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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가야의 멸망 가야의 멸망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곧 첫째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력과 함께 국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왕은 김구해를 예로 대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교를 내려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은 그 부장으로 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왕궁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백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였다. 이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구형왕은 신라와 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동기 탈지 이질금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 등과 신리에 투항하였다. -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하, 가락국기 - .. 더보기
후기 연맹체 가야 - 대가야 설화 후기 연맹체 대가야의 설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9, 고령현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후기 가야연맹체인 미오야마국(대가야)의 설화입니다.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을 내세운 대가야는 자기 시조가 산신과 천신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통하여 전가 가야의 전성기 때 금관국과 미오야마국이 형제의 국가임을 알리고 새로운 맹주의 전통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후기 가야 연맹체를 복원하면서, 가야는 장수왕의 남하를 막고자 하는 신라, 백제와 모두 연합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려고 하였습니다. 더보기
대가야와 사로국의 전쟁 대가야와 사로국의 전쟁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 8월에 아찬 길문이 가야 병사와 황산진(양산 낙동강 나루터로 추정) 하구에서 싸워 천여급을 얻었다. 파사 이사금 15년(서기 94) 2월에 가야가 마두성을 에워싸자 아찬 길원이 기병 천명을 거느리고 차니 달아났다. 기마 이사금 4년(서기 115)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이 정예병 만명을 거느리고 따르니, 가야가 성에서 나오지 않고 굳게 지켰다. 마침 장마가 와서 돌아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사료해석 : 이 사료는 금관가야의 전성기에 사로국(진한 신라국)과의 전쟁을 담은 사료입니다. 금관국 가야가 적극적으로 사로국과 전쟁을 벌이려고 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른 가야 소국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했었던 듯 싶습니다. .. 더보기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