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세계사 1

'사극이 역사를 대신하잖아!'

사람들은 역사를 진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란 있었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과거를 아는 사람은 없다. 역사를 변신로봇처럼 조립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1장. 12년동안 만두만 먹으면서 자란 아이들.

지금부터 일기를 쓰듯이 풀어서 역사를 조잘조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책이나 뭔가 보면 그럴듯한 서문들을 앞에 적어 놓잖아. 나도 뭐 그럴 듯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뭐 폼나는 거 없을까?

생각해보니깐 인터넷으로 역사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 자유로운 일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나 기분나쁘면 반박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난 그동안 너무 딱딱하게 샌님처럼 글을 적은 것 같군.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는군. 누구나 한번쯤 겪은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T(샘) : 자... 공부했으니 확인해야지?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우리) : 저기 선생님... 얼마전에 가야도 배웠으니까 사국통일 아닐까요?

T : 그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 말야.. 신라가 통일한 시기를 말하는 거잖아.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 : 저기 당나라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있다고 적혀있어요?

T : 그래서 대학 안갈래? 꼭 너같은 애들 땜에 진도도 안나가고 수업이 안드로메다... 아니 당나라로 날아가잖아. 당나라를 물리쳤으니깐 자주적인 통일이고, 대동강 이남만 통일했으니깐 한계가 있는 통일이죠?

S : 저기요... 진흥왕 때 세운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훨씬 위쪽인데.... 통일하면서 영토가 더 아래로 내려와요?

T : 그래서??? 고구려, 백제가 안 망했니?

S : 저기 발해가 건국되서 남북국이라면서요... 근데 왜 통일이에요? 발해는 남의 나라인가요?

T : 너.... <교과서> 공부는 안하고 뭔 생각만 계속 하는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결국 교과서에 적혀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진리가 되는 역사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넓혀주려고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건 교과서에 적힌 한줄의 딱딱한 문구 뿐이다.

그래놓고도 교과서는 뻔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 첫장을 보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사를 배운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 수능에 나온다는데, 교과서를 벗어난 사고력이 대한민국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 문득 갑자기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난다. 감옥에 갇혀 15년간 만두만 먹은 그 수염긴 파이터.... 우린 그넘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다. 초, 중, 고, 대학.... 15년간 똑같은 내용의 역사책만 배운 우리... 갑자기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난 대한민국의 역사선생님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 역시 참교육을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다. 그러나,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제도 아래 존재하시는 모든 분들은 <교과서>를 벗어난 역사를 말할 수도 없고, 수능에 안나오는 변두리 역사를 말할수록 유능함에서 멀어지며, 교과서보다 더 깊고 심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장. 역사엔 자기주도학습이 없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교과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교과서를 만든 그 분들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그 분들이다. 교과서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T :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까요? 의병항쟁은 총, 칼을 들고 무력으로 일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일본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죠. 안창호, 이승훈 선생님등이 이끈 신민회를 배워볼까요?

S : 저기 의병항쟁은 나쁜거고, 애국계몽운동은 좋은 거에요?

T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S : 저기... 의병항쟁은 애국의병항쟁이 아니라 그냥 의병항쟁이구... 계몽운동만 애국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럼 의병들이 칼들고 일본이랑 싸운건 무식한 짓이고, 교육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만 애국인가요?

T : ... 그런건 시험에 안나온다.

교과서의 곳곳에는 이런 함정들이 숨어있다. 의병항쟁은 단순히 일본에 저항했던 사건들과 전투들을 나열한 뒤 그 의의만을 적어두지만, 계몽운동은 그 단체들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었으며,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학생들은 교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주입받게 된다.

그래.. 역사를 적는 이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으며, 역사는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미리 만들어 과거를 <칼질>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생각해본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미리 생각해놓고 책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이다. 그 책을 읽으면 누굴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먼저 만들어 놓았는가?>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이고 과거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라는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인지를 폼나게 글로 남겨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할 일이시다. 우리는 그냥.... 필요한 관심있는 역사를 골라 있고 그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고, 똥을 싸질러놓기도 하고, 반짝반짝 닦아서 아우라를 펼쳐내기도 하고.... 그냥 걍 읽는 사람 맘이다. 그리고 그것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역사는 백명이 책을 읽을 때 백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한명이 글을 적을 때마다 한 개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를, 역사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다양성이란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역사 연구가들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맘대로 역사를 적을 때, 누군가 뭐라 한다면 이렇게 당당헤게 외치면서 글을 적어야겠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 돌을 던져라.... 가 아니라 <저기요.. 과거 사실을 다 아시는 분만,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분필을 던져주세요...> 라구... 공손하게..... ㅋㅋ

3장. 사극이 뒤바꿔놓은 역사에 대한 관심

예전 사극을 보면, 교과서 한단원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왕 : 아니... 사태가 이런데 경들은 진정 생각이 없는 것이요?

신하 1 : 폐하.... 그래도 아니될 일이옵니다. 한나라의... 어쩌구 저쩌구...

신하 2 : 신 영의정 따발총 아뢰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 이고.... 이니.... 해서.....

신하 3 : 신 좌의정 반대파 아뢰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 하니..... 하옵고.... 그게....

예전 사극의 제작비는 작가가 다 가져갔을 듯 싶다. 걍 왕이 한마디 지껄이면, 신하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며 상황 설명을 다 해준다. 시대 배경부터, 사건의 핵심 개요와 대처 방법, 이후에 해야할 일을 대본 3천자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작가님들 파이팅~~~~

그런데 말이지.... 대장금 주몽이라는 사극이 나오면서 국민들은, 교과서처럼 요약해서 목소리 톤 높은 남자 성우가 나레이션으로 때우는 사극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우.... 재까짓게 아무리 목소리 짱이라고 해도, 얼짱인 송일국이나, 여신 이영애를 어찌해보겠어?

국민들은 대사 길이가 3분 분량만 넘어가도 채널을 돌리는 시대가 왔다. 일단 칼부림 몇 번 해서 채널 안돌아가게 만든 뒤, 주인공이 직접 몸으로 다 때워서 작가의 대본량을 팍팍 줄여준다. 주인공은 레벨 1짜리 겁쟁이 주몽으로 출발해서 해모수의 기를 좀 받고, 모팔모에게 철제 아이템을 좀 받은 뒤, 소금산이나 주변국 등 스테이지 1,2,3를 모두 클리어 해야 한다. 고대 설화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듯, 온라인 게임의 레벨업을 마친 주몽은 만랩 파이터 대소와 자웅을 겨룬다. 이것이 현대 역사물이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비판하는 작업을 더 즐거워한다.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누군가가 갑자기 <노사분규와 청년실업, 사교육조차 없는 고대 쁘레땅 뿌르국>이 진짜 있었다....라고 해도 쉽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던가.... 교과서보다 자 자세한 역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그 작업을 격식없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너무 거칠게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인터넷에 올라온 주관적인 모든 글들을 비판하면서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지금부터 적는 글들은 때로는 너무나 유치해서, 때로는 너무나 황당해서, 때로는 너무나 전문적이여서 비판하기도 힘든 그런 내용들이 적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이건 너무 어렵고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글이기에 판단은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내가 무슨 역사 전 영역을 통달한 전문가도 아니구... 그냥 있는 사실들을 주관적으로 풀어서 적을 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나....

http://historia.tistory.com/

제 글은 퍼가실 수 있도록 설정해두었습니다. 글을 퍼가실 때에는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낙서 세계사 (1)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돌을 던져라~

1. 아... 교과서같은 역사여~~~

지금부터 일기를 쓰듯이 풀어서 역사를 조잘조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책이나 뭔가 보면 그럴듯한 서문들을 앞에 적어 놓잖아. 나도 뭐 그럴 듯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뭐 폼나는 거 없을까?

생각해보니깐 인터넷으로 역사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 자유로운 일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나 기분나쁘면 반박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난 그동안 너무 딱딱하게 샌님처럼 글을 적은 것 같아.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는군. 누구나 한번쯤 겪은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아침 화장실의 똥>같은 이야기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T(샘) : 자... 공부했으니 확인해야지?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우리) : 저기 선생님... 얼마전에 가야도 배웠으니까 사국통일 아닐까요?

T : 그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 말야.. 신라가 통일한 시기를 말하는 거잖아.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 : 저기 당나라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있다고 적혀있어요?

T : 그래서 대학 안갈래? 꼭 너같은 애들 땜에 진도도 안나가고 수업이 안드로메다... 아니 당나라로 날아가잖아. 당나라를 물리쳤으니깐 자주적인 통일이고, 대동강 이남만 통일했으니깐 한계가 있는 통일이죠?

S : 저기요... 진흥왕 때 세운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훨씬 위쪽인데.... 통일하면서 영토가 더 아래로 내려와요?

T : 그래서??? 고구려, 백제가 안 망했니?

S : 저기 발해가 건국되서 남북국이라면서요... 근데 왜 통일이에요? 발해는 남의 나라인가요?

T : 너.... <교과서> 공부는 안하고 뭔 생각만 계속 하는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결국 교과서에 적혀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진리가 되는 역사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넓혀주려고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건 교과서에 적힌 한줄의 딱딱한 문구 뿐이다.

그래놓고도 교과서는 뻔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 첫장을 보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사를 배운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 수능에 나온다는데, 교과서를 벗어난 사고력이 대한민국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 문득 갑자기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난다. 감옥에 갇혀 15년간 만두만 먹은 그 수염긴 파이터.... 우린 그넘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다. 초, 중, 고, 대학.... 15년간 똑같은 내용의 역사책만 배운 우리... 갑자기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난 대한민국의 역사선생님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 역시 참교육을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다. 그러나,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제도 아래 존재하시는 모든 분들은 <교과서>를 벗어난 역사를 말할 수도 없고, 수능에 안나오는 변두리 역사를 말할수록 유능함에서 멀어지며, 교과서보다 더 깊고 심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내게 돌을 던져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교과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교과서를 만든 그 분들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그 분들이다. 교과서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T :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까요? 의병항쟁은 총, 칼을 들고 무력으로 일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일본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죠. 안창호, 이승훈 선생님등이 이끈 신민회를 배워볼까요?

S : 저기 의병항쟁은 나쁜거고, 애국계몽운동은 좋은 거에요?

T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S : 저기... 의병항쟁은 애국의병항쟁이 아니라 그냥 의병항쟁이구... 계몽운동만 애국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럼 의병들이 칼들고 일본이랑 싸운건 무식한 짓이고, 교육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만 애국인가요?

T : 잉... 그런가?

교과서의 곳곳에는 이런 함정들이 숨어있다. 의병항쟁은 단순히 일본에 저항했던 사건들과 전투들을 나열한 뒤 그 의의만을 적어두지만, 계몽운동은 그 단체들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었으며,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학생들은 교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주입받게 된다.

그래.. 역사를 적는 이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으며, 역사는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미리 만들어 과거를 <칼질>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생각해본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미리 생각해놓고 책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이다. 그 책을 읽으면 누굴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먼저 만들어 놓았는가?>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이고 과거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라는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인지를 폼나게 글로 남겨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할 일이시다. 우리는 그냥.... 필요한 관심있는 역사를 골라 있고 그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고, 똥을 싸질러놓기도 하고, 반짝반짝 닦아서 아우라를 펼쳐내기도 하고.... 그냥 걍 읽는 사람 맘이다. 그리고 그 짓저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역사는 백명이 책을 읽을 때 백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한명이 글을 적을 때마다 한 개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를, 역사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다양성이란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역사 연구가들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맘대로 역사를 적을 때, 누군가 뭐라 한다면 이렇게 당당헤게 외치면서 글을 적어야겠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 돌을 던져라.... 가 아니라 <저기요.. 과거 사실을 다 아시는 분만,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분필을 던져주세요...> 라구... 공손하게..... ㅋㅋ

3. 역사는 안드로메다로 가도...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가 된다.

예전 사극을 보면, 교과서 한단원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왕 : 아니... 사태가 이런데 경들은 진정 생각이 없는 것이요?

신하 1 : 폐하.... 그래도 아니될 일이옵니다. 한나라의... 어쩌구 저쩌구...

신하 2 : 신 영의정 따발총 아뢰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 이고.... 이니.... 해서.....

신하 3 : 신 좌의정 반대파 아뢰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 하니..... 하옵고.... 그게....

예전 사극의 제작비는 작가가 다 가져갔을 듯 싶다. 걍 왕이 한마디 지껄이면, 신하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며 상황 설명을 다 해준다. 시대 배경부터, 사건의 핵심 개요와 대처 방법, 이후에 해야할 일을 대본 3천자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작가님들 파이팅~~~~

그런데 말이지.... 대장금과 주몽이라는 사극이 나오면서 국민들은, 교과서처럼 요약해서 목소리 톤 높은 남자 성우가 나레이션으로 때우는 사극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우.... 재까짓게 아무리 목소리 짱이라고 해도, 얼짱인 송일국이나, 여신 이영애를 어찌해보겠어?

국민들은 대사 길이가 3분 분량만 넘어가도 채널을 돌리는 시대가 왔다. 일단 칼부림 몇 번 해서 채널 안돌아가게 만든 뒤, 주인공이 직접 몸으로 다 때워서 작가의 대본량을 팍팍 줄여준다. 주인공은 레벨 1짜리 겁쟁이 주몽으로 출발해서 해모수의 기를 좀 받고, 모팔모에게 철제 아이템을 좀 받은 뒤, 소금산이나 주변국 등 스테이지 1,2,3를 모두 클리어 해야 한다. 고대 설화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듯, 온라인 게임의 레벨업을 마친 주몽은 만랩 파이터 대소와 자웅을 겨룬다. 이것이 현대 역사물이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비판하는 작업을 더 즐거워한다.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누군가가 갑자기 <미친소와 노사분규, 청년실업과 사교육이 없는 쁘레땅 뿌르국>이 진짜 있었다....라고 해도 쉽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던가.... 교과서보다 자 자세한 역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그 작업을 격식없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너무 거칠게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인터넷에 올라온 주관적인 모든 글들을 비판하면서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지금부터 적는 글들은 때로는 너무나 유치해서, 때로는 너무나 황당해서, 때로는 너무나 전문적이여서 비판하기도 힘든 그런 내용들이 적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이건 너무 어렵고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글이기에 판단은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내가 무슨 역사 전 영역을 통달한 전문가도 아니구... 그냥 일기처럼 쓰고 싶은 내용을 적을 뿐이다. 일단 개념은 안드로메다에 보내고.... 나름 적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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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5)

왜, 교과서는 무적이 되야 하는 것일까?

1. 교과서의 절대성

오늘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많은 교사들이 포스트모던의 철학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입시를 위한 역사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입시에 강한 역사 교사가 우대받는 공교육에서 어떻게 <교과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역사 철학은 공교육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7차 한국사, 세계사 교과서의 첫 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발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쌓게 되며,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이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흔히 <역사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한단원을 지난 후에는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고력>은 변질된다. 단순한 사료들을 나열해놓고, 그 사료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해답은 교과서가 원하는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정답이 곧 수능에서의 답이 된다.

교과서의 어투는 전혀 <사고력>를 키울 수 없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는 <A는 B라는 계층이 주도해서 C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과거의 사건이다>는 식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미 정해진 문장에 답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해답을 찾아내란 말인가?

한국의 공교육에서 교과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쉬운 표현으로 압축해서 적어놓은 것이며, 학생들은 그것을 비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교사들은 교과서를 더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역사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제시하여 학생들을 <이해>시킨다.

결국, 학생들은 역사 수업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교과서를 읽고 나면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 중에서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간추려놓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역사가들은 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역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과서는 철저히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를 적은 이가 누구인지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교과서는 가장 객관적인 말투로만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비판할 수도 없지만, 비판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고, 과거의 중요한 사실들을 알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걸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부터 읽히는 공교육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으로 역사를 읽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2. 지식의 독점

교과서의 절대성에 대한 근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 성과를 검증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학회>일 뿐이며, 그들의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7차 국사 교과서를 보자. 신라의 중앙집권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내물왕때 시작되어,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태조왕때 시작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역사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중앙집권>이란 말 자체가 편의상 역사를 규정하는 <연구가>들의 분류일 뿐이다. 각국의 역사는 독특힌 발전과정을 겪었다. 신라의 통일 얼마전 까지도 가야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4국시대라는 말을 쓰지 않고 3국의 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 기술하면서도, 삼국통일이 자주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모순을 남기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노론 지배층은 교과서에서 상당히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강조되어 있지만, 왕조 실록이나 관찬 사서에 그런 기록은 없다. 송시열이 청나라 정벌을 위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송시열은 실제로 내치주의(국내 안정)를 주장했다.

교과서는 실학의 주체로 <서울 근기에 사는 노론 자제>들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실학의 주요 인물이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얼을 포함한 정조의 규장각 출신들, 강화학파의 인물들, 성호학파의 인물들이다.  집권 노론파 자제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말 노론의 지배층이었던 역사가들은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 사회의 명성있는 교수님들이 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연구 성과를 우리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트모던 역사 교육은 <과거의 지식에 대한 독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독점을 비판하는 학문을 지식사회학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이 누구인가?>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고, 과거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들을 확보한 뒤, 그 과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0개의 과거를 10명이 학습한다면, 100개의 과거가 창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독점한 자>들은 단 1개의 역사만을 진리인 양 포장한 뒤 나머지 과거들은 <근거없는 논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물이 교과서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보자.

모나리자의 그림이 있다. <다빈치>가 어떤 의도로 모나리자를 그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미소의 각도와 색감, 원근법 등을 차례로 감상한다. 10명이 감상했다면, 그들은 각기 다른 감상평을 내 놓고, 그림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모나리자에 단 하나의 감상평만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사료들을 교과서에 던져 놓고서도, 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첫째, 둘째, 셋째로 규정되어 있다. 삼국통일의 의의는 공부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인데도, 왜 3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만이 <진리>로 규정되야 하는가?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후 당나라를 몰아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통일이다 라는 것만이 진리인 양 규정해 놓고, 발해의 건국으로 실제로는 남북국시대였다는 기술은 또 무엇인가?

포스트모던은 역사가의 <상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따지게 된다. 그 결과, 역사를 규정해 놓은 지배집단에 대한 비판이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다.

3. 다양성에 대한 <교육>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역사는 <교실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교사가 교과서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교실은 교사의 귄위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높은 지적 귄위로 학생들을 압박한다.

역사가들은 스스로의 이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회 토론을 통해 <논리적인 헛점>을 최대한 줄인 내용들을 교과서에 적어 두었다. 그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들을 교사가 설명할 때,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 내용이 좀 이상하긴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교사가 아이들의 사고력을 끌어낸다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결국 교사가 원하는 것은 <교과서>와 입시에 합당한 정답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고력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교사는 역사를 만든 지배집단의 충실한 대변인이 된다. 역사가들의 이론을 가장 쉽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기능인이 역사 교사일 수 밖에 없다.

역사교사는 교과서의 역사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고 규정한 서양의 시대 구분법이 아직도 교과서의 시대 구분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한국의 교사는 다른 대안으로 시대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리스 신화는 청소년 필독도서이지만, 단군 신화를 다르게 해석한 책들은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상호 토론이 가능한 웹 2.0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마음 껏 써내려가지만, 교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입시에 필요한 역사적 지식만을 강제로 주입받는다. 웹 공간에서의 주장이 교실에서의 질문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사극을 보면서 수백개씩 글을 쓰고, 댓글을 달면서 토론하던 그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경직된 교실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교육의 목적 안에 <역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주면서 교사 자체가 권위를 버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사고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과거를 연구한 누군가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며, 새로운 발견이 있거나,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15세기 서유럽의 <대항해시대>를 몇몇 원인으로 규정한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고립감, 왕자들의 모험심, 향료 무역을 통한 차액 증가, 나침반의 유입 등등...

   그러나 우리 교과서와 달리 서양의 학자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당시 흑사병 이후 유럽의 경제난이 심각했으며, 서양 사람들에게 꼭 필요했던 대구, 참치, 고래 등 먹거리를 찾아 좀더 먼 바다로 나가다 보니 항해술이 발달한 것 뿐이라고.... 물고기들의 대륙간 이동경로가 항해 경로와 일치한 것이라고...

우리는 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폴레옹의 주적이었던 영국의 길이 단위는 프랑스와 달랐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자국의 단위를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키작은 못난이로 만든 거라고...

역사적 사건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단순히 하나일 수 없다. 수많은 원인 중에 중요한 원인과 덜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중요도를 판단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보게 된 개개인의 몫이다. 교과서가 하나의 원인으로 규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방침은 자유교육을 실시하는 외국의 여러 학교들에서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감히 이러한 교육을 실시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이다.

4. 교과서를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으로 역사 교육을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교과서>를 부정한다고 했을 때,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사실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역사적 진리>를 부정한 채 교육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역사교육을 한다고 해서 <교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며, 과거에 대한 <절대적 사실>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절대적 사실을 진리로 적어놓은 교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과서는 가장 좋은 <역사 교재>가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역사에 있어 권력집단의 속성이나,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교과서>를 통해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교과서>에는 이렇게 씌여있지만, 이것과 다른 견해와 해석이 있다는 점을 주지시켜준다면, 교과서의 내용으로 교육을 전개하면서도 <역사적 다양성>을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좌파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입시교육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면, 외국에서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다.

수업의 첫 단추는 <역사는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대사 부분에서 여러 사료 등을 통해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면서 <역사를 사고>하는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사에서 신화나 설화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우리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 극적 긴장감이나 탄탄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역사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줄거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관점이라면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고대사에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으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전개하거나, 있을 법한 (개연성 있는) 재연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비판적 읽기나 사료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도 있다. (물론 선덕여왕의 미실궁주처럼 현대어를 쓰고, 21세기 인물의 성격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교육이 기존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참고하여 그 시대상과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재창조하는 것이지, 모든 기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지, 포스트모던적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 과거 기록조차도 누군가의 의도 또는 목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재해석해야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래 현대사는 특정 역사관과 사관을 가진 이들이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는 <역사적 진리>을 만들어 왔고, 일제시대부터 특정 이념으로 살아온 이들은 그 이념에 맞게 <역사적 진리>을 구성해왔다.

현대사에서 포스트모던의 역사 교육은, 역사를 지배하고 기술한 이들의 목적과 방법, 내용까지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대상이 된 과거인의 입장과 역사를 서술하는 현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역사를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공교육에서도 현대사 부분은 조심스럽게 간략히 원론적인 부분만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첨예하게 대립된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으로 비판하는 역사 교육은 그런 부분들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다면, 가장 좋은 교육 방안은 <교과서 창조>일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적 이념을 가진 교사가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교재>를 만들고, 다양한 역사적 내용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비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준다.

학생들은 간단한 사료, 토론, 현장학습, 비디오 시청,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재의 내용을 이해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를 직접 작성해고, 서로 토론한 뒤 그 내용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과정으로 역사적 지식의 생성과정을 알고, 스스로 역사적 지식과 흐름을 창조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수업은 고대사부터 현대사를 일관적인 논리 구조로 풀어 설명하는 통사 수업에는 미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시대별, 주제별로 책정된 수업들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글은 가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한 학교가 있다면 한번쯤 해보고 싶은 교육 방침이기도 하다. 물론 이론과 같지도 않을 것이도, 실패하고 고치고 할 부분도 많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오늘 글은 포스트모던에 관련된 글들 중에서 가장 난잡한 글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역사 코드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중국 당제국은 중국 왕조인가, 북방 왕조인가?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건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중국 수나라를 대운하라는 키워드로 한번 살펴보았죠? 당은 그 수나라의 건국 이념과 제도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실제, 수나라와 당나라는 유사성이 참 많습니다. 앞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앞 왕조와 거의 유사한 체제를 가지고 시작하다니... 이유가 뭘까요?

1. 당이 과연 중국 왕조인가?

사실 5호 16국 시대 말기 북주에서 시작되는 지배집단은 당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관롱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서 서위 - 수 - 당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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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이란,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이단아>입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방에서 넘어온 오랑캐도 아닙니다. 이들의 핏줄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관롱집단은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북위 말기부터 서위, 북주를 거치는 동안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의협집단에서 출발했으니까요.

북위를 멸망시키고, 동위, 서위로 중국 북조가 분열되었을 때 서위의 우문태 장군은 서방 중심지로 위수지역의 관중 지방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문태 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강력한 군부가 필요했는데, 이 때 관중지방에서 뭉친 협객들이 바로 관롱집단입니다. 보통 <서위 8주국과 그 후손들, 서위 12수호신>이라 불린 장군들이지요. 실제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이 관롱집단출신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관중지방이 원래 선비족의 본거지로서 선비족과 연결되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북위가 처음 나라를 개창하고 북조를 통일하였을 때, 이 관중지방에 많은 선비족들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중국화되어가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이 관중지방의 선비족들은 한인들과 어울려 남겨 되었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선비족처럼 귀족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서방을 지키는 관리나 향리, 또는 장원 소유자가 되어 지방의 실세가 되었죠.

서위 멸망 후 북주의 중심지가 위수지역이 되자, 북주 총관 양견 등 관롱집단의 인사들이 대거 관료군화 되어 기용됩니다. 양견이 수를 세우자 관롱집단은 건국공신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 관롱집단은 결국 귀족이나 호족도 아니고, 화북의 북방민족도 아니고, 순수한 중국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관중이라는 지역을 매개로 뭉친 의협집단으로서 혈연적 측면은 상당히 약한 집단입니다. 실제, 수나라의 마지막 왕인 양제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모두 관롱집단의 협객 또는 무인 집안으로서 이 둘이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즉, 수와 당의 교체는 어마어마한 왕조의 교체라기 보다, 수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안 관롱집단들이 왕조 교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또, 이 관롱집단의 성격상, 수와 당 제국이 과연 순수한 중국인의 제국인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남조의 한인, 북조의 이민족 사이에서 통일한 수는 북조를 중심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 중국에는 한인, 북방인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수, 당의 중국 왕조 건설은 핏줄상의 중국왕조라기 보다는, 건국 지역 및 건국 이념상의 중국왕조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강좌중국사나, 중국사개론, 동양사개론을 보면 이런 식으로 정리해 놓고 있더군요.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후 북위 이래 선비족들은 한인화되어 혼혈이 증가하였다. 관롱집단도 결국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집단으로서, 장안으로 중심으로 중국식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2. 당의 건국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상

그럼 당 건국까지 중국 남북관계를 간단히 볼까요? 순수한 한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됩니다. 보통 중국 은나라는 천명사상을 가진 동이계통의 민족이 세웠다고 하며, 이 은을 물리친 나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처음으로 보여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강 이북까지를 순수한 중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의 험한 지역을 당시의 석기로 개간할 수 없어서 미개발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 중국의 중화란, 개간이 가능한 황하 - 위수 동쪽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상호 항쟁이 가열되고 금속기가 등장하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의 진이 통일하면서 진시황 때의 중화 개념은 서방 관중지방, 남부 양자강 지방까지로 확대됩니다. 진시황은 북방문화권의 패자인 흉노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북방문화권을 중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 문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을 이야기하면서 문화권의 기준을 농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농경문화권 보다 북방 문화권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5호 16국시대, 인더스 문명의 파괴, 징기스칸의 원정, 게르만의 이동 등등 흉노를 비릇한 북방 문화권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과서에 이 북방 민족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쉽군요.(날 잡아서 북방 민족 변천사를 한번 정리해봐야 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진한시대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만리장성 등 경계가 확실해 지면서, 중화족과 북방족의 항쟁은 천년보다 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한무제 때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중화족이 흉노정벌을 통해 북방족을 밀어내면서 강력한 중화질서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한나라 전체를 걸쳐 북방 민족은 서서히 중국 내부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래 중국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북방 민족들을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북부를 북방족이 차지하면서 <호한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호한이란, 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한다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호한체제를 종식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자가 수문제입니다. 문제의 아들 양지는 다시 중국의 천자임을 이념적으로 내비치며 북방에 대한 공격과 고구려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부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남북조, 유연, 돌궐, 흉노, 고구려 등 다원적 질서에서 중국 왕조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개편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에서는 마지막 원정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체제 전환에 실패하고 말죠.

당나라는 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확실히 중화족이 우위에 서는 세계질서체제로 국가체제를 개편합니다. 즉, 외부민족에 대한 봉건제도와 조공체제를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3. 당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세계국가의 추구

당나라를 창업한 당고조 이연은 사실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주 8주국의 8대신으로서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힌 집단의 후손이었습니다. 또 당의 건국자 이연과 수양제도 이종형제입니다.

여기서 서위 8주국의 대신들이란? 서위 8주국은 서위의 창업자인 우문태와 당시 실력자인 당나라 시조부 이호를 중심으로 연결된 집단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유명한 집안은 독고씨의 독고신은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을 북주의 왕 명제의 왕비, 수문제의 황후, 당시조부 이연의 부인으로 보내어 모든 가문들을 친인척 관계로 얽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시조 이연은 사촌은 수의 양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반란 진압도중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배신을 때려 국가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던 <먼나라와는 일단 친하고, 가까운 지역부터 치고 들어간다>는 <원교근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연의 아들인 당의 태종 이세민은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 당태종, 조선의 태종 등등 살육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이 국가를 정말 잘 다스렸다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정관의 치>라고 부를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죠. 자신이 죽인 형 이건성의 신하인 위징을 심복으로 등용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사에 적힌 이세민과 관련된 미담 중에 사형수들을 풀어준 미담도 있습니다. 이세민이 390여명의 사형수들을 1년간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사형수들이 1년 뒤 모두 돌아오자 이세민이 감동을 받아서 이들 사형수들을 모두 방면해 준 것입니다. 이세민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일화이지요. 그러나 구양수의 <종수론>을 보면, 이세민이 사형수들에게 1년뒤 돌아와야 모두 방면한다는 약속을 모두 한 뒤, 세상을 속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이 이세민 시기의 중국은 그동안의 호한체제를 버리고 중화 중심의 세계주의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인 방현령과 자신이 죽인 형의 심복인 위징에게 나라의 경영 방략을 물었습니다.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이 중요하므로 창업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업론을 말하였고, 위징은 <창업도 중요하나, 창업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럽다>라는 <수성지난론>을 말합니다. 이세민은 수성지난론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이세민은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주의>를 실시한 왕으로서 신하들과의 국정 운영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유명한 <정관정요>입니다. 이 책은 후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국주와 신하의 유교윤리, 정치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태종기의 <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의 내용을 볼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호한체제를 넘어서서 중화제국의 세계화 기반>을 닦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이세민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모든 유목민의 군장으로서 아시아의 왕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천가한이라고 부릅니다. <한>이란 징기스칸의 칸, 흉노의 선우와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신 스스로가 <천가한>이 된 이세민은 직접 주변 민족들을 정복한 후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중국 지방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세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지역은 <부>라 부르고, 지방의 중요지역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이민족 지역을 정복한 후 <도호부>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 통일기에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등이 당나라에 의해 생기죠? 도호부는 이민족 지방의 정복, 도독부는 당의 직할지 정복을 뜻합니다.

즉, 당태종의 업적은 주변 이민족을 철저히 중국에 끌어들이는 정책입니다. 정복사업을 끊임없이 떠나고, 고구려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은 스스로 칸으로 추대받는 정책이지요.

특히, 정복한 지역은 중국이 직할지로 편제하지 않고, 도호부로 편제하여 제한적으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지역 추장보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자치의 대가로 그 지역 추방은 중국을 도와 다른 민족 정벌을 떠나야 하죠. 이렇게 오랑캐에게 자유를 주어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것을 역사에서는 <이이제이>라고 부르죠.

<기미정책>으로 중국에 협조하게 된 민족들은 중국과 봉건제도의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이 왕, 오랑캐족은 신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하국가는 중국에 매년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대외관계를 <봉건질서에 입각한 조공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기미정책과 이이제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2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첫째는 태종 때 있었던 일로서 서돌궐과 동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서돌궐을 지원하면서 동돌궐을 무너뜨린 정책입니다. 돌궐의 내분은 북방에서 당나라에 맞설 나라가 백년이상 사라져 버렸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수백년간 동북아시아의 상권을 지배해온 국가를 무너뜨림으로서 대동강부터 북방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를 중국이 장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라가 삼국통일 당시 신라에 요구한 것은 대동강부터 이북을 당에 넘기라는 조항이었고, 신라는 아주 착실히 그 조항을 이행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대한 동방무역권이 당나라에 넘어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당에서는 이 무역로를 이용하여 거대한 동방이익을 차지합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 남해, 중국을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통하게 되는데 이 무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차지한 자가 바로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장보고>입니다.

3. 고종기의 중화제국의 확장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을 뒤이어 손쉽게 세계제국 건설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 고종기의 업적을 한번 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도호부들이 당나라의 6도호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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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기 당나라 영토는 보통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 전성기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점령한 지역을 표시해보죠.

동부 : 한반도 북부 점령(백제, 고구려 멸망)

서부 : 중앙아시아 진출,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배(천산남로의 도시국가 경략)

납부 :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

북보 : 시베리아 남부 진출

지금 이 지도를 외우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만큼의 영토를 당이 차지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기미정책>에 의해 당에 동화되었다는 점이지요. 당은 동화된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의도적으로 전파합니다. 또는 한반도와 같이 이미 문화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당의 문화체계가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보통 한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파된 한자, 율령, 불교, 유교 등의 중국 사상이 문화권 전체에 더 크게 파급된 시기가 이 시기지요.

다음 장에서는 당나라 2번째 이야기로 당나라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를 한번 다뤄 보로록 하겠습니다. 측천무후와 양귀비 등등 당에서의 여걸 이야기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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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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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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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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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후 민족 통일 정책과 삼한 일통의식의 표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14年)  

처음에 신라는 고구려·신라와 경계가 들쭉날쭉 혼란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질하였는데, 나중에 당과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고 드디어 9주를 두게 되었다. 본국(신라)의 경계 안에 3주를 두고… 백제의 옛 영역에 3주를 두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역에 3주를 두었다.

(《三國史記》34, 雜志3 地理1)  

22일에 왕이 돌아와 논공(論功)하였다. … 백제인들도 다 그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으니, 좌평(佐平)인 충상(忠常)·상영(常永)과 달솔(達率)인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一吉瑗)의 관위를 주어 총관(摠管)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恩率)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大奈麻)의 관위를 주어 대감(大監)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弟監)의 직에 임명하였다.

(《三國史記》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 7年 11月)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그 관등의 순위는 본국(本國)에서의 관직을 보아서 하였다. 경관(京官)인 대나마(大奈麻)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한솔(?率)에게, 당(幢)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대오(大烏)는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으며, 외관(外官)인 귀간(貴干)은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선간(選干)은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상간(上干)은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간(干)은 본국의 한솔(?率)에게, 일벌(一伐)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일척(一尺)은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다.

(《三國史記》40, 雜志9 職官 下)  

신문왕 6년에 고구려인에게 그 본국의 관품(官品)을 헤아려서 경관(京官)을 주었다. 일길찬(一吉瑗)은 본국의 주부(主簿)에게, 사찬(沙瑗)은 본국의 대상(大相)에게, 급찬(級瑗)은 본국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소형(小兄)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제형(諸兄)에게, 길차(吉次)는 본국의 선인(先人)에게, 오지(烏知)는 본국의 조위(?位)에게 주었다.

(《三國史記》40, 雜志9 職官 下)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詔勅)에 답하였다. "…선왕(先王) 춘추(春秋)는 자못 현덕(賢德)이 있었고, 더구나 생시에 김유신이란 양신(良臣)을 얻어 정치에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일통(一統)하였으니, 그의 공업(功業)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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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삼한일통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후 가장 중시했던 사상으로 위 사료 등에서 보입니다. 삼국은 같은 혈통과 언어, 관습으로 묶인 공통체라는 의식을 전제한 것으로서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고 회유하기 위한 신라의 노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무열왕 7년에는 백제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배정하여 백제의 일부 지배층을 신라 사회에 편입시켰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고구려 귀족들을 신라 사회로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문무왕과 신문왕은 옛 백제, 고구려인들에게 신라의 괸직과 관등을 수여했습니다.

또 신라의 통일 후 9주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을 3주씩으로 고르게 편재한다고 하여 민족적 융합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또 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 역시 신라,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고루 편재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렇한 정책으로 삼국통일은 곧 민족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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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후 민족 융합 정책

처음에 신라는 고구려·신라와 경계가 들쭉날쭉 혼란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질하였는데, 나중에 당과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고 드디어 9주를 두게 되었다. 본국(신라)의 경계 안에 3주를 두고… 백제의 옛 영역에 3주를 두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역에 3주를 두었다.

- 삼국사기 34, 잡지 3, 지리 1 -

22일에 왕이 돌아와 논공(論功)하였다. 백제인들도 다 그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으니, 좌평(佐平)인 충상(忠常)·상영(常永)과 달솔(達率)인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一吉瑗)의 관위를 주어 총관(摠管)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恩率)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大奈麻)의 관위를 주어 대감(大監)의 직에 임명하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弟監)의 직에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11월 -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검모잠(劍牟岑) 대형(大兄)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의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인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호소하였다. … 그리하여 신라의 문무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의 금마저(金馬沮)에 있게 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10년 6월 -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그 관등의 순위는 본국(本國)에서의 관직을 보아서 하였다. 경관(京官)인 대나마(大奈麻)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한솔(?率)에게, 당(幢)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대오(大烏)는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으며, 외관(外官)인 귀간(貴干)은 본국의 달솔(達率)에게, 선간(選干)은 본국의 은솔(恩率)에게, 상간(上干)은 본국의 덕솔(德率)에게, 간(干)은 본국의 한솔(?率)에게, 일벌(一伐)은 본국의 나솔(奈率)에게, 일척(一尺)은 본국의 장덕(將德)에게 주었다.

- 삼국사기 40, 잡지 직관 하 -

신문왕 6년에 고구려인에게 그 본국의 관품(官品)을 헤아려서 경관(京官)을 주었다. 일길찬(一吉瑗)은 본국의 주부(主簿)에게, 사찬(沙瑗)은 본국의 대상(大相)에게, 급찬(級瑗)은 본국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에게, 나마(奈麻)는 본국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에게, 대사(大舍)는 본국의 소형(小兄)에게, 사지(舍知)는 본국의 제형(諸兄)에게, 길차(吉次)는 본국의 선인(先人)에게, 오지(烏知)는 본국의 조위(?位)에게 주었다.

- 삼국사기 40, 잡지 9, 직관 하 -

참고글 : 신라의 삼국통일 후 민족융합정책에 대한 내용입니다.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일통삼한의식도 보이며, 또 삼국의 유민들을 이용하여 당을 견재하려 하였던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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