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퀴즈) 제 1부. 근대인되기 : (02) 학교 종이 땡땡땡!

 

근대를 보는 창 20에 대한 도서퀴즈 2회 문제입니다.

도서퀴즈는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선정한 뒤
각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풀어보는 퀴즈입니다.

학교시험처럼 성적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무심코 넘어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퀴즈랍니다.

70점 이상일 경우, 축하 메시지가,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격려의 메시지가 나온답니다.
다음 회차는 근대를 보는 창 2회차분입니다.
역사도서 <근대를 보는 창 20> 은 제목 그대로 총 20회분으로 퀴즈를 구성했습니다.

만약 문제를 풀어보시는 분이
역사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시거나
공무원 또는 교원 준비를 하고 계시는 수험생이시라면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되시는 분들은 책을 읽지 않고 도전해 보세요~


**** 도서 정보 ****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최규진
출판 : 서해문집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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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보는창20인간을둘러싼여러이야기묶음이곧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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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10. 거문도 사건과 중립화론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고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당시 청의 외교고문이었던 뭴렌도르프와 러시아 외교고문으로 친러파를 양성하고 있었던 베베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하게된다.(1884)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함경도 경흥을 조차지로 요구하고 정부는 그것을 승락하게 된다. 이로써 러시아의 오랜 바람이었던 부동항의 확보는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러시아를 늘 주시하고 있던 영국의 눈이 뒤집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에 이른다.(거문도 점령 사건, 1885 ~ 1888)
  이에 부들러와 유길준 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중립화론을 내세웠으나 스위스와 같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하는 큰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들이 서로 보전하는 정략될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같은 아시아에 관계 있는 여러 나라들과 화합하고 우리나라를 참석시켜 같이 중립 조약을 체결토록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익도 될 것이고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 것이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ㅡ 유길준, 「중립화론」

 


11.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 을미 개혁

 악명높고 출제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순서, 주체, 개혁 내용들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하자.
 

  1) 동학
 
동학은 1860년 서학에 반발하여 최제우가 유불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민간 신앙과 통합하면서 생겨나게된 종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학(西學)에 반대하였다하여 그 이름도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사해 평등주의와 '사람은 곧 한울'이라는 구호 아래 남녀노소의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 입장을 가진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과 백성을 혼란캐(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였으므로, 1863년 최제우는 처형당했고, 동학교도들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평민들에게 있어서 동학이 내세운 평등 사상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었기에 몰래몰래 믿어나가다 정부의 탄압이 많이 줄어들었을 무렵, 전에 처형당한 교주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집회를 벌였다.(삼례 집회, 교조신원운동, 1892) 이는 종교적인 집회라 하겠다.
  이듬해 동학교도 이외에도 많은 농민들이 참여한 보은 집회에선 '보국 안민(保國安民,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편한캐 함)', '제폭 구민(除暴求民, 폭정을 없애고, 민중을 구함)' 등의 구호를 내걸며 지극히 사회 개혁적, 정치적인 집회로 바뀌어 나갔다.

 2) 1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황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ㅡ 전봉준의 격문
 

1894년 1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이라고도 불리우는 동학농민운동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당하고 가혹한 수탈(만세보 등)에 항거하여 전봉준 등이 항거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전몽준 등에게 돌리자 분노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1894년 3월 남접의 강경한 동학교도(비교적 남쪽이라는 것이다. 호남 등의)들이 운동을 일으켰다. 1월 고부 민란의 정봉준 등의 지도부를 온건히 계승하여 반봉건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한양을 향하지 않고, 세력확장을 위해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황토현, 완산을 거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교도들이 전주 이씨 종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자, 당황한 정부는(당시 왕들이 전주 이씨였으므로) 청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없던 그들은 출병하게 된다. 그에 따라 1884년 갑신 정변 이후 일본은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남자어린이의 날, 코이노보리 등에 두발 뻗고 잘만 놀고 있던 일본군은 청군이 출발한 다음날인 5월 6일에 출정하게 된다. 청과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정봉준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와 크게 빗나가자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고, 폐정 개혁안을 발표하여 그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 갓은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개가(改家)를 허용한다

 => 5, 6, 7 반봉건적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수취제도 문란

 9. 관리 채용에는 지벌(地閥 ; 지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倭)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반일적 성격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 토지 제도 개혁 요구

ㅡ 폐정 개혁안 12조

3) 갑오 개혁, 2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을미 개혁(1895)
  그렇게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막을 내리고 정부는 정치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체적으로 교정청을 설치한다. 하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둘러싸고 교정청을 폐지할 것을 협박하였다. (일본 경복궁 포위)
  동학 농민 운동이 자체적으로 끝이 나고, 조선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 일 양군은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전쟁이 나기에 이른다. (1894. 6. 23. 청일전쟁)
  이윽고 일본은 교정청을 폐지시키고 군국기무처를 설치시켜 개혁을 단행하도록 한다. (1894. 6. 25. 1차 김홍집 내각, 1차 갑오개혁)
  하지만 당시 일본은 청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간섭도 적어 주체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그러하여 10년 전의 갑신정변의 내용이나 동학교도들의 요구가 대다수 반영된 개혁이기도 했다.


 1. 이후 국내외 공사(公私)문서에 개국 기원( = 단기)를 사용한다.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 신분제 폐지, 동학 농민군의 요구 반영

 4. 죄인 자신 이외의 일체의 연좌율(連座律)을 폐지한다.

 6.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7.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8.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 1.2.4.6.7.8 봉건적 악습철폐

18, 퇴직 관리의 상업 활동은 자유 의사에 맡긴다.

20.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ㅡ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법령


  나름대로의 개혁은 성사되었지만, 한반도는 남의 나라(청, 일)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에 동학교와 농민들은 다시 한번 반외세의 깃발하에 모두 모여(남+북접) 운동을 일으켰다.(척왜양창이)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힘을 잃고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만다.

  같은 11월, 갑신 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을 빽으로 삼아 돌아왔다. 김홍집 - 박영효의 온건 - 급진 연립 내각(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영효가 2차 갑오 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입김이 어느정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튼, 2차 갑오개혁에서는 헌법적 법률인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 교육입국조서(2005 수능) 등을 발표하였다.


 

 1. 청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기초를 확고히 세울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과 종실, 외척의 구별을 밝힐 것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혼합하지 아니할 것

  => 왕권 약화, 내각 중심(입헌 군주제가 아니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할 것

 6. 인민에 대한 조세 징수는 법령으로 정하여 명목을 덧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이 관할할 것

10. 지방 관세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할 것 => 사법권 분리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하는 법을 사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가 군제 개혁하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1895년 4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자(삼국 간섭) 12월,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러한 강한 모습을 보고 민씨정권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청을 저버리고 친러파가 되었고 7월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친러적인 내각을 구성하였다.(3차 김홍집 내각) 이에, 일본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러파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명성황후를 낭인들을 통해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우게 된다.(4차 김홍집 친일내각, 을미개혁 : 연호(건양) 제정, 친위대(서울), 진위대(지방) 설치, 태양력 사용, 단발령) 

 4) 동학 농민 운동(1894)의 의의와 한계
  동학 농민운동은 대내적으로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어 사회체제에 항거하고 갑오 개혁 때 그 뜻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외세적 성격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해 미완의 운동으로 끝맺은 안타까운 '운동'이기도 하다. 

 5) 갑오(1894) 을미(1895) 개혁에 대한 평가

  온건개화파 중심으로 정부의 주체적인 근대 개혁이라는 것과 앞서 갑신 정변의 급진개화파나 동학농민운동의 농민층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권력을 가진 소수층의 위에서부터의 개혁이었고, 토지 개혁도 하지않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강요 속에 이루어졌다는 씁쓸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6) 개화 운동의 비교
  공통점 : 신분제 폐지, 인재의 고른 등용, 조세제도 개혁
  차이점 : 재정의 일원화, 반청적 경향(갑신정변, 갑오개혁) 
              토지제도 개혁, 반일적(동학 농민운동)


 7) 아관파천(1896)

  을미개혁엔 태양력과 특히 단발령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종을 필두로하여 머리를 잘리고 그 이하의 양반 유생, 평민을 비롯하여 남자들의 상투를 잘리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1896년 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 보초가 경복궁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고종은 조선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독살에 대한 히스테릭으로 일절 가공품은 입에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오로지 허기를 달랬던 것은 서양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던 캔으로 포장된 연유 까먹는 것과 생 달걀을 직접 깨뜨려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다 그는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결정한다.(1896, 아관파천)
  갑작스럽게 러시아 공사관 창문을 통해 나타난 고종은 을미개혁(특히 단발령)의 무효를 선포하고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자 의병들은 해산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몇몇 이권을 러시아 공사에게 넘기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 최혜국에 관련된 모든 국가가 이권을 빼앗아 가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인 침해를 입기도 하였다.


 8) 독립협회(1896 ~ 1898)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갑신 정변의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그 역시 급진 개화파에 속했다. 그는 갑오 개혁이 위로부터의 좁은 개혁임을 반성하고 독립협회(1896 ~ 1898)를 조직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유인권 및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고 만민 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들의 의식을 높이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폐쇄 등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그 대상은 러시아에 한정되었을 뿐, 미국, 일본 등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역시나 급진 개화파 출신답게 입헌 군주제의 전신격인 중추원 관제(의회 기능정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뒤에 나올 광무개혁 이후, 황제제일을 주장하는 광무정권과 정치적인 마찰(경제, 사회적인 마찰은 없었다.)을 이루어 황국협회와의 패싸움을 구실로 해산하게 된다.


 9) 광무개혁(1897)

  드디어 1년의 고요 끝에 그가 돌아왔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아이돌이 컴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무백관과 독립협회의 간청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고종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의 잔재라고 한다.)으로 러시아 공사관의 바로 건너편이다.(언제든지 도망가기 쉽도록. 전에 경복궁 포위 때 호되게 고생한 고종이기에;;) 환궁한 고종은 원구단(* 참고 : 환구단이라고도 한다. '원구단'도 일본의 잔재라는데.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황제로 즉위한 곳이니 '환구단'이 맞는 말인 것 같다.)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Tip  : 인기만화 「궁(宮)」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도서기와 비슷한 입장이다.)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황제의 전제적인 권한(정치적인 면)만 제외하면 모두 근대지향적인 (경제, 사회)개혁이었다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선 안정적인 조세를 걷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했고, 지계(地契 : 땅문서)를 발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근대적 공장과 회사 등도 이 개혁 때 생긴 것이다. 교통, 통신, 의료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교육입국조서와 같이 고종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각종 실업, 기술 학교를 세우고, 유학생도 파견하였다.
  갑오 을미 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한만 광무개혁이었지만 역시 황제의 유일한 권한만을 강조하였음으로 복고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가 가장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한 때이기도 했다.

Posted by 비회원

(근현대사 21) 광무개혁 이야기 1장

1. 광무개혁은 왜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광무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무개혁은 4-5장으로 나눠어서 다루어볼까 합니다. 1장은 광무개혁의 배경이야기, 2번째 부분은 광무개혁의 정치적 개혁과 대한국 국제, 3번째 이야기는 광무개혁의 지조발급과 경제관련 이야기, 4번째 이야기는 광무개혁 때 교육, 공업 등 사회 기반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개혁의 특징과 한계점을 이야기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일단 광무개혁이 실시된 것은 1897년으로, 이 시기는 앞 장에서 다루었던 독립협회의 활동 및 열강의 이권침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실시됩니다.

우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광무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야겠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제발 돌아와 달라는 국민들과 독립협회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환궁 요구에 감동을 받기도 하죠. 왕을 다른 나라 대사관에 두고,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의 이권을 빼앗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로 국왕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대외적 배경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게 되면 다른 열강 국가들은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일본과 청을 비롯된 열강들은 고종의 환궁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실제 당시의 국가 세력 관계는 어느 한 국가가 조선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다른 국가들이 견제하는 <균점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로, 청의 영향력이 강해진 갑신정변기에는 미, 일, 영국 등이 조선에 간섭하려 하였고, 일본이 강해진 시기에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이 삼국간섭을 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되돌리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가 강해진 시기에는 영국, 일본 등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머물기도 하구요. 어느 한 국가가 동아시아 중요 전략지인 조선을 독점하지 못하는 것은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조선은 각 국가에게 돌아가면서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국권을 약화시킨 개혁세력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반포하고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죠. 당시 분위기 자체가 열강을 몰아내고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뭔가 해보자..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러한 분위기는 이미 독립협회가 깔아놓았던 것이구요.

고종은 환궁하자마자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연호는 광무라 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개혁의 목표는 <강력한 전제황권>을 만들어 주변국을 몰아내고 자주국가의 위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무개혁의 기본 방향은 <옛 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이었습니다. 이 구본신참의 이념은 <갑오, 을미개혁>의 문제점을 바로 잡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갑오개혁이 근대화를 위한 개혁이었음은 인정할 수 있지만, 갑오개혁은 너무 성급했고, 또 일본의 의도가 많이 포함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개혁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했죠. 예로, 갑오개혁에서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일본의 의도가 포함된 개혁이었으니까요,

광무개혁에서는 국왕과 보수파 관료들, 측근세력들을 중심으로 황제권 1원화를 추구하고, 국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근대 국가를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었죠.

2. 독립협회와의 마찰과 탄압...

독립협회를 다루면서 중요하게 다룬 내용은 <입헌군주제와 내각제 문제>였습니다. 특히, 서재필, 박영효 등의 주장이 광무개혁과 충돌하고 있었다는 점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독립협회는 내각을 중심으로 서구식 의회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서구식 의회를 만들어 국민주권적인 법치국가를 만든 뒤 중추원을 내각으로 개편하여 개혁의 중심기구로 하려고 했죠.

그러나, 고종의 개혁 목적은 절대적인 왕권강화를 통한 국가 발전이었습니다. 즉, 독립협회와 광무개혁은 둘다 국가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한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그 방법이 정반대였던 것이죠. 고종이 초기 독립협회를 인정하다가도, 서재필을 추방하고 박영효를 탄압했던 것, 또 관민공동회는 인정하면서도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면서 해체시킨 것 등은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이였습니다.(독립협회편을 참고하세요.)

따라서 대한제국의 국제 마련, 양전사업 및 지계발급과정, 상공업 육성 등의 모든 부분에서 고종과 독립협회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려 했지만, 독립협회는 내각중심의 국제를 원했습니다. 물론 후기 독립협회 인사인 남궁억 등에 의해 타협안도 나왔고, 박정양 내각이 고종의 비위를 맞추려고도 했지만, 고종은 불만족스러웠죠.

또, 대한제국에서는 왕실재정을 강화하여 왕실의 조세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왕실사무와 행정사무를 분리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마찰을 보인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국가의 강력한 법적 근거가 필요함을 생각하고, <헌법>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래서 <대한국 국제>가 등장하고, 국가 건설방향을 황제권 강화의 방향에서 잡게 됩니다. 개혁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대한제국은 거침없는 개혁을 실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정치, 경제, 사회부분으로 나눠서 한번 사료를 통해 분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짧은 서론이 끝났습니다. 본격적인 광무개혁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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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4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2007/07/22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0장)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2007/07/17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8) 1884. 갑신정변의 원인과 그 결과는?
2007/05/20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백정 박성춘의 관민공동회 연설문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고종 황제의 대한국 국제 및 해석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중추원 신관제와 헌의 6조 해석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우리 역사 최악의 인물 - 이승만 편 -

1. 이승만은 땅 속에 묻어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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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기에서 재뿌리기, 초치기, 배신과 분열.... 등등의 장면에 이승만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죠.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조중동(?)이라 일컫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 신문들은 이승만 기념 사업회를 연다던가, 이승만에 대한 기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실 별 관심조차 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대한 신문 기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것들이 많았거든요.

자, 그럼 제가 왜 이승만을 역사상 최악의 인물편에서 다루려고 하는지 한번 볼까요?(원래 오늘 이완용편을 해보려다가 너무 열받는 사료들 몇편을 보고는 때려쳤습니다. 쓰다 심장마비 걸릴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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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가의 핏줄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인물...

이승만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5대손입니다. 그러나, 이미 양녕대군 8대손부터 종친에서 멀어졌고, 12대손 때부터는 종친 대우를 못받았습니다. 또한 과거 급제자도 오랫동안 없던 관계로 양반대우 받기도 힘든 가문이었죠.

그러나, 이승만이 20살이 되기 전,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과거라는 것이 없어지고 능력사회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20살의 이승만은 과거 시험 대신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전국민이 일본의 강요로 머리를 깍아야 하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승만은 단발령에 찬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신교육을 받은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고, <부모가 주신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깨끗한 두발>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고, 대한제국의 정권이 친미적 성격을 가진 서재필 등의 정동구락부가 주도하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은 상당히 대우받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이 학교에서 협성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매일신문>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신문에 글을 쓰면서 그 자신의 입장은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합니다. 동양평화론이란,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청, 대한제국은 사로 친하게 지내야 할 동양의 친구들이므로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관점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일본 관리들과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일본을 분석하지 못한> 관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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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98년~ : 독립협회에서 활동과 <독립정신>

이승만은 자신의 본격적인 정치 입지를 다지고, 존경하는 친미적 경향의 서재필을 본받아 독립협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절영도를 조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등의 글을 쓰고, 서재필의 미국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등 독립협회의 일에 열성적이었고, 만민공동회 활동도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협회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될 때, 이승만이 앞장서서 몸으로 독립협회의 해산을 막고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서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국민들에게 멋있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거두 박영효의 쿠테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24살때부터 6년간이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감옥에 갖힌 이승만은 친미파로서 죄수로서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욱에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어려울 때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 문명국이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미국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그의 사상이 감옥에서 완성된 것이죠. 이후 이승만의 사상은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사상인 <외교독립론>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외국)을 많이 사귀면, 그들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멋있어 보이죠? 그러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든 이유인 세금이나 사회 모순, 지주제도 등의 이야기는 없고, 단지 백성들이 현실을 깨우쳐야 한다, 외국과 친구로서 만나야한다 등의 공상적인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죠.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한 가장 좋은 친구란? <미국>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일본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친일파로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친구인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호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승만은 <친미 기독교주의>로서 자신의 역사관을 고수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의 이 역사관이 일제시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비극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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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04년~ : 미국으로 건너가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죠. 당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열혈적인 독립운동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는 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선교운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많은 독립 외교 활동을 부탁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강화회의에서 상정해달라는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은 것이죠. 그러나, 루즈벨트는 당시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요구는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실제 해낸 일은 없지만, 친미파인 이승만이기에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부탁하면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거두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녕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로,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승만이 가기를 독립운동가들이 원했을 때, 그는 <미국 명문대학 학위를 받아야 국내 활동이 편해지기 때문에> 거부하였습니다. 또, 장인환 등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것 등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미국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적인 외교 활동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할 경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미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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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10년~ :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다.

1910년 공부를 마친 이승만은, 경신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신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와의 계획이 순조롭지 못해 그는 기독교 관련단체인 YMCA의 기독교 교육운동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겠다는 선교가의 마음자세였지, 독립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였습니다. 실제, 그는 반일운동이나 혁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일본 총독부가 오해하면 어쩌나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연구반을 만들고, 반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학과 기독교 정신이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조치가 있자, 그 역시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체포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협조를 얻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망명 갈 때의 신분은 세계감리교 대회 조선 대표였죠.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생복음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선 독립이 아니라, 교회 독립이었죠. 이렇게 다시 떠난 그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연줄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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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21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아먹다.

이렇게 1910년대의 이승만은 실제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친미파로서 당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는것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조선 왕조의 왕족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현장속에 <그가 이상하리 만큼 꼭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립협회의 해산 때 그는 열혈 영웅이었고,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는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했던 영웅이었습니다.

이승만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는 <슈퍼스타>로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여러 가지 타이틀을 확보합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회의의 의장이자, 국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성정부의 대통령이었죠.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 단체들마다 이승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각종 독립운동 단체는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정하고, 이름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따르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고 분열이 됩니다. 당시 신채호, 안창호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의 결사항쟁 및 독립군 육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조와 기독교 정신의 확장을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합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 외교독립론 주장으로 임시정부는 분열되고 맙니다.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론과 이승만을 버리고 다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개조논의 까지 나왔고, 거기에 이승만의 몇 가지 비리가 더해져 이승만은 쫒겨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국 사분오열 되면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잃었고 이 망가진 임시정부를 죽기살기로 수습하여 다시 일으킨 사람은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선생님이 이끌어간 임시정부로, 대통령제가 아닌 주석제 또는 국무령제(장관제도)의 임시정부입니다.

이후 이승만은 계속적으로 외교독립론만을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광복하는 날까지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실세들과 많은 친분을 맺어두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중요한 미국에서 기독교 실세들과의 친분은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죠. 이러한 영향력을 우리 나라의 대대수 독립운동 노선과 연결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펠레의 예언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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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45년~ :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 VS 이승만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승만은 미전략사무국 문관 대령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 때 맥아더와 하지는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그를 협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좌파를 억누르고 친미파의 과도정부를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이승만은 맥아더와 하지에 의해 그 명성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려 졌습니다. 국민들은 이승만이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통합적인 정치행보에 들어갑니다. 그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공산주의자를 싫어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초기에는 <공산주의 경제정책도 채용할 점이 많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밑으로 모인 단체는 친일파의 잔제세력과 극우파인 한민당 세력 뿐이었습니다. 중도좌파와 극좌파는 친미적인 이승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승만의 또하나 아쉬운 점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한민당>이기에 그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을 은근히 반대한 것입니다. 이 점은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고 맙니다.

또, 이승만은 당시 김구 등 중도파들과 함께 미국,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민족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운형등이 세운 <조선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대로 국가가 세워져야 자신이 주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초기에 공산주의와 연대할 수 있다던 이승만이 그 말을 한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자>들로 매도하고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그 시점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처벌과 반민족주의자 처벌을 강도있게 원했고, 여운형 등의 국민대표가 세운 <조선 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을 옹호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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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47년~ : 김구 VS 이승만의 구도

1947년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구와 연합하여 우파의 범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구와 연합한 이승만은 하지 등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 김구를 넘어서게 됩니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중 미국은 이승만을 의장에 선임하고, 김규식과 김구는 부의장과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이 결정에 의의를 가지지 않고, 남북 통일 노선을 추구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남북한이 하나로서 투표하고, 남북한이 통일된 상태에서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약 남북한이 이 상태로 분열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죠.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만이라도 정국이 안정되기를 원했습니다. 거기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이라는 유명한 사건을 일으켜 풍파를 일으킵니다.

이승만은 평소, <남한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수립해야 하므로, 38선 철폐와 자율적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죠.

그런데, 이승만이 말한 자율적 정부 수립이란, 만약 38선이 철폐되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미국이 주장해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특히,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해버립니다.

난리가 났죠.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통일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규식은 이승만과 같은 극우파를 제외해 버린채, 우파와 좌파가 연합하여 남북한 통일을 추진하자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합니다. 이로서 이승만은 왕따를 당하게 되죠.

그러나, 당시 미국은 소련을 적대시하는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 김규식 보다는 이승만을지지하였습니다. 특히, 김구는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자는 통일정부 입장을 내세우는데, 이승만은 남한의 반절정부라도 세우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갈등은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1948년 치루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에 김구와 다수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헌국회의 투표결과 이승만 의장, 신익희, 김동원 부의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헌법제정 후 이승만과 이시영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지만, 이승만이 김구를 배척하면서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지울 수 없는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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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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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점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승만을 이렇게 최악의 인물로 질타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하나 하나의 행적이 역사를 바꾸는 기로에 있는 대단한 인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역사의 흐름을 백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이승만 하면 생각하는 것은 <자유당과 독재>입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인상깊게 남은 정책이 <북진통일>밖에 없습니다.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반대파는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친일파 청산 등의 특별법은 만드는 족족 폐기시키거나, 협박으로 사장시켜 버렸습니다. 토지 개혁은 철저하지 못하여 자원의 평등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선교 중심의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떠오르는 야당 대표 조봉암을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 북한 사주를 받은 자라고 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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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승만은 부정부패가 누적되어 3.15 부정선거 등의 이유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납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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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몇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건국 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적이 그의 잘못된 행적들을 덮어둘 수가 없을 정도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긴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최악의 인물로 이승만을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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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앞부분 1-5장 기술을 위해 인용한 논문
                - 청년기 이승만의 언론, 정치활동, 해외활동, 주진오, 역사비평 1996년 여름본(계간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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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글 :
2007/10/1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2007/06/02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명서(1946)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창당 선언문 (1951년)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조소앙의 <대한독립선언서> 전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기자 체험기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에 대한 해외 신문의 반응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의 정읍 발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혁명 자료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의사
2007/01/13 - [왕조별왕계표/대한민국] - 대한민국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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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1. 1896년 : 독립협회를 발족하고, 독립신문을 만들다.



지난장에서 독립협회가 발족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을 아관파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망국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보통 독립협회하면, 전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민족운동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생긴 것은 사실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들로부터입니다.

독립협회의 초기 맵버는 서재필 등을 비롯한 구미파 세력(친미적 세력, 정동구락부 세력)이 있었고, 또 갑오개혁과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고위관리들도 참여하여 정부 방침이 독립협회에 녹아있었습니다.

독립협회를 1896년 처음 발족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이후, <조선이 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청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초기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핸 <계몽홍보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익광고 협의회라고 할까요?

따라서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거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국가공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에 국가원로인 안경수, 위원장은 당시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이 때는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였죠...), 고문은 미국국적을 가진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의 자주성을 홍보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독립협회 초기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TV같은 것이 없었죠. 따라서 홍보에 적절한 매체로 신문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신문은 백성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글자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신문이 바로 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이 순한글 신문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하나 더 추가 해야 합니다. 순한글 신문이자, 한글, 영문 2개판으로 나온 신문이라는 점이죠. 조선의 자주성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알려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별도의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 1897년 : 고종이 돌아오면서 마찰이 시작되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족했을 때 독립협회는 단순한 <홍보기관, 사교단체, 정부어용기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열강의 이권침탈 실태를 알린다는 정도였죠. 독립협회의 모임은 정부 주도의 소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897년이 고종이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독립협회의 주장과 맞물려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고종은, 강력한 자주권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강력한 나라의 성립은 독립협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성격을 놓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력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중 미국의 공화정 및 일본의 입헌군주정을 경험한 친미, 친일파 출신들은 강력한 왕권이 근대화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법치국가를 만들고, 내각제나 의회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1897년 독립협회는 초기의 독립협회와는 성격이 달라집니다. 독립협회의 위원장인 이완용 등의 친러파들은 탈퇴하고, 서재필 등 친미파, 박영효 등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주도의 정권과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러시아 고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세력보다 비교적 민중적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을 적극활용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우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데 주력하였죠.

그러나, 독립협회는 백성들을 진정한 개혁주체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조차 <백성들은 무식하여 알리고 가르쳐 계도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하였죠. 따라서 신분제가 이미 혁파된 조선사회였음에도, 백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보다는 일단 가르쳐야할 대상들로 파악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인사들은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같은 유산시민 지식인>을 육성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마찰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3. 1898년 :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인사 중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왕(고종황제)과는 달리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성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민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독립신문은 금연광고같은 <계몽홍보신문>을 넘어서서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이념 주장>을 펼치는 장이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환궁했음에도, 계속 우리 내정을 간섭하는 러시아의 알렉시에프 등을 비난하고, 외국세력이 우리 이권을 침탈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합니다.

이 시기의 운동은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통하여 백성들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친미적, 친일적 성향을 가진 서재필, 박영효 등의 외국물을 드신 세력들이었습니다.

4.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자유민권운동

그럼 자유민권운동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자유민권이란, 서양 용어로 <천부인권>을 말합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프랑스 혁명과 영국혁명 등에서 비롯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 사상>을 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였듯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등의 구제도를 타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구처럼 <천부인권>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 천부인권을 홍보하는 수단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신문으로 모자라면 강연회, 토론회 등을 쭈욱~ 열어 자신들의 이상을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백성속으로 들어가 어떤 백성이든 같이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백분토론 같은 이상적 장이 바로 <만민공동회>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만민, 즉 모든 백성의 이야기장인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백정조차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에는 생존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물을 먹은 서재필 박사가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자유를 모두 모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주권>이 됩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에서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이란 <국민평등, 국민주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국민평등권,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소신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참정권>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서구식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대의제도에 따른 국회의원 선출>이죠.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의 최종 결론은 <의회설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의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법치주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대한제국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고종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죠.

자유민권운동의 결과, 서재필은 중추원을 관선국회의원, 민선국회의원으로 내각기관으로 재편합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재추가 모이는 최고 국가 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해진 기관입니다. 중추원이 재신과 추신의 합좌기관으로 고려 이래 최고 기관이었던 만큼, 민선, 관선 의원들의 협의기관으로 딱이었죠.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의 내용

97. 8. 29 : 조선의 급선무인 인민 교육을 실시한다.
   97. 9. 26  :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97. 10. 17 : 인민 교육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97. 12. 19 : 신문을 만들어 인민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
   98. 1. 2 : 관민이 같이 애국해야 한다.
   98. 1. 23 :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광산을 확장해야 한다.
   98. 2. 6 : 수구파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야 한다.
   98. 3. 6 : 우리 국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말자.
   98. 5. 8 : 백성의 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출처 : 누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투스, p113)

5. 만민공동회의 활동 - 2. 자주국권운동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종의 <광무개혁>과 그 본질은 통합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에서 보듯이 그 실현방법에서는 너무나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만민공동회의 노력을 한번 볼까요?

민민공동회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하여 <자주국권운동, 자강혁신운동>이라 칭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자주국권운동은 외세를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만민공동회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온 모든 운동을 포함하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복귀 운동, 열강의 이권탈취 반대운동,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 등의 모든 부국강병 운동을 말합니다. 자주국권운동의 구체적인 예를 몇가지 볼까요?

1.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함
   2.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킴
   3.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음
   4.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고, 영국의 해양 침투를 막음
   5. 미국의 무한정 광산 채굴을 일부 막고, 러시아의 은광 진출을 방어함
   6.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해역에서 토지를 매도하는 것을 막음
   7. 외국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이권을 넘기는 이완용을 영구 제명함
   8. 일본의 철도 부설권 확득 의도와 청의 산림 탈취 의도를 사전에 홍보하고 막으려 함

이러한 자주국권운동은 독립신문에 홍보하는 동시에 만민공동회에서 계속적인 토론과 강연을 함으로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고종환궁요구와 일본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제동을 건 것도 독립협회의 업적이었죠.

그러나, 외세의 압력을 막는 <자주국권운동>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민권을 얻고 자주국가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을 막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서구 열강과 같이 발전해야 다시는 그들이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6.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자강혁신운동

만민공동회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발전과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의회제 설립과 내정개혁>이었습니다.

이 내정 개혁은 국가 체제 자체를 서구식 의회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행정, 교육, 경제, 국방,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서양체제를 도입하여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한 후, 부르조아 계급을 육성하여 국가 지배층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지만, 천부인권이 곧 <모든 백성의 지배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 혁명의 이념은 <천부인권>이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독립협회에서도, 국가발전의 이상적인 방향은 <서구식 사회진화론>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사회진화론은 원래 스펜서가 주장한 것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그대로 역사에 도입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과 우성이 열성을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진화합니다. 강한 동물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좀더 진화하고, 진화하지 못한 동물은 도태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가장 극대화된 진화체가 바로 인간이었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원리이자, 본능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크리스트교 문명을 전파함으로서 약한 나라가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에 의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를 늘리는 <제국주의 이론>이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이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독립협회 뿐 아니라, 초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이 사회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위기는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며, 먹히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독립협회의 지식인들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치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최선을 다하여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치호 일기 -

따라서 조선의 민중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즉적적으로 저항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문명을 좀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서구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는 곧 <프랑스 혁명>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근대주의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근대주의란, <지주, 자산가> 등 유산혁명계급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계몽해야 할 사람들>로 여기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것임에도,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식인층이었고, 광범한 백성들의 실질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여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본 것이죠.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 부르조아적 운동의 공통적인 성향은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하는 <의병운동>을 아직 힘도 없는 어린 애가 생각없이 어른한테 덤비는 무모한 운동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의병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화나게 할 뿐, 자강혁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립협회는 지주와 자산가들이 개화하여 발전한 서양제도를 본받는 것을 표방하였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을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교과서의 입장입니다. 의병운동은 그냥 <의병활동>이라고 하면서, 서양을 본받자는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해서 <애국>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냥 <의병>이고, 지주계급을 지배층으로 만들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운동은 <애국>이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논리를 학자들과 교과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도 서구식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립신문 - 의병들의 활동을 부정하는 글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의 불법한 일을 분히 여겨 일어나사 고을 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인데 불법한 일을 저희들이 행하니 그건 곧 도가 아니다. 도가 없으면 난민인즉, 난민은 법률상에 큰 죄이며 나라에 점점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을 시비하겠으면 나는 법률을 더 밝혀 지키고 행실을 더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전개된 자강혁신운동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업개발을 통해 민간자본을 육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독립협회가 이전 갑신정변과 다른 점은 <우민관>은 탈피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백성들은 <무지한 존재>들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정변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반응에 신경쓰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경쓸 시간도 없었지요. 3일천하였으니.... 그러나, 독립협회는 도시상인, 농민, 노동자로부터 심지어 백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들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이념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며, 갑오개혁 이후 전 백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럼 자강 개혁운동의 몇가지 사례만 들어볼까요?

1.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고, 전 국민을 위한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그것을 위한 재원을 마련한다.
   2. 법치주의를 위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3. 민간자본 육성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서구식 산업제도를 도입한다.
   4. 보수파 내각을 퇴진 시켜 개혁파 내각을 만들고, (이후) 헌의 6조를 채택한다.
   5. 관선과 민선 인원이 동등하게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한다.

7. 98년 3월 만민공동회 vs 10월 관민공동회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는 박영효, 서재필 등 주도세력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주의적인 입장은 고종황제의 전제 왕권 강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안에서는 이러한 법치주의 입장과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박영효, 서재필 등의 법치주의파들은 개화파로 치면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등이 당장 물러가야 하며, 친러파 관리들은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또,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는 내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근대 국가로 인식한 것이죠.

고종은 열받았습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고문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조치 하였고, 박영효 등의 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서재필, 박영효 등은 3월 황제의 명을 반박하고 전국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빠져나간 후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남궁억 등의 새로운 세력은 황제권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가 쫒겨날 수는 없었고, 황제의 개혁 역시 <자강혁신과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독립협회와 일치했으니까요. 윤치호 등의 새로운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화파로 따지면 온건개화파라고 할까요? 이들의 개혁은 <강력한 전제군주 아래 황제권을 옹호하면서 이루어지는 근대화>였죠.

서재필은 반발합니다. 개혁이란, 황제와 관료들 일부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인 부르조아가 모인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개혁핵심인 부르조아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표가 모인 의회에서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서재필 등의 입헌군주파와 정부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입헌파가 고종에게 쓴 소리를 하면, 고종은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온건파는 <독립협회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면서 반년이 흘러갑니다.

7. 98년 연말 : 관민공동회의 개최와 헌의 6조의 발표

98년 10월, 윤치호 등의 전제황제파 독립협회 회원들은 <황제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헌의 6조를 발표하면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 1조의 내용(헌의 6조)

-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할 것 -
①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②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④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⑤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⑥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제 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구성할 것.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권(원)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제 3조

의장은 대황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시고, 의관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에 노고가 있는 자로 선출하시고,
반수는 인민협희에서 27세 이상인이 정치, 법률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것.

제 12조.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하지 못할 것.

독립협회의 온건파들이 주장한 헌의 6조의 내용은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1조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고종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임관을 임명할 때 대신의 뜻을 묻는 다던가하는 조항들이 은근히 속 뜻을 가지고 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치호 등은 의회제도를 원하면서도, 고종황제에게 황제권 강화라는 명분을 확실히 심어주는 타협적인 제시안을 내놓은 것이죠.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 5명을 몰아내고, 중추원의 구성과 재정개혁을 약속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여 본격적인 내각제도가 시행됩니다. 즉, 명분상의 황제권은 절대적이나, 실제 내각이 출범하여 정치를 하는 타협안이 제시된 것이죠.

또, 중추원을 구성할 때 정부관료와 독립협회 인사가 딱 절반씩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립협회의 급진파였던 서재필, 박영효 등도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독립협회의 <내각제도>가 성공한 듯 보였죠. 이 시기를 보통 <독립협회의 참정권 투쟁 성공기>라고 합니다.

중추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송나라 기구였습니다. 고려 시대는 재추가 모이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가 조선 시기에는 무신들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권한은 항상 막강한 기구였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이 중추원의 기능을 모두 상실시켜 중추원은 <내각에 대한 지문 수준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국가최고의 <의회기관>으로 재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끝나면서 중추원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훗날 일제시대 때 이완용 등의 건의로 친일파 어용기구로 다시 살아납니다.

독립협회가 정치에 참여하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민중 계몽기부터 전국적인 지회가 있었고, 회원이 4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 악마 서포터즈가 엄청난 것과 맞먹죠. 거기에 핵심 지도부가 박정양 내각으로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니, 그 위세는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박영효 들이 돌아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포터들을 늘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부의 장관으로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보수파들은 충격에 쉽싸입니다. 독립협회의 의회제도는 기존 관료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협회가 강해지면서 다시 <입헌군주제 및 법치에 의한 통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때문이죠. 보수적 관료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탄압하려 하였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이들 정부 관료들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 테러, 쿠테타 등을 시도합니다.

고종황제는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영효 등의 활동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같은 독립협회의 온건파들도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세력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여론을 주동하는 만민공동회를 혁파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부보상(보부상 : 황국협회)들을 투입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의를 방해하였습니다.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의 간섭으로 만민공동회는 혁파당하고, 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서재필은 추방되고, 박영효는 심문을 받았으며, 온건파인 윤치호는 북쪽 국경쪽으로 관직을 옮겨야 했습니다. 보수파와 성리학자들은 독립협회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였고 결국 독립협회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황국협회와 함께 해산됩니다.

8. 독립협회의 한계점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민족운동인 자주국권운동, 근대화 운동인 자강혁신운동, 민주주의 사상의 발현인 자유민권운동을 표방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기 민족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주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 황제가 실시하고 있던 광무개혁과의 충돌문제입니다. 입헌군주제(내각제도)를 통한 사회개혁과 황제권 절대화를 통한 자주성 확립이 충돌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의 이론에도 많은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일단,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주국권운동은 이완용 등 친러파을 견제하고, 아관파천을 철회하게 하면서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막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서재필, 박영효 등 친미, 친일적 성향의 개혁가였던 만큼, 일본, 미국 등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도움을 많이 얻었던 개혁가였고, 메이지 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여겼던 듯 합니다.

자강혁신운동도 전술했던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논리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의병활동 등을 애들 장난으로 여긴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회진화론 수용이 우리 독립운동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와 함께 우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사회진화론에 맞추어 민족 저항운동을 전개했으니까요.

자유민권운동은 <천부인권사상>등을 조선에 보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서구 <부르조아 유산계급>의 이론에 맞추어 토지를 가진 지주, 경제력을 가진 산업가를 자유민권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실제 토지가 없는 소작인, 차경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은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보호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간히 고종의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이 같은 시기에 언급되고 있죠? 독립협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독립협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고종의 광무개혁을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해 : 글을 적을 때 친일파 박영효, 친미파 서재필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박영효나 서지필이 나라를 매국한 친일, 친미를 했다는 뜻에서 쓴 용어가 아니라, 일본 문화, 미국 사상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 친미파라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쓰는 친러파 신채호, 친중파 김구 등의 용어도 친러, 친중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김구가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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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9) 독립협회 이야기 서론 - 아관파천과 이권침탈

1.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다.

지금까지 1895년의 개혁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을미개혁은 일본의 간섭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정부는 이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대항마>로서 러시아를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친러파로 규정된 민비 왕후가 죽게되고, 고종은 일본의 행태을 점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896년 고종은 왕궁을 버리고 엄상궁의 호위아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일본이 무서웠기 때문이죠. 이 사건을 러시아의 한자 <아>와 공사관의 <관>을 따서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걷잡을 수 없는 주권침해를 당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일본을 무서워해 러시아에 의탁함으로서 조선은 주변 강한 나라들(열강)에게 나라의 중요한 권리들을 빼앗기게 되었죠. 흔히 말하는 <열강의 이권침탈>이 시작된 것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은 <러시아>로부터 비롯됩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철도, 광산, 해안 등을 빼앗기 위해 청, 일본, 서양 등과 다양한 조약을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열심히 러시아를 위해 도장을 찍어야 했죠.

일단 러시아는 일본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 조약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군이 조선과 요동 남부에 머물수 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한다.
  2. 조선의 전신선에 대한 권리는 러시아가 갖는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또, 러시아는 청과도 개별적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1. 청과 러시아는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 군사적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2. 청은 러시아에 동청철도부설권을 주는 대신, 만주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각국과의 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종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며 여러 가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합니다. 요점만 간단히 볼까요?

1. 러시아는 조선 국왕의 안전을 보장한다. 조선의 안녕을 위해 러시아는 군사고문과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돕는다.(재정고문으로 알렉시에프가 오게 되어 감놔라 배놔라를 시작합니다._
   2.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전신선을 연결하며, 그 권리는 러시아에게 있다.

2.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러시아를 비롯하여 청, 일본 등이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면서 조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도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기 시작하죠.

일본은 석탄 창고를 만들어 그곳을 군사기지로 활용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목포를 비롯한 항구들을 차지하고 해안가 토지를 매매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광산에서 은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간, 심장, 폐를 다 떼어주고 만신창이가 되기 시작하였죠.

특히 우리 이권을 빼앗는데 앞장선 나라는 고종을 납치(?)한 러시아와 갑오-을미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고종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권을 빼앗아갔다면, 일본은 철도와 광산권을 빼앗아가는데 주력합니다.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원했던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상품을 탈취하고, 대륙으로 군을 수송하여 앞으로 있을 동아시아 군사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는 자신이 있었죠. 따라서 일본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 것은 자국의 제국주의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본체제가 <식민지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다시 식민지에 제품을 비싸게 파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은 철도 등 운송체계와 군 수송체계가 원할해야 가능했으니까요.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돈을 주고 샀으며, 훗날 러일전쟁으로 경의철도 부설권도 러시아로부터 빼앗아옵니다.

한편, 러시아나 일본보다 대 조선 정책의 후발주자인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합니다. <기회균등의 원리>란, 서구열강들이 중국(청)의 이권을 빼앗아갈 때 논의하여 협의한 정책이었습니다. 쉽게말하면, 중국이라는 큰 빵이 있는데 누구 한명이 그 큰 빵을 독식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빵을 똑같이 잘라 나눠먹어야 한다는 논리죠. 이 논리는 아시아에 비교적 영향력이 적은 미국이 주도하여 힘으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상대적으로 러시아, 일본 등 아시아계 제국주의 국가에게 열세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주장을 함으로서 조선은 러시아, 일본 + 서양, 구미 세력에게 골고루 이권을 침탈당했던 것입니다.

이 이권 침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농업, 수산업, 광업 등의 기초 산업이 망가지고,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민족 자본이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민족자본이 없다면, 국내 산업은 외국의 차관에 의해 넘어가게 되고 결국 경제적 식민지 상태가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따라서 이러한 열강의 이권침탈에 분개하여 민족 자본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형성한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가장 큰 주장은 아관파천에 의해 자행된 만행에 대한 반발입니다. 독립협회 초기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자주적 국권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2. 러시아 등의 열강은 이권침탈을 멈추어야 한다.
   3. 서양에 뒤지지 않는 의회와 관제를 마련하여 그들이 넘볼 수 없다록 해야 한다.

자, 그럼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독립협회가 어떤 단체인지 본격적으로 들어가봅시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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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1. 을미개혁의 배경

을미개혁을 이야기 하려면 1894년의 정세부터 다시 짚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1894년의 정세를 이야기해 볼까요?

1894년 청일전쟁으로 1,2차 개혁을 주도하려했던 일본의 의도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못하였고, 전쟁 후에는 삼국간섭에 의해 러시아 세력에 밀리게 되었죠. 또 조선 내부에서도 일본이 너무한다라는 의견이 대두하였고, 그 결과 2차 개혁의 핵심인물로서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박영효가 쿠테타 혐의로 축출되었습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라이벌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일본을 몰아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의 왕비 민씨는 고종을 설득하여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이 조선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한 사실에 민씨 정권은 한을 품은 것이지요.

조선은 러시아에 접근하기 위해 박영효 등 친일파 개혁 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로 구성된 정부를 구상합니다. 그 핵심인물이 <이완용, 이범진>이었습니다.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은 친일파라고 해도 어느 정도 조선의 개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소신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완용 등의 인물은 시류에 따라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친러파, 친미파, 친일파를 두루 섭렵했으니까요. (뒷장에 나오는 독립협회 초기의 핵심간부가 이완용이라는 사실도 아시나요?)

조선이 러시아와 친해지고, 민씨가 일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자 일본은 낭인들과 친일 군부를 동원하여 민씨 왕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 사변 이후, 일본은 이제 일본의 의도대로 조선의 3차 개혁을 실시하는데 이 개혁이 바로 을미개혁이죠.

2. 을미개혁의 내용

을미개혁은 1,2차 갑오개혁의 연장입니다. 단, 1차 갑오개혁이 대원군 세력과 동도서기 계열의 어윤중이 주도하였다면, 2차 개혁은 김홍집 내각의 박영효 등 친일적 성향의 개혁파가 주도하였습니다. 3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1, 2, 3차 개혁은 모두 일관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관적인 틀은 일본이 개혁에 적극 간섭하려고 하였지만, 각각의 상황에 의해 원한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조선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근대화를 추구하였지만 근대화의 기본 틀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요구한 개혁안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차 개혁이 수백개의 개혁안을 쏟아내어 정신없는 개혁이었다면, 2차 개혁은 1차 개혁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고, 중앙, 지방, 사법, 교육 관제를 정비한 개혁이었습니다.

그럼 3차 개혁은? 관제를 넘어서서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단, 개혁의 첫 번째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입니다. 이 개혁이 추진된 1895년 이전에는 음력으로, 이 개혁 이후의 연도는 양력으로 표시합니다. 따라서 이 태양력 사용을 놓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근대적 연대표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연표 표기가 바뀌었다는 것 뿐 역사적으로 태양력 사용이 아주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난리를 쳐서 사라졌던 우정국(우체국)이 부활되어 우편사무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또, 천연두 예방접종인 종두법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용된 연호는 <건양>이었는데,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라는 연호로 바꾸게 됩니다.

3. 단발령을 내리다.

을미개혁에서 실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개혁내용은 <단발령>입니다. 머리를 깎으라는 내용이죠. 단발령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어머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깍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도 일본놈들이 바꾼 법 때문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양반들에게 큰 치욕이었습니다.

사극을 보면 귀하신 마님들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죠? 가채라고 하는 그 엄청난 무게의 말아올린 머리는 양반집 규수의 상징이었습니다. 야사에 보면, 그 머리무게를 못이기면서도 품위 때문에 그 머리를 유지하다가 목이 꺽여 돌아가신 할마마마 이야기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머리는 농사짓고 장사해야할 일반 아낙의 머리는 아니죠. 양반댁 규수들도 과연 그 머리를 깎지 않고 평생 유지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반집 남자들은 상투를 틀죠. 조상님이 주신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하여 머리를 묶었다고 하지만, 에어콘도 없는 여름날 어떻게 보냈을까요? 실제, 양반들도 잔머리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주변머리만 남기고, 가운데 머리를 깎아 버리면 시원하겠죠? 그런 다음에 주변 머리를 깍아 버린 가운데 머리로 올려 묶습니다. 이렇게 상투를 틀면 머리를 깎은 티도 나지 않고, 조금은 시원한 맛을 느끼면서 체통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단, 티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편법을 쓰지 않은 모범적인(?) 양반들이 더 많았구요. 하지만, 득실대는 이는 알아서 처리해야겠죠.

단발령이 중요한 이유는 <신체는 부모가 주셨고,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양반들의 명분을 자극했다는 점입니다. 최익현은 상소를 올리고, <머리를 베어도 머리카락을 벨 순 없다>고 단발을 거부하였고, 성균관 학생들을 비롯한 생원, 진사 등 양반 유생들은 <머리를 치기 전에 일본을 쳐 없애자는> 의병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의병운동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을미개혁(단발령)으로 일어난 을미년 3종 세트인 을미 의병입니다.

을미의병 자체가 단발령 같은 양반들의 문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당시 의병은 <양반중심>의 의병이었습니다. 의병장도 유인석, 이소응 등 양반출신이었죠. 실제, 농민들은 단발령 같은 것으로 의병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일본 자체가 싫은 것이고, 그 이유는 일본이 쌀 등 곡물을 강탈하기 때문이지 머리카락 때문은 아니였거든요.

4. 개혁 3종 세트의 공통된 결과

갑오년 1차 개혁부터 을미년 3차개혁까지 3번의 개혁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왕을 제외한 모두가 왕권 약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침략을 위해 조선의 국왕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 고종의 힘을 축소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혁파 신료들도 이 점에 공감하였습니다. 당시의 근대화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입헌이라는 말에서 왕도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군주가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권한이 <의회중심>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강화하는 <내각제>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개혁 자체에서 조선의 국왕은 제외되었습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에서, 2차 개혁 이후는 김홍집 내각에서 개혁을 주도하였죠. 이것은 서구 근대사회의 유물은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서구란, 서양에 의해 개화된 일본 관료제 모델을 말합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국왕권이 약화되면서 <시민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이래 계속된 <부르조아 또는 젠트리 위주의 자본주의>를 조선 개혁가들이 꿈꾸었던 것이죠. 대표적인 부르조아 개혁이 <갑신정변>입니다. 김옥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였죠.

갑오개혁 역시 부르조아적 개혁을 표방하였습니다. 조세 금납화와 일원화는 상업 자본주의를, 신분제 폐지와 과거제 폐지는 근대적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죠. 단, 일본의 군사적 의도가 개입되어 군제개혁은 미흡하였습니다.

갑오개혁이 생각한 부르조아 개혁의 핵심은 <지주계층을 토지 자본가로 육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혁이란,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핵심 계층이 필요한데, 그 계층을 토지를 가진 지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해야한다>는 원리를 무시합니다. 토지는 자본을 가진 <지주>의 것이며,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동학에서 요구한 토지개혁을 빠져있습니다. 포함된 것은 부세 개혁정도이죠.

갑오개혁은 영국식 자유무역체제 도입, 조세제도 정비, 신분제도 철폐, 지주제도의 발전 등을 통한 체제 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권의 약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죠.

5. 근대화 개혁의 한계점

갑오년, 을미년의 개혁은 3가지 측면에서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개혁이 일본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실시한 1차 개혁 이래 일본의 입김이 계속 작용하였고, 독자적인 개혁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의 내용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기에 딱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개혁이 지주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개혁의 기본 방향이 농민층보다 지주층을 옹호하고, 지주층의 발전을 통한 근대적 자본주의 확립에 중점을 주었습니다. 농민이 요구한 토지개혁은 싹~ 사라지고, 대부분의 개혁 내용이 국가체제,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이었죠. 동학 등 일련의 사태 속에서 농민들이 쟁취한 신분제 폐지 등의 개혁의 내용도 결국 근대화를 위한 필연적 요소였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이 개혁에 대해 국민적 지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에 대해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던가, 개혁의 내용이 실제 국민들의 이해관계에 절실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의문이 많았습니다. 물론, 신분제 폐지 하나만으로도 좋아할 백성들이 있었지만, 실제 양반-농민간, 지주-전호간에는 신분제 폐지에 따른 신분 변화가 크지 않았습니다. 신분상 평등하지만, 소작농이 양반지주와 겸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농민들이 혁명으로 이룬 개혁이 아니라, 지배층의 자의적인 개혁안이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에게 절실히 와 닿지 못한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점은 군제개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를 모델로 했기 때문에 서양식 근대화의 핵심인 관료제도, 상비군의 정비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개혁이 소홀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간섭한 개혁인 만큼, 우리 국방력의 강화가 일본의 이해관계와 반비례했기 때문입니다. 갑오, 을미년의 개혁으로 조선의 군대는 오히려 친위대 수준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조선의 군제 개혁은 훗날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서 대대적으로 개편됩니다.

갑오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혁이 지속되지 않고, 미완의 상태로 중단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혁도 법하나 만들고, 조칙 몇 개 내리고 끝나지 않습니다. 수년, 수십년을 계속해서 보완하고, 수정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을미사변으로 민비왕후가 죽은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일본을 피해버림으로서 중단되었습니다.

즉, 수백개의 법을 만들어 놓고, 국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1년 몇 개월 동안 법령과 몇가지 세부사항만을 남긴채 종료되어 버렸습니다.

과거제는 폐지되었으나, 과거를 대신할 근대식 학제는 학교 몇 개 만들고 사범학교 만드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조세의 금납화가 되었으나, 세밀한 조세 항목은 미흡했습니다. 군제개혁은 흐지부지하고 을미의병으로 국가 치안은 어수선했습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양반이 평민들을 하대하지 못할 강력한 제재는 없었습니다.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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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1. 1894년...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갑오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에 1, 2차 개혁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3차로 을미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럼 이 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을 한번 볼까요?

갑오개혁은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자율성론>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진했다는 <타율성론>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 나중에 다루고 이번 장에서는 이 2가지를 적절히 다루어 보도록 하죠.

갑오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개혁의지가 1894년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세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많은 개화파가 죽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화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김옥균같은 <급진적 개화파>는 실패하였지만, 고종과 일부 개화파들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조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대내외의 새로운 사상을 알렸고, 최초의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웠습니다. 서양식 군사훈련을 위한 연무공원,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 근대적 진신시설을 위한 전신국이 창설되었죠.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고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 러시아, 일본 등에서 파견한 고문은 침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먼저 빼앗긴 종교 입지를 찾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포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원래 종교란, 순수한 목적으로 포교를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포교를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정치, 경제적 침투를 하려 하였고, 조선은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우리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였던 청에게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주미 대사의 이름은? 훗날 독립협회의 헌의 6조로 유명해진 박정양입니다. 우리 정부는 청을 견재하기 위해 조러 비밀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반대로 조러 비밀 협약은 실패하였고,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은 소환당하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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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가운데)

2. 개혁의 불씨를 당긴 동학농민운동

조선은 점진적으로 개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에게 둘러싸여 힘이 없었고, 조선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힘을 조금씩 빌려 조금씩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하는 중이었죠.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혁이었고, 이 개혁이 과연 백성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의문이었죠.

학교를 세웠지만 양반자제들의 학교였고, 군대를 개편했지만 농민들과는 상관없는 군대였습니다. 농민들이 원한건 잡세를 없애고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가지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겠다던 명분으로 출병한 청과 일본은 동학과 정부가 정부화약을 맺고 대립을 끝냈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에 더 이상 머물 명분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개혁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이 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히기 위함이었죠.

정부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의 요구가 포함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일본군의 내정 간섭 과정을 자세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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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알연하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쓰케 :
조선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일본의 입맛대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과정과 목적

동학농민과정에서 전주화약으로 조선과 농민군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을 잡기 위해 늑대를 불렀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순순히 물러날리 없죠. 일본군은 바로 서울로 쳐들어와서 떡 하니 서울 한복판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청, 일본 양국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죠. 청나라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이것을 거부합니다.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일본이 조선 개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일본이 작성한 내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군이 먼저 물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내정 개혁에 대한 1,2차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의 목적이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조선 스스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3차 회담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검은 속셈을 드러냅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용하여 바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민씨 정권은 축출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수아비 정권으로 다시 들어섰으며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들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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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김홍집과 어윤중

여기서 친일적인 성향이란,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개화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경력이 있었던 지식인들을 개혁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갑오년에 일어난 이 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 내각의 개혁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는 국왕권마저도 초월하는 초법적 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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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군국기무처(교과서 그림)

그럼 왜,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열을 올렸을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었다.

갑오년에 실시한 1차 조선 개혁은 일본이 주도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간섭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1차, 2차 전쟁 사이에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시작인 일본의 압력이 작용하였지만, 실제 개혁은 조선의 개화파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를 몇가지 적절히 섞어서 조선식 개화를 추진하였는데,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한번 일본의 요구대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갑오년 2차 개혁입니다. 2차 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볼 수 있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황제국가체제(영국은 여왕 중심체제였고, 일본은 천황중심체제였음)에서 일부 모방하였는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구실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역시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것이 당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순전히 일본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을 개혁의 내용에 우선적으로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1차 개혁, 2차 개혁, 3차 개혁의 내용을 차례로 포스팅하고 갑오을미개혁의 논쟁점들을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죠. 오늘 서론이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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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아관파천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쓴 고종의 친서

- 러시아 공사관 이동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 -

지난 해 9월부터 방역 도배들이 집요하게 나를 압박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단발령으로 일어난 전국적 시위의 혼란을 틈타 나와 내 아들을 살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나는 내 아들과 함께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러시아 공관에서 보호받기를 바란다. 나를 구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란 없다. 나는 두 공사가 나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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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고 자신의 몸마저 지킬 수 없는 고종의 절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거처를 옮길 경우, 러시아에 의해 심한 내정을 받게 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질 것을 고종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의 장래보다는 당장 죽음이 임박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종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고종도 격변기에 살았던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 그 자신이 실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림 :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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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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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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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박성춘의 관민 공동회 연설문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 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 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참고글 : 독립협회가 광범한 사회계층이 참여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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