르쳐 말씀하셨다.

“시조왕과 선왕께서는 오로지 가르침으로서 멀고 가까운 옛 백성을 취하셨다. 옛 백성을 취하여 묘를 지키고 쓸어 청소하도록 하여 (쇄?) 하라. 나는 옛 백성이 전전하며 굴러다님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똑같이 여겨 약함을 영한다면 내가 만년이 지난 후에도 편안할 것이다. 묘지기는 오로지 내가 몸소 다니며 경륜한 곳에서 취하라. 한과 예에 영을 내려 와서 예비하도록 하고 쓸어 청소하게 하라.“ 말씀하시어 이와 같이 가르침을 주시니 후에 이로써 가르침을 주신대로 한과 예에서 취하니 220 집이었다.

그리하여 보니 법을 알지 못하는 즉 옛 백성 110 집을 취하여 돌아왔다. 먼저와 지금의 묘지기가 합쳐 굴을 파고 나라의 연기 국연 삼십과 간연 300을 돌보았다. 도읍에는 합 삼백 삼십) 집이다. 자신의 윗 시조와 선왕을 이로써 묘 위로 하였다.

불안한 돌기둥을 돌려 바치고 묘지기로 하여금 연기를 올려 어긋나 섞이도록 하였다. 어긋난 백성이 섞이도록 함이니 오로지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모두를 위하고자하였음이다. 조상과 선왕의 묘는 위이니 벼슬을 돌기둥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 터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지 말라고 영을 하였다. 어긋난 것을 섞이게 하시고 또 묘지기를 통제하시어 몸소 영을 내렸다. 이로써 훗날 고쳐서 (묘지기를) 서로 전매하여 팔고 사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을 고쳐 서로 전매하여 팔고 산다면 비록 있는 부자라도 발(종놈)로 하라. 놈들이 그래도 멋대로 산다면 영을 통하여 팔은 자도 형벌에 처하라. 팔은 자는 영을 제정하여 묘지기로 하라.”

                                                                                         - 광개토대왕 비문  -

사료해석 : 광개토대왕비는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료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직접 연계된 사료이기 때문이지요. 일단 이 비석은 1부는 건국과정과 건국설화, 2부는 정복사업, 3부는 수묘인(묘지기, 노인)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의 논점은 첫째, 3부의 수묘인이 과연 고대 사회에서 말하는 <노인>이라는 계급인가? 그리고 노인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맞닫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한국고대사>방을 참조하세요.

두 번째 논점은 일본이 왜라는 글자를 필요한 부분에 위작하여 배치한 것이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죠. 이 논점이 되는 부분이 비석의 이 부분입니다.

   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___以辛卯年________破百殘 ________羅以爲臣民
   신라와 백잔은 예로부터 속국이었고, 조공을 바쳐왔는데  ___가 신묘년에 ______ 하여 _______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 부분을 일본이 왜곡하여 왜가 쳐들어와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였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이죠.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 학자들은 과연 지워져 있는 비석의 사실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고대사>방에 자세히 논의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세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